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중 메모' 사건이 드러낸 '박근혜 대못'

[기자의 눈] 김성태표 혁신은 실패한다

알쏭달쏭한 메모 한 장이 자유한국당을 무덤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이른바 '박성중 메모' 사건.

발단은 박 의원의 휴대전화에 담긴 메모가 언론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불거졌다. 메모에는 '친박-비박 싸움 격화', '친박 핵심 모인다-서청원, 이장우, 김진태, 박명재, 정종섭 등등', '세력화가 필요하다. 적으로 본다. 목을 친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바른정당에서 복당한 박 의원은 비박계다. 친박계는 자기들 목을 치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김진태 의원은 "결국 내심은 이것이었나"라고 반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른정당에서 돌아온 '복당파' 의원들이 비공개 모임을 가진 뒤에 이 메모가 언론에 알려졌다.

논란이 커지자 박 의원은 미주알고주알 해명했다. 요약하면, 메모는 복당파 모임에서 나온 말들 가운데 요지만 적은 것으로, 지방선거 전부터 정우택 의원, 이완구 전 의원 등 친박계가 세력화하려고 움직여 왔으며, 이들은 나중에 복당파를 쳐내려고 할 것이니 복당파도 세력화가 필요하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목을 치는' 주체가 비박이 아닌 친박이라고 팩트를 해명한 것인데, 이 해명은 역설적으로 보다 큰 팩트를 드러냈다. 친박이든 비박이든 여전히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며, 물밑에선 저마다 죽지 않으려 세를 불리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당의 진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21일 의원총회에서도 의원들은 '박성중 메모'를 놓고 난타전만 벌였다. 정확하게는 '박성중 메모'를 꼬투리 잡아 친박계가 김성태 권한대행 체제에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당 계파 갈등을 "역사에 기록될 비극적 도돌이표"라는 말을 남기고 전날 탈당한 서청원 의원의 선견지명이 확인된 셈이다.

비박계인 김성태 대표 권한대행은 의총에서 "어떠한 계파 갈등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친박계의 반발 속에 중앙당 해체 등 자신이 내놓은 혁신안조차 추인 받지 못하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역설적으로 이는 한국당에 인적으로, 정신적으로 뿌리박힌 '박근혜 대못'이 중앙당 해체 같은 조직 구조조정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지난 2016년 20대 총선 당시 '진박 감별사'들의 '매의 눈'을 거쳐 배지를 단 친박계 의원 수는 80여 명에 달한다. 당시 새누리당 소속 의원 122명 가운데 3분의 2가 친박계였으며, 112명으로 쪼그라든 현재 상황에선 점유율이 더 커진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를 거치며 계파색이 옅어지고 핵심들이 사라졌다고 해도, 2020년 총선까지 남은 2년 간 자유한국당의 기본은 친박 다수 구조다. 이들에게 박근혜 부정은 곧 자기부정이다.

사정이 이러니 선거를 통한 물갈이 기회가 없었던 홍준표 전 대표의 '친박 청산'은 불가능한 도전이었으며, 이들을 향해 그는 '바퀴벌레', '연탄가스', '암덩어리' 같은 막말만 퍼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당화'를 통해 장기적 친박 청산을 도모했던 홍 전 대표처럼, 김성태 권한대행과 비박계도 당을 깨지 않는 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박근혜의 덫'에 물린 도돌이표 계파갈등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당권 장악에만 몰두하는 수순이다.

이는 "병든 보수를 고치겠다"며 자신들이 만든 바른정당을 채 1년도 지키지 못하고 탈당해 개혁 보수의 깃발을 스스로 꺾었던 비박계의 자업자득이다.

한국당으로 돌아온 비박계의 좌장 김무성 의원은 지난 2월 "천안함 폭침 주범 김영철이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과 악수한다면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극우 본색'을 뽐내더니, 홍준표 체제에서 북핵폐기추진위원장을 맡아 청와대를 향한 '주사파' 공세를 주도했다.

김성태 권한대행 역시 원내대표에 선출된 뒤부터 문재인 정부를 겨냥해 "사회주의식 국가운영과 정치 보복에 혈안이 되어 있다"며 대여 공세에 앞장서왔다.

김 권한대행은 의총에서 당 쇄신을 자신에게 맡겨달라며 "냉전과 반공주의를 떠나 평화와 함께 가는 안보정당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역설했고, 비박계는 김성태 체제에 힘을 싣고자 애를 썼으나, 자신들 역시 '반공보수'라는 박근혜 유산을 나눠가진 탓에 메아리가 크지 않다.

이승만-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진 '법통'을 깨지 않는 한, 한국당은 미우나 고우나 '박근혜'와 '태극기'를 부여잡고 몰락의 길을 걸을 판이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조차 최근 칼럼에서 "박근혜는 이제 한국 정치에서 과거"라며 "한국의 보수가 살아나려면 '박근혜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 첫걸음"이라고 했음에도, '박근혜 대못'이 박힌 한국당의 좌표는 꿈쩍도 하지 않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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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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