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된 공론의 정치, 갈등 부추기는 언론

[최창렬 칼럼] 정치와 언론은 제대로 기능하는가?

정치사회적 의제에 대해 합의를 모색하는 메커니즘이 실종된 공동체가 경쟁력을 가질리 만무하다. 상호 차별성을 인정하고 중용을 모색하는 기능의 부재는 갈등과 대립의 연속만을 결과하기 때문이다. 타자(他者)를 승인하고 인정하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다. 그러나 지배와 합병을 통한 이익의 추구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촛불집회의 주인공들인 시민의 공화주의적 덕성 또한 희미해졌다.

정치를 무력화하고 폄훼함으로써 이득을 취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는 세력, 이에 부화뇌동하는 어용지식인들이 정치적 무관심을 선동한 적이 있었다. 군사권위주의 시절 때 얘기다. 그러나 수많은 매체와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정치 기사와 정보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시민들은 언론과 매체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노출되면서 정치적 무관심이 반정치의 주범으로 인식되는 때는 지났다.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의 의사가 정당성을 가지려면 편파성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 여론은 위험하다. 문제는 올바른 여론의 형성인데 편견과 당파성에 포위된 언론이 여론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면 불편부당한 여론의 순기능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사회적 의제나 쟁점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 것은 민주사회의 역동성과 다양성의 조화라는 면에서 원칙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준거적 관점에서만 사물과 현상을 관찰하는 독해법에 익숙한 한국사회에서 의견의 다름은 다양성의 긍정적 기능과는 거리가 먼 차별과 배제로 이어진다. 경쟁과 길항을 넘는 냉소와 적대의 차원에서 현상에 대한 관념을 받아들이는 한국에서 통합이 강조되는 이유일 것이다.

논어에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구절은 꽤 알려져 있는 문장이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되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같음을 강요하며 공존하지 못 한다'는 뜻이다. 주류와 비주류가 지배담론과 비판담론으로 나뉘어 경쟁하되 상호존중과 공존의 질서를 이루는 것이 '화이부동'이다. 우리사회는 이와는 대척에 있는 '동이불화'의 사회다.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구별했다. 그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객관적 평가의 잣대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답을 이끌어내는 것이지만 정치적인 것은 객관적 척도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없는 의견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것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적 의제로 전화(轉化)한 사회적 문제는 공적 담론의 장에서 토론과 설득의 방식으로 다뤄져야 한다. 전문가나 이해당사자들에게만 맡겨지고 시민사회에서의 공론장의 토론이 생략되는 의견은 결국 정치의 포기에 다름 아니다.

의료계와 정부의 최근 갈등은 공공의 영역과 시민의 건강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에서 공적 담론이 배제된 대표적 케이스다. 정부와 의료계는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기저에는 '대화로 안 되면 각자의 길을 간다'는 '동이불화'의 논리가 깔려있다.

긴급재난지원금에 대해서 여당의 이낙연 대표와 이재명 경기지사의 갈등은 정책의 우위를 점하는 쪽이 기선을 제압한다는 정치공학의 지배 담론이 작동하고 있다. 물론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이재명 지사와의 공방, 여권 내, 여야 간의 정책을 둘러싼 담론 투쟁은 토론을 통한 합의의 모색이라는 기본 원칙이란 면에서 볼 때 긍정적인 면이 많지만 이에도 시민들의 공론의 장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언론은 보수언론과 반대 진영의 진보언론으로 양분되어 있다. 사회적 이슈와 현안에서도 거의 정확히 입장이 갈린다. 역사적 연원 및 언론사 탄생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지만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신문이 비교적 일관된 이념적 지향성을 보이는 것에 반해 방송들은 대체로 인사와 내용면에서 신문에 비해 정권의 지향에 상대적으로 민감하다. 언론은 편견을 배제하고 자신의 준거 틀에 입각한 진영논리에 기대어 이익을 보려는 퇴행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기존의 전제들에 대한 판단을 중지·유보해야 한다.

의정 갈등, 긴급재난금 지원의 대상과 시기, 부동산 불평등 문제, 광화문 집회와 사랑제일교회 등 사회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 촛불정부가 시민의 동의에 기반해 정당성을 확보한 정권이라면 다시 시민적 에너지를 한 곳에 모아나가는 정치를 복원하는데 진력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들 다수의 의식 속에 지금의 권력 엘리트들은 이러한 과정들을 생략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러한 '오해'들을 풀 당사자는 야당이 아닌 여당과 집권 핵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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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다양한 방송 활동과 신문 칼럼을 통해 한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해왔습니다. 한국 정치의 이론과 현실을 두루 섭렵한 검증된 시사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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