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멕시코 출신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이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음악상을 받았다. 영화는 주인공 엘라이자(샐리 호킨스)가 꿈꾸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방은 물속에 잠겨있고, 남성 목소리의 내레이션은 동화의 도입부 같다.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데... 해안 근처의 작은 도시에 말을 못 하는 공주가 살았다. 그리고 모든 걸 파괴하려고 했던 괴물...."
그러나 그녀가 잠에서 깨어난 현실은 이 영화의 주요 색채인 어두운 녹색처럼 우울하다.
녹색은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은 색채이다. 곧 우리 눈 앞에 펼쳐질, 봄을 알리는 새싹의 녹색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느낌을 준다. 반면 가을로 접어들 때의 녹색은 퇴색하고 소멸해 가는 죽음의 느낌을 담고 있다. 영화에 컬라가 도입된 이후, 색채는 매우 중요한 표현 수단이 되었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갖고 있는 색채의 느낌을 적절하게 활용해 인물의 감정과 무언의 메시지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거꾸로 사용해 더욱 강렬한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칙칙한 녹색은 고아원에서 자라나 말을 못 하는 장애인(듣기는 가능하다)으로 혼자 살아가는 엘라이자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 녹색은 그녀가 한눈에 매혹된, 파충류를 닮은 괴생명체의 색깔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괴물, 악마, 공포의 대상 등은 흔히 녹색을 띠고 있는데, 이는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킨 뱀의 색깔과 연관이 있다.
엘라이자는 항공우주연구센터에서 청소부로 일한다. 그곳의 보안책임자인 스트릭랜드는 이 영화의 안타고니스트이다. 이 영화를 해석하는 관점은 다양할 수 있는데, 엘라이자와 주변 인물들 그리고 스트릭랜드를 통해 '안티 트럼프 시대의 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뮤지컬의 걸작 <오즈의 마법사>(1939)의 원작자인 L. 프랭크 바움은 미국의 화폐제도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정치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동화 <오즈의 마법사>(1900)를 썼다고 한다). 엘라이자와 가장 가까운 두 인물인 젤다는 흑인이고, 자일스는 동성애자이다.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은 괴생명체이다. 그녀가 연구센터에 갇힌 괴생명체를 탈출시키려고 할 때 도와주는 박사는 러시아의 스파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뿐만 아니라 주변인들 모두 사회의 소수자 또는 외부자들이다. 백인 남성 스트릭랜드는 이들을 억압하고 끝까지 괴롭힌다.
스트릭랜드의 설정과 그가 등장하는 장면은 더욱 이 영화를 트럼프 시대를 비판하는 영화로 보게 만든다. 스트릭랜드는 괴생명체에 대해 '남아메리카의 지저분한 강에서 잡아 온 불쾌하고 더러운 것, 추악하게 생긴 원시인이거나 동물'이라면서, 내키는 대로 고문하고 학대한다. 대화에서 구약 성경의 일화를 자주 거론하는 그는 "그것이 인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으니 하나님이 저렇게 생겼다고는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흑인인 젤다에게 "하나님은 당신보다는 나를 더 닮았다"고 덧붙인다. 그의 주장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맞닿아 있다. 또한 ‘지저분하고 더럽다’는 표현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인을 폄하할 때, 가장 많이 사용했던 말들이다.
스트릭랜드와 닮은 또 다른 인물은 파이가게 주인이다. 백인인 그는 가게에 손님으로 온 흑인들을 쫓아내고, 동성애자를 혐오한다. 이러한 각종 편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설정을 위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현재가 아니라 1962년이다(이 해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충돌이 폭발한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었는데, 생체실험용 괴생명체와 소련 스파이 등의 설정을 위해서 선택한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스트릭랜드의 집과 가족이 나오는 장면을 보자. 그의 집안의 색채는 녹색보다 갈색이 우세하다. 금발에 예쁘게 차려입은 아내와 등교를 준비하는 아들과 딸의 모습은 1950~1960년대의 이상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을 재현한 것 같다. "여기는 미국이다"고 중얼거리는 스트릭랜드는 최신형 푸른색 캐딜락을 구매하면서(차를 고를 때 녹색이 싫다고 말한다)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된 듯 행복해한다. 그가 이 모든 것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사악하고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의 실패는 영화 초반 괴생명체에게 물린 다음 끝내 낫지 않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손의 상태로 암시된다.
백인 중산층 가정과 아메리칸 드림 그리고 이를 통한 트럼프 시대에 대한 풍자와 조롱은 스트릭랜드가 아내와 섹스하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다. 정서적 교감은 전혀 없이 욕망만을 만족시키려는 그 장면은 엘라이자와 괴생명체 사이의, 사랑의 감정이 충만한 섹스 장면과 대비된다. 이렇게 괴생명체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든 감독의 연출력도 훌륭하지만, 이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해 주는 장면은 뮤지컬의 활용에 있다. 엘라이자가 텔레비전의 뮤지컬 영화를 보며 따라 하는 장면, 수족관에 갇혀 있는 괴생명체 앞에서 그녀가 춤추는 장면 그리고 특히 그녀가 노래를 하면서 괴생명체와 함께 춤추는 장면(이 대목은 <함대를 따르라>(1936)에서, 전설적인 뮤지컬 배우 진저 로저스와 프레드 아스테어가 춤추는 장면에 대한 오마주이다)은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뮤지컬에서 춤과 노래가 시작되면 주인공이 처한 현실의 고통이 사라지고 판타지가 펼쳐지듯이, 엘라이자는 괴생명체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행복을 만끽한다.
그러나 이 장면은 흑백이다.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판타지이기에 흑백으로 연출했다면,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색채의 사용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녹색의 괴생명체가 스트릭랜드 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것처럼. 엘라이자는 괴생명체와 사랑을 나누면서, 붉은색 머리띠로 시작해서 붉은색 구두 그리고 붉은색 옷을 입게 된다. 칙칙한 녹색의 화면에서 두드러지는 붉은색은 사랑에 빠진 그녀가 맛보는 생생한 삶의 느낌을 나타낸다. 그러나 붉은색은 동시에 죽음의 색깔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붉은색이 많아질수록, 그녀는 죽음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하지만 괴생명체와 함께 죽은 상태로 물에 들어간, 붉은색 코트를 걸친 그녀는 다시 살아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 장벽을 쌓겠다고 공언했지만, 엘라이자와 괴생명체는 모든 장벽을 초월한 물속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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