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확산 통로이자 코로나에 맞설 무기, '사회'를 생각한다

[장석준 칼럼] 21세기에 지향해야 할 '사회' - 자율적 시민사회와 민주화된 국가의 결합

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 새삼 절실하게 다가오는 말 가운데 하나는 '사회'다. 지난 번 칼럼에서는 코로나19 초기 유행 과정에서 다시 곱씹게 된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뤘는데("'K방역'의 성취가 도달한 그곳에, 'K불평등'도 있었다", <프레시안> 2020. 5. 6), 이번에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사실 '사회'라는 말과 코로나19의 인연은 간단하지 않다. '사회'를 표어로 내건 이념, '사회주의' 때문이다. 코로나19 감염증은 바로 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처음 유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변종 바이러스가 특정한 체제 탓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바가 너무 많다. 하지만 중국 당국이 신종 바이러스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의사들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바람에 사태가 악화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후 대응 과정에서도 중국식 '사회주의'는 당-국가 권위주의 체제의 모순과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인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코로나19와 맞서면서 삶의 여러 측면 중에서도 무엇보다 '사회'에 주목해야만 한다. '사회'를 재발견하고, 재규정하며, 재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쩌면 20세기에 굳어진 '사회주의' 관념 또한 21세기에 참으로 필요한 내용과 형태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코로나19를 통해 알게 되다, 우리는 점이 아니라 선임을

코로나19 대유행을 겪으며 '사회'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참으로 사회적 존재라는 새삼스런 깨달음에 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진부한 명제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이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상에서 우리는 자신을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 개인으로 바라보는 데 더 익숙했다. 좀 더 확대하면, 가족 정도가 최대치였다. 사회란 우리 감각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무엇이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간들을 이 잠에서 깨웠다. 이 변종 바이러스는 우리 삶에 떨어진 염색시약과도 같았다. 코로나19 감염병이 훑고 지나간 곳마다 그간 눈에 잘 띄지 않던 인간 삶의 실상이 뚜렷이 드러났다. 그 실상이란 어지럽게 교차하는 무수한 선들의 모습이었다. 점들이 아니라 선들. 이 선들을 타고 바이러스는 삽시간에 수많은 감염자를 낳았으며, 불과 며칠만에 중국의 한 도시에서 세계의 모든 메트로폴리스로 확산됐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가 점이 아니라 선임을, 개인이 아니라 우선 사회의 일부임을 일깨웠다.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재난의 측면에서만 이를 확인한 게 아니었다. 재난에 맞서는 과정에서도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개인은 감염병에 맞서는 고립된 전장일 수 없었다. 인간이 이렇게 바이러스 앞에서 단독자라면, 구원은 그야말로 기적의 영역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인간은 결코 그런 의미의 단독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그냥 개인이 아님이 이토록 반갑고 고마우며 힘이 되는 진실일 줄이야!

그렇다고 개인을 넘어선 힘이 가족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가족이 마치 자급자족의 단위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생존 경쟁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단위로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바이러스 앞에서 가족은 개인만큼이나 무력했다. 가족은 인류 문명의 최신 역량을 응축한 모나드일 수 없었다. 그런 역량의 측면에서 가족보다 근본적이고 선차적인 것은 사회였다.

사회는 이름도 모르는 공무원과 자원활동가, 방호복에 가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의사와 간호사로 다가와 가장 유능한 전우의 역할을 도맡았다. 바이러스 확산의 통로가 된 것도 사회이지만, 이에 맞선 유일한 원군도 사회다. 죽음의 위협에 처하는 것은 개인이더라도 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다. 종교 시설들이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고 온갖 성스러운 기념일 행사가 연기되는 와중에도 사회는 21세기 인류를 위한, 가장 믿을만한 종교의 기능을 꿋꿋이 이어갔다.

그런데 코로나19 대유행을 통해 새롭게 조명된 것은 이런 사회의 근본적 중요성만이 아니었다. 21세기에 어울리는 사회의 얼개와 작동 방식에 대해서도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여기에서 '21세기'란 '제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해야 할 정도로 과학기술이 고도화됐다는 복된 의미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바로 그 과학기술이 이윤 추구와 자본 축적을 위해 두 세기 넘게 남용된 결과로 신종 바이러스 유행, 대기 오염, 기후 위기 같은 생태적 재난이 빈번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 시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통해 이런 시대를 맞이하는 거대한 예행 연습을 치르면서 우리는 항구적이고 반복적인 지구 생태계의 반격에 대응할 사회의 기본 골격과 행동 양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일별할 수 있었다. 그것은 20세기 '사회주의' 관념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중국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일당 지배 국가가 사회의 온갖 좋은 측면을 (따라서 온갖 나쁜 측면까지도) 대행하겠다는 식일 수는 없다. 또한 지금 미국이 그러하듯이 국가가 맡아야 할 기능을 대자본에게 넘겨줌으로써 또 다른 방식으로 사회의 다른 부분들을 무대 주변으로 밀어내는 식일 수도 없다.

