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남편처럼, 다시는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는..."

[문중원 1주기, 남겨진 사람들 上] 故 문중원 기수 부인 오은주 씨 인터뷰

오는 29일은 문중원 기수의 1주기다.문 기수는 조교사의 부정 경마 지시 및 조교사 개업 심사 과정의 비리, 기수들의 열악한 처지를 고발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2019년 11월 29일 세상을 등졌다. 문 기수가 일했던 한국마사회 부산경남(부경)경마공원의 2005년 개장 이래 기수로 보면 4번째, 기수와 말관리사를 합하면 7번째로 일어난 비극적 죽음이었다.

부경경마공원은 전국 세 곳의 경마장 중 이른바 '선진 경마'를 가장 모범적으로 시행한 곳으로 꼽힌다. '선진 경마'의 주 내용은 비경쟁성 임금 축소 및 순위상금 비중 확대 등 경쟁 강화, 기수와 말관리사의 개인사업자 형태 고용 등 마사회의 사용자 책임 약화다.

문 기수의 유족은 그의 억울함을 풀고 '선진 경마'에 균열을 내 기수와 말관리사가 더이상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난 겨울 100일여를 싸웠다. 당시 유족은 생전 문 기수가 가입했던 공공운수노조 및 여러 시민단체와 함께 마사회를 상대로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대책 마련,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했다.

지난 3월 6일, 마사회와 문중원시민대책위, 문중원열사대책위는 합의에 도달했다. 합의서에는 책임자 처벌에 관한 사항과 함께 △ 경주기승 8회 이상 부경기수 월평균소득 300만원 이상 되도록 지원 △ 조교사 개업 심사 투명성 확보 △ 부정 경마 지시 금지 등 내용을 담은 표준계약서 체결 권장 등 기수 처우 개선을 위한 제도 개선책이 담겼다.

이후 8개월 여가 흘러 문 기수 1주기가 돌아오고 있다. 마사회를 상대로 한 싸움의 주역이었던 유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마사회는 합의서에 명시된 제도 개선책을 이행했을까. <프레시안>이 이를 살펴보는 두 편의 기사를 준비했다.

첫 편은 문 기수의 부인인 오은주 씨 인터뷰다.

오은주 씨는 세상에 없는 남편 문중원 기수를 "별"이라고 부른다. 남편의 묘비에는 "하늘의 별이 된 당신이 더욱 찬란하게 빛을 내 우리가 가는 길을 밝게 비춰줘"라고 적었다. 지난 13일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역에서 열린 '비정규직 결의대회'에서는 "제 남편이 하늘의 별이 된지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한국마사회에는 또 다른 죽음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 씨가 남편을 별이라고 부르는 건 아직 어린 두 아이(큰 아이 9살, 작은 아이 7살)가 아빠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밤이 되면 별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하늘나라의 별이 됐어"라고 말해주면 아이들이 어디에 있든 아빠를 기억할 것 같다. 또 아이들은 앞으로 아빠 없이 많은 날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 아이들이 '아빠가 별이 되어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그 마음을 아는지 오 씨의 아이들은 별이 보일 때면 "아빠다!"하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냐는 질문에 오 씨의 답도 "잊지 말아요"였다.

오 씨에게 또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더는 일하다 죽는 노동자나 열사가 나오지 않는 한국사회, 그래서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이 없는 한국사회다. 인터뷰 중 남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면 오 씨는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말을 시작하려 애썼다. 이 두 바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오 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18일 부산역 근처 카페에서 진행됐다.

▲ 오은주 씨는 "잊지 말아요"라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지난 13일 성남 모란공원 열사 묘역에 가 '비정규직 결의대회'에서 연단에 올라 '더이상 제 남편이나 전태일 열사 같은 노동자는 없어야 한다'고 말한 걸 봤습니다. 울먹거리기도 했는데요. 어떤 마음이었나요?

오은주 : 모란공원에는 처음 갔어요. 모란공원이 아니더라도 묘역에 간다는 자체가 마음이 무거운 일이잖아요. 입구에서부터 마음이 그랬어요.

들어서니 정말 많은 열사의 영정 사진이 있는데 신기하게 남편 사진이 제일 먼저 눈에 딱 들어오더라고요. 또 정말 많은 피켓이 보였는데, 사실 그것도 일부에 불과하잖아요. 더 많은 노동자가 억울하게 돌아가셨잖아요. 저도 유족 입장이니까. 울컥했어요.

