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중에 총 맞아 비틀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나크바 70주년 맞아 이-팔 분쟁 커지나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은 팔레스타인에 딱 들어맞는다. 해마다 봄이 오면 팔레스타인 땅에선 붉은 피가 어김없이 흐른다. 3월 중순에서 5월 중순에 이르는 2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린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과 크든 작든 충돌이 일어나 사상자가 생겨난다. 거의 예외 없이 해마다 봄이면 되풀이된 일이다.

올해 5월에 이스라엘 건국 70주년을 맞기 때문일까, 벌써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지난 3월 30일(현지 시각) 지중해변에 맞닿아 있는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에선 대규모 시위 끝에 17명이 죽고 약 140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에 따른 후폭풍으로 4월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관계는 유혈 갈등의 피로 얼룩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땅의 날'부터 '나크바의 날'까지

팔레스타인인들이 '위대한 귀환 행진'이라는 이름 아래 3월 30일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은 '땅의 날'을 맞아서였다. '땅의 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어온 고난의 역사를 기리는 여러 기념일 가운데 하나다.

1976년 3월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 지역의 팔레스타인 원주민 땅 2천 헥타르를 이스라엘 정부가 강제 수용하려 하자 그에 항의하던 팔레스타인 사람 6명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죽고 100여 명이 총상을 입은 참극을 기리는 날이다.

그 뒤 40년이 넘는 동안 해마다 봄이면 판박이처럼 비슷한 상황이 벌어져왔다. 그 패턴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3월 30일 '땅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회가 곳곳에서 벌어진다. 당일인 3월 30일엔 특히 대규모 집회가 열리고, 참가자들은 집회가 끝나고 시위행렬을 이뤄 이스라엘 경계선 쪽으로 행진한다. (2017년 광화문광장 촛불집회 뒤 청와대나 삼청동 총리공관 쪽으로 행진해가던 수순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바로 그 단계에서 이스라엘 군의 총격으로 많든 적든 희생자가 생겨난다.

그로 말미암아 긴장된 분위기는 4월 내내 이어지고,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기념일에 절정을 이룬다. 1948년 5월 그때껏 지도상에 없던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출현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나크바'(우리말로 대재앙)로 여겨진다. 자료에 따르면, 1948년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는 13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76만 명이 살던 집과 땅을 잃고 쫓겨났다(팔레스타인 쪽이 추정하는 난민 규모는 90만 명, 이스라엘의 추정치는 52만 명, 유엔 추정치는 76만 명).

1948년의 '나크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뼈아픈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지울 수만 있으면 지우고 싶은 우울한 기억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잊지 않으려 한다. 3월 30일 '땅의 날'에 벌이는 대규모 시위도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땅을 잊지 말고, 유대인들로부터 겪은 수모와 지나온 고통을 잊지 말자는 뜻을 담고 있다. 노인들은 수십 년 동안 간직해온 집 대문 열쇠를 들고 집회장으로 온다. 1948년 피란을 떠날 때 들고 나왔던 열쇠는 가물거리는 고향 땅과 집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소중한 유품이다.

▲ 지난 3월 31일(현지 시각)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 경계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이스라엘 군인들이 충돌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인이 쏜 최루가스를 바라보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망치는 청년의 등에 총격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건국 바로 다음 날부터 난민으로서의 고난이 시작됐다고 해서 5월 15일을 '나크바의 날'로 잡는다. 올해 봄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특히 민감하게 다가온다. 1948년 '나크바'가 일어난 지 꼭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3월 30일 '땅의 날' 집회 뒤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 반 동안 대규모 집회를 열고 올리브나무 심기를 비롯한 여러 행사를 열 참이다.

이스라엘 군에서 설정해놓은 이른바 '접근 금지 지대'(No-go Zone) 가까이에 대규모 텐트촌을 세워 평화적 항의 시위를 이어간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대응 방식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면, 늘 그렇듯이 '접근 금지 지대' 가까이까지 행진을 한다. 물론 손에 총을 들지 않은 비무장 상태로다. 그 비폭력 데모 행렬에다 총을 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오로지 이스라엘 지도부의 결정에 달렸다.

