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가운데 땅'이자 '아시아의 등뼈'

[최재천의 책갈피] <실크로드 세계사>

"우리는 세계화를 현대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2000년 전에도 그것은 살아 있는 현실이었다. (실크로드는) 기회를 제공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기술 발전을 촉진한 일이었다."

여러 번의 전투 끝에 기원전 119년, 중국인들이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지배권을 차지하면서 유목민들은 쫓겨났다. 서쪽에는 파미르 고원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중국은 대륙 횡단 네트워크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로마는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을 만났다. 중국산 비단이 지중해를 휩쓸었다. 로마의 세네카는 얇게 늘어뜨린 이 옷감의 인기에 경악했다. 비단옷은 로마 숙녀의 몸매도 품위도 가려주지 않으므로 옷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에게 비단은 그저 이국풍과 색정의 취향일 뿐이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흘러간 것은 비단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오가고, 돈이 오갔다. 사상도 흘렀다. 가장 강력한 사상은 신과 관련되었다. 무엇보다도 파괴적이었던 건 질병이었다. 14세기에 아시아와 유럽을 휩쓴 페스트도 이 대동맥을 따라 흘렀다.

피터 프랭코판(Peter Frankopan)의 <실크로드 세계사>(이재황 옮김, 책과함께 펴냄, 2017)는 지중해 동안에서 히말라야 산맥에 이르는,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가운데 땅(Mediterranean)'이라 부른다. 저자는 이 땅을 '세계의 중심' 또는 '아시아의 등뼈'로 표현한다. 책은 이 땅을 오간 역사의 길을 얘기한다. 비단길에서 시작해 신앙의 길, 노예의 길, 황금의 길, 석유의 길, 냉전의 길, 비극으로 가는 길까지.

"(지금은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이 지역 전체를 번영하게 만들) 새로운 실크로드에 우리의 눈길을 고정"할 때다. 2011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부 장관의 말이다.

2013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현대판 실크로드,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중국의 비전으로 선포했다. 세계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동방에서 서방까지 실크로드들이 다시 한 번 일어서고 있다. 명백한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가운데 땅'은 세계사에서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며 사상과 풍습과 언어들이 서로 경쟁하는 도가니였다. 아시아의 등뼈 곳곳에서 네트워크와 연결망들이 새로 짜이고 있다. 아니, 복구되고 있다. 실크로드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실크로드는 더 이상 특정 교통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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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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