프레시안 : 전태일 50주기나 문중원 기수 1주기 행사 같은 일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오은주 : 제게 11월은 아픈 달이에요. 1주기가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속절없이 야속하게 시간이 빨리 흘렀네요.

전태일 50주기 때 연단에 오르는 것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부담이 됐어요. 그래도 저를 불러준다는 건 제 남편 문중원을 기억한다는 거니까. 그 의미가 커서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갔어요. 또 거기 계셨던 분들이 제가 싸울 때 연대하고 도와주신 분들이잖아요. 그 마음이 너무 고맙기도 했어요.

프레시안 :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도 "사람들이 용균이를 기억해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싸움이 끝난 뒤 김 이사장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나요?

오은주 : 전태일 50주기 추도식 때도 오셨어요. 김미숙 어머니랑 만나면 어머니도 굉장히 힘드실 텐데 "우리가 힘내서 잘 싸우고 잘 살아야지" 오히려 걱정을 해주세요. "아이들이 있으니 아이들 때문이라도 잘 먹고 견뎌야 한다"는 말씀도 하세요.

저도 많이 위로해드리고 싶은데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하는 걱정이 앞서서 말은 못 하고 그냥 팔짱 껴드리고 꼭 안아드려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느껴지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아빠를 잃은 아이들, 남편을 잃은 오은주의 지난 8개월

프레시안 : 싸움이 끝나고 8개월여가 지났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오은주 : 3월에 합의가 돼 어느 정도 주변 정리를 하고 6월에 이사를 갔어요.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요. 지치더라고요. 아는 사람을 기피하는 증상이 생겨서 많이 힘들었어요. 지금은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제 아이들은 아빠 없는 아이들로 살아가고 있고, 저는 남편 없는 오은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 또한 적응하는 단계로 살고 있어요.

웃을 때도 있고, 하염없이 울 때도 있어요. 빈자리가 많이 느껴지지만 아이들이 있으니까 아이들을 키워야 하니까 살아야 되고…. 세 가족이 나름 잘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프레시안 : 어떤 때 웃게 되고 어떤 때 울게 되나요?

오은주 :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학교에 갔다 와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때,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 많이 웃어요.

울 때는….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아빠한테 하고 싶다'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잖아요. '아빠한테 가면 이야기해주자'고 말은 하지만 속은 무너져요. 아이들을 다 재우고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면 울게 돼요.

프레시안 : 문 기수를 떠올리는 게 아픈 일일 것 같아요.

오은주 : 그냥 너무 불현듯 (남편) 생각이 자주 나요. 요즘 일을 이야기하면, 가을이고 단풍이 들었는데 '예쁘다' 하면서도 '왜 이렇게 예쁘고 좋은 세상을 더 보지 못하고 먼저 갔을까' 생각했어요. 8월에는 둘째 아이 생일이었어요. 항상 같이 생일 초에 불붙이고 불어서 끄고 기뻐했는데….

이번 추석 차례를 지낼 때는 엄마가 "우리 사위 중원이 밥도 하나 올리고 생선도 구워서 올리자"고 했어요. 그 음식을 준비하면서부터 너무 눈물이 많이 났어요. 명절이면 같이 있었는데 그 상에 남편의 밥을 올린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항상 남편과 같이하던 일을 남편 없이 할 때 가장 힘들고 너무 많이 생각이 나요. 빈자리가 너무 크게 와 닿아요.

프레시안 : 싸움이 끝난 뒤에 심리치료를 받으실 거라는 이야기를 하신 걸 봤어요.

오은주 : 심리치료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저는 심리치료는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부산에 돌아왔을 때 아이들을 키우면서 바쁘게 살아갈 줄 알았는데 모든 슬픔이 쓰나미처럼 확 밀려오는 거예요. '왜 이런가' 생각하니 서울에서 투쟁할 때는 슬프지만 온전히 슬퍼할 수는 없었던 것 같아요. 기자회견, 오체투지…. 일정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내가 아이들을 키우려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내가 스스로 차릴 수 있을까.'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남편도 절대 이런 걸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상담을 받았어요. 많이 토해내고 울고 도움을 받았어요.

11월이 와서 좀 힘들긴 하지만, 심리치료를 받지 않았다면 이런 인터뷰에도 못 나왔을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제가 잘 웃으니 괜찮은 줄 알지만 사실 마음은 안 괜찮거든요.

