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한반도 해방과 분단에 이어 1950년 6월 전면전으로 확대된 한국전쟁은 남한에 극심한 친미반공 체제가 구축되도록 이끌었다. 1945년 9월 미 군정이 시작되면서부터 '미국의 사람'으로 선택된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 민중의 지지보다는 미국의 지지와 막대한 원조를 기반으로 정권을 유지하면서 철저한 반공정책을 무기삼아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전횡은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에 이르렀다.
1958년 폭력적인 총선 실시와 국가보안법 파동 그리고 1959년 <경향신문> 폐간 및 조봉암 진보당 당수 처형 등을 꼽을 수 있다.
첫째, 자유당은 1958년 5월 2일 총선거를 유례없이 부정과 폭력으로 이끌었다. 그 무렵 <동아일보>에 따르면, "백주 장안에 집단 테로"와 "언론인 피습 등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투표를 진행하는 등 "폭력이 난무한 피의 투표일"을 만들었다.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선거 부정을 밝히라고 "수만 명의 군중(이) 철야 농성"을 하거나 시위를 벌였다.
장면 부통령은 5.2 총선거가 그때까지 한국 역사상 최악의 선거였다며 자유당의 부정을 지적했다. 그러나 자유당의 이재학 국회부의장은 "이 정도면 참 잘되고 있다. 외국서는 살인도 있는데"라는 망언을 남겼다. 국무위원들은 5.2 총선거가 한국 역사상 "가장 명랑한 선거"였다고 억지를 부렸다.
둘째, 자유당은 민심의 이반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야당과 언론을 강력하게 규제하기 위해 1958년 8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948년 제정된 국가보안법에 비해 이적행위 개념과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처벌 규정을 몇 가지 추가한 것이었다. 야당은 이 법안이 "공산분자를 더 잡을 수 있는 이점(利點)보다는 언론 자유를 말살하고 야당을 질식시키며 일반의 공사 생활을 위협할 해점(害點)이 심대하다"며 법조계 및 언론계와 함께 문제점을 지적했다.
자유당은 "반공 투쟁의 태세를 가일층 강화하여 일체의 용공.회색적 정치 세력을 타도한다"며 야당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반대에 반공이란 이름으로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1958년 12월 국회 법사위에서 야당의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본회의에서는 무장경찰관들이 국회의사당을 에워싼 가운데 경위권을 행사해 농성 중인 80여 명의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 개정안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법 개정안과 예산안까지 무더기로 통과시켰다.
셋째, 1959년 4월 그 무렵 일간지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발행 부수를 기록하며 자유당 정권에 비판적인 <경향신문>을 1959년 2월 4일자 '여적(餘滴)' 기사를 구실로 폐간시켰다. 이른바 "여적 필화사건"으로 "제1공화국 최대의 언론탄압"이었다. 문제 삼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현실을 논하자면, 선거가 올바로 되느냐 못 되느냐의 원시적 조건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 물론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 다수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결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된 다수라는 것은 조만간 진정한 다수로 전환되는 것이 역사적 원칙일 것이니 오늘날 한국의 위기의 본질을 대국적으로 파악하는 출발점이 여기 있지 않을까."
이승만 정부는 이 구절을 "혁명에 의해서라도 진정한 다수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폭력을 선동했다"며 헌법에 규정한 선거제도를 부정하고 폭력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글쓴이를 포함한 관련자들을 구속하고 경향신문사 문을 닫게 했다.
넷째, 1958년 1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국시 위반이라 하여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 당수를 비롯한 당 간부들을 검거했다. 1958년 6월엔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미국 국무부는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조봉암을 구명하기 위해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했다. 다울링 (Dowling) 대사가 두 차례 이기붕 국회의장에게 미국의 뜻을 전달해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를 막아보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조봉암은 1959년 2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을 받고 그해 7월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자유당 정권의 전횡이 지속되는 가운데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는 최소한 한 달 전부터 파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1월 29일 신병 치료차 도미하여 2월 15일 워싱턴에서 위암 수술을 받은 직후 갑자기 사망해 버린 것이다.
장면 부통령은 이틀 후 조문차 방문한 매카노기 주한미국대사에게 자유당의 선거 부정행위가 점증하고 있으며 자신에 대한 암살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부통령 후보를 사퇴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선거를 둘러싼 "공포 분위기"에 대한 두려움을 미국대사관 인사들에게 전달하며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실제로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저격 사건을 당한 적이 있는 장면은 1958년 6월에도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에 대하여 다울링 당시 주한미국대사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문을 구했었다.
매카노기는 전임자인 다울링이 1958년 5.2 총선거 후 장면에게 주문했듯이, "양당제도의 민주적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은 민주당을 "충성스러운 야당"으로 간주하고 있다며 야당이 반드시 선거에 임하도록 촉구했다. 양당제와 선거, 즉 야당의 존재와 여야 후보 간의 경선은 미국이 한국을 "민주주의의 진열장"으로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것이다.
조병옥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워싱턴 정가 일각에서 민주당이 대통령 후보를 다시 내세울 수 있도록 선거를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자, 양유찬 주미한국대사는 2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비밀 서한을 보내 선거 연기를 건의했다.
선거를 연기하면 자유당과 이승만이 매우 공정하다는 인상을 대외에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후보의 사망이 장면의 부통령 당선에 영향을 미쳤듯, 조병옥의 죽음이 장면에게 또 다시 동정표를 안겨주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취지에서였다. 양유찬은 그 때 이미 서울과 그 주변 지역에서는 80%의 유권자가 자유당의 이기붕 부통령 후보를 반대한다는 비밀 정보를 입수했다며 이기붕은 농민들의 표에 의존해야만 할 것이라는 건의를 덧붙였다.
이승만은 3월 10일 양유찬에게 보낸 회신에서 민주당이 다른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는 것은 선거법에 따라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민주당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고 알렸다. 이승만은 민주당에서 누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든 자신을 누르고 당선될 가능성이 없으며, 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민주당의 "유일한 사람"은 장면이라고 믿었다. 장면을 제외한 민주당의 어느 누구도 대통령으로든 부통령으로든 당선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이승만과 자유당은 애초에 민주당이 장면을 대통령후보로 그리고 조병옥을 부통령후보로 내세우길 원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면 법에 따라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연로한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임기는 채우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민주당에서는 현 체제의 변경을 원하지 않는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동양의 관습에 따라 조병옥의 사망에 따른 동정표는 막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이승만과 자유당이 3월 15일 선거에서 유례없는 부정을 저질렀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때는 미국처럼 대통령과 부통령이 한 조를 이루어 출마하는 게 아니라 따로따로 선출했다. 대통령으로는 자유당 이승만이, 부통령으로는 민주당 장면이 당선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이승만이 1875년으로 만 85세여서 당선되더라도 4년 임기를 다 채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가 임기 중에 사망하면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아야 하기 때문에 장면이 아니라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했다. 3.15 부정선거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부정선거는 결과적으로 부통령 당선자가 자살하고 대통령이 쫓겨나는 4월 혁명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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