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 국회 본회의 심사를 3일 앞둔 5일, 산재 유가족을 비롯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중대재해법운동본부)가 국회 앞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법에 꼭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밝히며 '재대로 된 중대재해법 제정'을 촉구했다.
참가자들이 이날 중대재해법에 꼭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은 △ 안전보건담당자가 아닌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조치 의무 △ 하한형 도입, 강력한 징벌적 손해배상 등 실효성 있는 처벌 △ 위험의 외주화를 막기 위한 원청 처벌 및 건설업 발주처 처벌 △ 인과관계 추정 조항 도입 △ 불법적 인허가 및 부실 안전점검 책임이 있는 공무원 처벌 △ 소규모 사업장, 일터괴롭힘 등 사각지대 없는 법 적용이다.
참가자들은 산재 사고 이후 직접 겪은 경험 등을 토대로 각각의 쟁점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경영책임자 강력하게 처벌해야 실효성 있는 법 된다"
tvN 고 이한빛 PD 동생 이한솔 씨는 경영책임자의 개입 이후 현장에서 일어난 변화를 짚으며 중대재해법에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조치 의무 명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한솔 씨는 "저희는 CJ ENM이라는 대기업 사장에게서 형의 죽음과 관련해 공식적이 사과를 받았다"며 "그 이전과 이후 회사의 대응이 달랐다"고 말했다.
이한솔 씨는 "사과 이전에 여러 방식으로 싸웠지만 방송제작 관리자의 결정 권한이 미비하고 가용 예산도 작아 효과가 없었다"며 "경영책임자가 문제를 인식한 이후에야 CJ ENM이 지분을 가진 자회사를 비롯해 모든 드라마 제작사와 방송 제작사가 표준 근로계약서를 쓴다고 약속하고 자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노동시간을 지키게 됐다"고 밝혔다.
이한솔 씨는 "경영책임자가 노동자의 안전을 책임져야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며 "경영책임자의 안전·보건조치 의무 명시는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법안 내용"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우드 파쇄기에 끼어 사망한 고 김재순 노동자의 아버지 김선양 씨는 중대재해법의 실효성을 위해 경영책임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 조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선양 씨는 "재순이가 죽기 전에도 2014년 조선우드에서 똑같은 사고로 60대 노동자가 죽었다"며 "사람이 죽어도 아무런 일 없이 지나가니 사업주가 안전장치도 하지 않고 위험업무 2인 1조 작업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선양 씨는 "조선우드 사업주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미안함은 없고 핑계만 대면서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하고 있다"며 "기업주를 처벌해야만 사람이 죽는 환경을 바꿀 수 있다"고 호소했다.
"원청 사용자와 건설업 등 발주처에도 중대재해 책임지게 해야"
삼성중공업 크레인사고 피해노동자 김영환 씨는 자신이 겪은 조선업의 하청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며 '안전보건조치의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는 원청을 처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영환 씨는 "제가 일했던 조선업은 가장 밑바닥에 하청 노동자가 있고 그 위에 하청업체 반장, 다시 그 위에 소장, 또 그 위에 원청 책임자가 있는 구조"라며 "산재가 일어나면 원청 책임자는 항상 하청업체에 책임을 떠넘기며 꼬리자르기로 책임을 회피한다"고 말했다.
김영환 씨는 "이렇게 하면 노동자의 안전 조치에 대한 가장 큰 권한이 있는 원청이 산재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게 된다"며 "하청 노동자를 살리려면 반드시 권한을 갖고 있는 원청을 처벌해야 한다"고 밝혔다.
고 김태규 건설노동자의 누나인 김도현 씨는 비슷한 맥락에서 건설업 등 발주처가 중대재해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도현 씨는 "많은 건설 산재사고가 발주처 때문에 일어난다"며 "지난 4월 38명이 사망한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건설현장 산재사고 당시에도 발주처의 무리한 공기단축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었다"고 말했다.
김도현 씨는 "현재 산안법은 발주처의 책임을 뭊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며 "중대재해법에는 발주처 처벌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인과관계 추정 도입, 공무원 처벌 사각지대 없는 법 적용 필요"
김도현 씨는 이어 산재사망 원인규명 과정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인과관계 추정' 조항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과관계 추정'은 반복적으로 중대재해가 발생한 사업장 혹은 사고 원인 은폐가 발각된 사업장의 경우 산재사망사고의 원인이 사용자 등의 안전·보건조치 의무 위반에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는 내용의 조항이다.
김도현 씨는 "처음 사고가 났을 때 회사는 동생이 '술을 먹고 그랬다'고 이야기했다"며 "경찰이 회사 말만 듣고 사고 책임을 동생에게 모는 사이 현장 증거는 사라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도현 씨는 "결국 추락사한 동생의 몸에 칼을 대는 부검을 했고, 부검 결과 알콜은 검출되지 않았다"며 "장례를 마치고 동생이 일하던 현장에 찾아가서야 화물용 승강기에 안전바나 추락방지시설이 없는 걸 봤다"고 밝혔다.
김도현 씨는 "유가족도 산재사고와 관련해 회사가 갖고 있는 자료를 볼 수 없어 이 모든 걸 제가 일일이 쫓아다니며 조사했다"며 "회사가 증거를 숨기지 못하게 하는 인과관계 추정 조항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이밖에 손의찬 중대재해법 운동본부 법률팀 변호사는 "중대재해를 막는 1차적인 책임은 사업주에게 있지만 공무원이 사전에 인허가 업무를 제대로 하거나 관리감독을 제대로 했다면 막을 수 있는 중대재해도 많다"며 공무원 처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혜진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는 "직업병, 일터괴롭힘 등 사각지대 없는 중대재해법 제정이 필요하다"며 "소규모 사업장 법 적용 유예도 폐기돼야 한다"고 밝혔다.
유가족들의 바람과 달리 후퇴한 정부 중대재해법안, 국회의 선택은?
이날 운동본부가 표명한 입장은 지난달 29일과 지난 4일 정부가 발표한 중대재해법안에 반하는 내용들이다.
지난달 29일 정부안에는 △ 원청 사용자의 중대재해 책임을 사업주 등이 시설, 설비 등을 소유하거나 그 장소를 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경우로 축소 △ 건설업 발주처의 중대재해 책임 삭제 △ 하한만 설정돼있던 징벌적 손해배상액과 사업주 벌금에 상한 설정 △ 인과관계 추정 조항 삭제 △ 공무원 처벌 신중 검토 △ 100인 미만 사업장 2년, 50인 미만 사업장 4년 법 적용 유예 등 운동본부의 주장에 비해 적용 범위 등이 약화된 입법 의견이 담겼다.
지난 4일 정부안에는 몇 가지 후퇴안이 추가됐다. 구체적으로는 △ 300인 미만 사업장에도 2년 법 적용 유예 △ '사업주와 경영책임자'로 되어있던 처벌 범위를 '경영책임자 또는 안전보건담당 이사'로 축소 등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회 법안심사소위원회는 이날 오후 2시경 국회에 제출된 여야 5개 법안과 정부안을 두고 중대재해법안 심사에 들어갔다. 여야는 심사 결과를 토대로 오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중대재해법을 처리할 계획이다.
이를 두고 양대노총도 이날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제대로 된 중대재해법 제정'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양대노총은 "노동자와 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법 제정의 근본 취지를 온전히 살려야 한다"며 "오늘 열리는 법사위 소위는 노동자와 시민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목숨을 건 외침을 받아들이고 온전한 법제정에 즉각 합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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