▲ 지난 1월 21일, 과천 경마장에서 정부 서울청사까지 문 기수 죽음의 책임자 처벌, 기수 죽음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며 오체투지를 하던 중 고령인 아버지 오준식 씨가 주변의 만류에도 오체투지를 시작하자 눈물을 터뜨린 오은주 씨. ⓒ프레시안(최형락)

오은주 씨의 눈으로 돌아본 문중원 열사 투쟁

프레시안 : 문 기수의 죽음 이후 99일을 싸워서 마사회와 합의서를 쓴지도 8개월여가 지났는데요. 좋은 의미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인가요?

오은주 : '희망 차량 행진, 1000대의 바람이 되어' 그날은 웃으면서 울었어요. 너무 감동받았어요. 저는 그날 광화문광장에서만 차량 행진을 봤거든요. 나중에 유튜브로 보니 과천에서부터 차들이 엄청나게 줄을 서서 서울로 오는 거예요. 저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코로나를 뚫고. 너무 고마웠고 '제가 뭐라고'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물론 저 하나 때문에 오신 건 아니겠지만요.

차량 행진이 끝나고 남편과 함께 서울대병원에 갈 때는 너무 슬펐지만 제 남편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을 그분들이 함께 해주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싸우던 때를 떠올리면 너무 슬프지만 그나마 미소 지으며 떠올릴 수 있는 순간이에요.

('희망 차량 행진, 1000대의 바람이 되어'는 지난 3월 7일, 코로나19로 집회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문 기수 죽음 100일을 맞아 책임자 처벌과 기수 죽음 재발방지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뜻을 보여주기 위해 준비된 행사다. 당일 700여대의 차량이 과천 경마공원에서 정부 서울청사까지 달렸다. 다행히 전날 마사회와 유족을 대리한 문중원시민대책위, 문중원열사대책위 간 합의가 이뤄졌다.)

프레시안 :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오은주 : 시민분향소 행정대집행이 있던 날(2020년 2월 27일)이요. 너무 마음이 아팠는데 그걸 넘어서 화가 났어요. 추모공간이었고 바로 옆에 있는 운구차에 남편이 버젓이 누워있었는데 용역과 경찰이 분향소를 마구잡이로 다 뜯어냈어요.

정말 우리 모든 유가족의 심장을 뜯어내는 순간이었어요, '(분향소를 철거하는) 저 사람들이 사람인가' 생각했고, 철거를 집행한 정부에도 굉장히 분노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프레시안 : 함께한 노동자와 시민이 유가족의 눈물을 닦아주고 정부가 상처를 키운 셈이네요. 기수 죽음 재발방지 대책 등을 두고 마사회와 합의한 3월 6일에는 어떤 생각을 했나요?

오은주 : 합의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제가 "어젯밤에는 남편을 보내는 오늘이 올까봐 잠들기 싫었다"고 했어요. 투쟁이 끝나고 합의가 돼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진짜 가는구나. 보내야 하는구나. 100일이 아니라 200일, 300일도 더 옆에 둘 수 있는데 더 두고 싶은데 결국에는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었어요.

프레시안 : 합의 다음날부터 남편의 장례를 치렀죠. 그때는 어땠나요?

오은주 : 남편이 병원을 세 번 옮겨가며 장례를 치렀어요. 그때마다 다 마음이 달랐어요. 첫 장례식장에서는 넋을 잃은 사람이었고요, 두 번째 장례식장에서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지'하는 두려움이 컸어요. 서울에 상경하고 남편을 마지막으로 보내던 때는 처음으로 '잘 가'라고 얘기했어요. 그동안 한 번도 못 했는데….

아이들도 옆에 있었는데 첫째가 굉장히 많이 울었어요. 아빠가 관 안에 있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저는 아빠가 없어 본 적이 없으니까 아이들 마음을 모르겠는 거예요.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고 가엾고.

하지만 장례식장에도 많은 사람이 와주셔서 '남편이 외롭지 않게 가는구나' 생각도 했어요.

노조 설립과 조교사 개업 심사 폐지, 연이은 죽음 전에 있었다면

프레시안 : 지난 5월 기수노조가 설립신고필증을 받았죠.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었나요?

오은주 : 기수들이 특수고용노동자잖아요. 마사회가 노동조건에 대한 모든 권한을 다 갖고 있지만 법적으로는 개인 사업자잖아요. 그래서 그간 노조 할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악 소리도 못 내고 억울한 죽음이 반복돼왔잖아요.

그런데 필증이 나와서 너무 잘 됐다고 생각했어요. 마사회와 교섭도 하고, 당연한 요구를 큰소리로 외치기도 하면서 더 이상의 죽음을 막고, 부당한 대우 받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프레시안 : 문 기수가 유서에서 조교사 개업 심사 과정에서 겪은 부당한 일을 호소했는데 지난 11일 마사회가 조교사 개업 심사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더라고요. 이때는 어떤 마음이었나요?