올해 3월 30일 '땅의 날'에는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예년보다는 희생자가 훨씬 많다. 2016년엔 6명, 2017년엔 4명으로 올해보다는 사망자 숫자가 적었고, 부상자 숫자는 훨씬 더 적었다. 그렇다면 올해엔 왜 이렇게 하루 동안에 많은 사상자가 생겨났을까.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5곳에서 1만 7000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군 보안구역 가까이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자동차 타이어를 태우고 돌을 우리 쪽으로 던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집회 진행자들의 얘기는 다르다. "어디까지나 비폭력 평화시위였는데도 마구잡이로 총을 쏴댔다"고 비난한다.

실제로 아랍권 방송 알자지라에 담긴 화면에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스라엘 저격수들이 총격을 피해 도망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아대고, 등에 총을 맞아 쓰러지는 청년의 모습이 보인다. 기도를 드리는 중에 총에 맞아 비틀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위기 벗어나려는 네타냐후의 꼼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올해 '땅의 날'에 사상자가 유달리 많이 생겨난 데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69)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고 여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긴장도를 높이는 것이 이스라엘 강경파를 대변하는 자신에게 이롭다는 판단 아래, 그런 불상사를 일으킨 게 아니냐는 의심을 품는다.

실제 12년 동안 총리(1996~1999년, 2009년~현재)를 지내며 이스라엘 강경 연립내각을 이끌어온 네타냐후가 기업인들과의 스캔들로 큰 위기를 맞이한 지금 상황으로 미뤄보면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다.

네타냐후는 몇몇 기업인들과의 뒷거래 혐의로 지난 1년 넘게 이스라엘 경찰의 수사를 받아 왔다. 지난 2월 경찰은 뇌물수수와 사기, 배임 혐의를 걸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경찰은 네타냐후의 최측근이었던 전 총리 비서실장과의 플리바게닝(수사에 협조 하면 형량을 낮춰주는 협상)을 통해 네타냐후를 꼼짝 못하게 할 결정적 증언을 얻어낸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이스라엘 검찰은 총리를 기소하느냐 마느냐로 고심 중이다. 이스라엘 법에 따르면, 총리가 기소가 된다 해도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네타냐후 총리를 가까운 친구로 여기기에 그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다수 여론은 "기소된 총리는 당연히 퇴진해야 한다"는 쪽이다. 여론이 좋지 못한 상태로 총리직에서 버티긴 어려운 노릇이다.

네타냐후가 개인적인 위기를 돌파하려는 꼼수로 팔레스타인과의 긴장 극대화를 택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합리적 의심일 뿐이다. 하지만 네타냐후(그리고 여러 일화를 남겨온 그의 개성 넘치는 부인)의 악착같은 권력 집착과 품성을 떠올려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집권자가 전쟁을 정치에 이용하려 했던 사례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찾아진다. 문제는 그런 정치적 꼼수로 생겨나는 희생과 고통은 민초들의 몫이라는 점이다.

2009년, 2014년 상황 되풀이되나

팔레스타인 주요 정파인 하마스(Hamas) 내부의 일부 강경파들은 나크바 70주년을 맞이한 2018년에 제3차 인티파다(아랍어, 우리말로는 '봉기'. 1차는 1989~1993년, 2차는 2000~2007년)를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자치정부에 머물고 있는 지금의 굴욕적인 상태를 벗어나 독립국가를 이루려면 피 흘리는 투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쪽의 그런 강경투쟁론이 결과적으로 네타냐후를 비롯한 이스라엘 강경파에게 장기집권의 길을 터준다는 점이다. 위기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대화-협상-양보를 내건 온건파 후보, 강경 대응으로 상황을 안정시키겠다는 강경파 후보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경우 지난 20년 동안 유권자들은 후자에게 표를 던져왔다.

네타냐후가 개인의 비리를 덮기 위한 막장극처럼 유혈 분쟁을 일으킨다면, 중동 평화를 바라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이스라엘 군의 가자 지구를 침공으로 큰 희생을 치렀던 2009년(사망자 1380명)과 2014년(사망자 2104명)의 비극적 상황이 2018년에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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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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