자본이 지배하던 인류의 한 시대가 자초한 재난을 견뎌내면서도 인류 문명의 가장 좋은 것들을 지키고 살려내야 할 사회란 (옛 패권 국가와 새 패권 지망 국가가 각각 대표하는 위의 두 모델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국가기구의 유기적 결합이어야 한다. 코로나19의 초기 방역에 어느 정도 성공한 한국 사례에서 드러난 것처럼, 고도로 자율적인 시민사회와 일정하게 민주화된 국가기구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협력해야만 한다. 물론 여기에서 '자율적'이란 '자유'뿐만 아니라 '자기 규율'을 뜻하기도 하며, 국가의 민주화(책임을 느끼는 국가)는 반드시 국가 역량의 강화(책임을 이행하는 국가)를 동반해야만 한다.

이런 역동적이고 중층적인 성격을 띠는 시민사회-국가 복합체는 어떠한 제도나 관계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가령 공적 마스크 판매 체계를 통해 마스크 품귀 현상을 극복한 사례를 떠올려보자. 이 경우에 시장의 역할이란 시민사회-국가 복합체가 해낸 일에 비하면 조연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게 본래 시장에 딱 어울리는 배역이다.

아무튼 미국식도 아니고 중국식도 아닌 시민사회-국가 복합체만이 인류 역사 최대의 위기와 최고의 기회가 늘 함께 대두할 21세기에 '사회'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몇 달간 한국 사회의 방역 성공담이 이를 증언한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시험 또한 여기에 있다.

21세기에 지향해야 할 '사회' - 자율적 시민사회와 민주화된 국가의 결합

벌써부터 많은 이들이 '코로나19 이후'를 이야기한다. 안타깝게도, 지난 몇 달간의 경제 활동 중단 때문에 안달이 났거나 이번 재난 역시 큰 판을 벌여볼 기회쯤으로만 보는 지배자들이 이런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정녕 인류의 생존을 위한다면, 이번만큼은 재난 중에 배우고 익힌 교훈을 중심에 두고 재건에 나서야 한다. 재발견하고 재규정한 '사회'를 지도와 나침반 삼아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이 경우에 재건 작업의 주된 방식 역시 결국은 우리가 관계 맺고 실감하며 삶의 주된 기반으로 삼을 '사회'들을 조직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대중이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재건 과정일수록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 삶 곳곳에 국가와 기업 말고도 '사회'를 실체화할 새로운 결사체들을 만들고 키워야 한다.

대전염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미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는가. 오랫동안 이 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결사체였던 대형 교회나 신흥 종교 집단은 더는 대안일 수 없음이 드러났다.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에 사회를 존립시키는 기둥 구실을 한 배달 노동자들에게 가장 긴급히 필요한 조직은 강력한 노동조합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이야기이지만, 초기 방역에 실패한 서유럽 국가들에서 그나마 협동조합들만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다. 이들 경험은 앞으로 우리가 새롭게 엮어가야 할 '사회'의 모습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벌써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이런 미래의 싹들을 가로막고 있다. '코로나19 이후'를 열어 보이겠다는 지배자들의 담론은 사회의 재발견을 마치 없던 일인 양 만들려는 시도로 가득하다. 코로나19의 교훈을 살리겠다며 공공 의료가 아닌 원격 의료, 비대면 진료를 내세우는 현 정부-여당이 그 전형적인 사례다. 이 모든 재앙의 원천인 이윤 추구와 자본 축적의 시스템이 사회를 재발견한 대중의 전진을 막아선 형국이다.

그렇기에 사회의 재발견은 자본주의와 정면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반자본주의 혹은 탈자본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산업 사회가 막 밝아오던 무렵 영국의 공장주 로버트 오언의 "사회에 대한 깨달음"(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이 이후 거대하고 다채로운 사회주의 이념-운동의 원류가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사회에 대한 깨달음은 '사회'를 중심에 둔 탈자본주의 이념-운동으로 발전하고 확산돼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각성의 심화-확산이 최대한 가속화돼야 한다는 점이다.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사회 변혁과 문명 파괴 사이의 양자택일이 속도전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을 비롯한 생태적 재난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심각하게 해독해야 할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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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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