중대재해법 제정 이후...산재 줄이기 위해 남은 과제는?

"실효성 확보 위한 법 개정 더해 산안청 신설, 시민사회 감시 역량 강화 필요"

지난달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이 통과됐다. 지난해 연말부터 이어진 산재 유가족,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숨을 건 국회 단식농성과 이에 대한 시민의 지지에 힘입은 결과였다. 멀게는 2006년 영국 기업살인법의 국내 소개, 2017년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중대재해법 최초 발의 등 십수 년 여에 걸친 법 제정 운동의 성과였다.

하지만 중대재해법이 통과되던 날, 단식을 멈춘 산재 유족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국회에서 중대재해법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재계의 반발에 밀려 애초 논의되던 법안의 주요 내용이 깎여나간 탓이었다. 이 과정에서 법률 명칭에서 '기업'이 빠지기도 했다.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법 통과 하루 전인 1월 7일 "중대재해법 심사를 통해 저는 국회가, 기업이, 공무원이 썩었다는 걸 알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법 제정을 위해 노력해온 이들은 이제 제대로 된 중대재해법을 위한 법 개정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산재를 줄이기 위해 중대재해법 외에 어떤 노력이 더 필요할지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다. 23일 국회에서 이를 논의하는 자리가 열렸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와 정의당이 주관한 '중대재해법 제정의 의미와 향후 과제를 위한 토론회'다.

발제자인 권영국 변호사는 "지금의 중대재해법이 경영책임자에게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나도 감옥에 갈 수 있다'거나 '매출에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줘 실제 산재사망을 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실효성 확보를 위한 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토론자들은 발제자의 문제의식에 공감을 표하는 한편 산업안전보건청 신설,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감시역량 강화 등 산재사고를 줄이기 위해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과제 몇 가지를 제안했다.

▲ 정의당 강은미 비상대책위원장이 23일 국회에서 열린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의 의미와 향후 과제를 위한 종합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대재해법 실효성 확봐하려면 개정 필요

권 변호사는 먼저 '안전보건의무를 위반해 사망사고 등이 발생했을 때 원청 사업주를 포함해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도록 하고 이에 대해 일부 처벌 하한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한 점'을 중대재해법 제정의 의의로 평가했다. 이 같은 점을 보면 중대재해법은 법 제정의 취지를 일부 살리고 있다.

문제는 법의 실효성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권 변호사는 지난 1월 제정된 중대재해법에 법 적용 범위, 경영책임자의 정의, 경영책임자가 수행해야 할 안전보건조치 의무 등이 제한적으로 규정되어 있어 사각지대가 상당하고 경영책임자가 빠져나갈 구멍도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것이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제외다. 50인 미만 사업장에는 3년 시행 유예 조항을 뒀다. 2019년 기준 전체 산재 사망사고의 35%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다. 5~49인 사업장에서 이 비율은 41%다. 현 법률 대로라면 전체 산재 사망사고의 35%는 영영, 76%는 3년간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원청 사업주의 범위도 제한적이다. 중대재해의 절반가량이 발생하는 건설업 분야 원하청 구조의 정점에 있는 발주사가 법 적용대상에서 제외됐다. 지난해 4월 38명이 사망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폭발사고 때도 발주사 한익스프레스가 시공사에 공사기한 단축을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의 중대재해법으로는 건설업 발주사의 이 같은 행태를 감독할 수 없다.

경영책임자가 처벌을 피할 여지도 있다. 중대재해법에는 경영책임자가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또는'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다. 안전보건의무 위반으로 중대재해 발생 시 최고경영자가 아닌 안전보건이사만 처벌받는 선에서 꼬리를 자를 수 있는 여지를 준 셈이다.

권 변호사는 경영책임자가 부담하는 '안전보건 관계 법령에 따른 의무 이행에 필요한 조치 의무'를 '관리상의 조치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점도 중대재해법의 문제로 지적했다. 이를 그대로 해석하면, 경영책임자는 안전보건 관계 법령에 따른 의무 이행을 지시하고 이를 정기적으로 보고받는 것만으로 법을 지켰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 권 변호사는 △처벌 수위를 애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나 정부안에 비해 낮춘 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에서 하한을 삭제하고 상한(손해액의 5배)만 둔 점 △공무원 처벌 조항을 삭제해 안전에 대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와 책임을 면제한 점도 법의 실효성 확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목했다.

권 변호사는 "중대재해법이 제 역할을 다하려면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제외 삭제, 경영책임자의 정의, 안전보건의무 범위 등에 대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며 "징벌적 손해배상의 하한 설정, 공무원 처벌 규정 도입, 중대재해 발생 법인에 매출 대비 벌금형 도입 등 처벌 조항 강화도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산재를 줄이기 위해 눈여겨봐야 할 다른 과제들

이날 토론회에서는 중대재해법 개정 외에 산재 감소를 위해 필요한 과제도 논의됐다.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은 "기존의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에도 사업주의 안전보건조치 의무가 있는데 중대재해법제정 운동이 불거져 나온 것은 행정과 사법 영역에서 산안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산재를 제대로 규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중대재해법도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게 하려면 행정, 사법 전 과정을 면밀하게 살피고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 사회적 감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류 소장은 "이를 위해서는 산재 사고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고 대응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역량 강화와 행정기관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한 구체적인 과제로 △심층적인 산재사고 원인 조사를 위한 중대재해조사보고서 공개운동 △노동조합과 시민사회의 재해조사와 대응 역량 강화 △정부조직 개편을 통한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등을 제안했다.

노사관계 전문가인 정흥준 서울과학대 경영학 교수도 비슷한 취지에서 정부에는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노동계와 시민사회에는 산재 대응 역량 강화를 위한 조직 설립 및 인력 고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 교수는 또 중대재해의 대부분은 간접고용 형태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기업을 향해 "중대재해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기 위해서는 간접고용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낮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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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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