오은주 : 조교사 개업 심사 폐지는 저희의 요구 중 하나였는데 합의서를 쓸 때는 마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결국 그렇게 된 건 굉장히 잘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마음이 아팠어요. 진작 이렇게 했다면 남편도 죽지 않았을 텐데….

▲ 지난 3월 7일, 마사회와의 합의가 끝난 뒤 열린 '희망 차량 행진'에서 참가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있는 문중원 기수 유족. ⓒ공공운수노조

더는 일하다 죽는 노동자가 나오지 않는 사회가 되길

프레시안 : 싸움이 끝나고 스스로 변화가 있나요?

오은주 : 부끄럽지만, 사실 노동조합이나 해고자, 비정규직 이런 문제에 관심이 크지 않았어요. 제 삶의 테두리 안에만 있다가 문을 열고 그 밖으로 나간 건데. 세상에는 진짜로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이제서야 관심을 갖는 게 너무 죄송스러워요.

제가 활동가는 아니지만 이런 마음이 자꾸 들어요. 제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연대한다기보다는 (해고자나 비정규직을 보면) 그냥 너무 억울할 것 같은 거예요.

전태일 추도식 끝나고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같이 행진을 했어요. 그날 한 분이 남편 피켓을 들고 경찰과 대치하는 걸 보는데 갑자기 확 감정이 올라왔어요. 그래서 그분에게 '제가 피켓을 들고 걸으면 안 될까요'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때 그분들이 전태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문중원도 전태일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분들과 같이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함께 행동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남편 피켓을 들고 10km를 걸었어요. 막상 걸으니 너무 힘들기도 했지만요(웃음).

프레시안 : 최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두고 제정해야 한다는 쪽과 아니라는 쪽 사이에 격론이 일고 있잖아요. 이걸 보면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오은주 :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노동자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법이잖아요. 다른 한편에서는 벌금 살짝 올리는 수준에서 산업안전보건법만 개정하려고 하는데, 이 정도로 그친다면 누가 노동자들의 안전을 책임지려 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경마장에서도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하지만 책임 있는 사람이 처벌되진 않았어요. 제 남편의 유서에 이름이 나온 그분조차도 아직 처벌받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단순히 벌금형에 그친다면 결국 제2, 제3의 문중원이 나오는 걸 내버려 두겠다는 거잖아요.

노동자의 죽음에 솜방망이 처벌을 한다면, 앞으로도 누구는 떨어져 죽을 것이고, 또 누구는 끼어 죽을 거예요. 마사회에서도 죽음의 경주가 계속될 거고요. 반드시 중대재해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프레시안 : 지난 11일 김용균재단에서 <산재사망사고 유가족 안내서>를 냈더라고요. 단계별로 유가족이 처하는 상황을 설명하며 유가족의 법적 권리, 할 수 있는 일 등을 설명한 책이던데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혹시 은주 씨도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을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오은주 : 굳이 '저처럼 싸우세요' 이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억울하게 죽었다면 반드시 소리 낼 필요는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찌 보면, 저는 그래서 견뎠어요. 사실 그 3개월의 투쟁이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게라도 남편의 한과 살아있는 가족들의 한까지 풀어냈기 때문에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유족도 이런 억울한 죽음이 생긴다면 '내가 억울하다. 너희들이 잘못했다'라고는 꼭 이야기를 하시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프레시안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오은주 : 이제 남편이 없지만 남아있는 기수나 말관리사, 다른 기업의 노동자들이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되면 좋겠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모른 채 안 넘어가면 좋겠어요. 제발.

많은 노동조합과 시민단체가 정말로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서, 더 잘 살기 위해서, 죽지 않고 차별받지 않으려 목소리를 내잖아요. 그걸 한국사회가 계속 묵인하고 책임지지 않으려 하면 억울한 죽음은 계속되고 윗분들이 싫어하는 투쟁도 계속될 수밖에 없잖아요.

제가 모란공원에 간 날, 전태일 열사 묘에 훈장이 있었는데 사실 훈장보다 열사가 안 나오는 게 더 중요한 일이잖아요. 한국 사회가 더는 열사가 나오지 않는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그게 사회를 위한 길이고, 기업이 더 잘 되는 길이고, 모든 노동자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해요.

▲ 인터뷰 중인 오은주 씨.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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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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