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군 모두 민간인 학살 관여... 광주 폭격까지 계획했나

5.18특조위, 조사보고서 발표..."여전히 특별법 통과해 추가 조사 해야

광주5.18민주화운동 당시 육군 헬기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직적으로 광주 시민을 사격한 사실이 확인됐다. 공군은 전투기와 공격기에 폭탄을 장착한 채 대기 중이었다는 사실도 재확인됐다.

군의 민간인 학살은 육해공 3군 합동으로 진행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다만 공군이 광주 폭격을 계획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공군관계자 일부가 조사에 불응하는 등의 이유로 인해, 사실 관계 확인에 추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 정권 당시 정부가 직접 광주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많은 자료를 왜곡한 사실도 확인됐다.

7일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이건리 변호사, 이하 5.18특조위)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로써 국방부는 민간인 학살 38년 만에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헬기 사격 사실을 인정했다.

5.18특조위는 지난해 9월 발족해, 그간 시민 사회에서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민간인 학살 관계자들은 부인한 문제 등을 중심으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조사를 진행해 왔다.

육군, 광주 시민 상대 헬기사격 실시

5.18특조위에 따르면, 공수부대가 비무장 시민을 조준 사격해 사살하는 등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는 동안 육군은 헬기를 이용해 민간인을 사격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21일부터 계엄사령부는 문서 또는 구두로 수차례에 걸쳐 현장 부대에 헬기사격을 지시했다. 그간 계엄군은 5월 21일 19시 30분 자위권 발동이 이뤄지기 전에는 광주에 무장헬기가 투입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거짓으로 확인됐다.

5.18특조위는 "실제로는 5월 19일부터 31사단에 무장헬기 3대가 대기하고 있었던 사실이 기록을 통해 밝혀졌다"고 전했다.

5.18특조위가 재구성한 당시 상황을 정리하면, 계엄사령부는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로 시민을 학살한 후 더 강경한 진압작전을 계획했다. 이때 헬기사격을 적극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5월 22일 08시 30분경 계엄사령부는 전투병과교육사령부(이하 전교사)에 헬기사격이 포함된 구체적인 '헬기작전계획 실시지침'을 하달했다.

당시 지침은 △무장폭도들에 대하여는 핵심점을 사격 소탕하라 △위력시위사격을 하천과 임야, 산 등을 선정 실시하라 △광주시내 하천이 적합 시 실시하라 △상공을 비행 정찰하여 버스나 차량 등으로 이동하면서 습격, 방화, 사격하는 집단은 지상부대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사격 제압하라 △지상부대 진입 시는 보병을 엄호하기 위해 전차와 헬기의 공중 엄호 등을 계획 실시하라 △시위 사격은 20미리 발칸, 실 사격은 7.62미리가 적합하다는 등의 내용이다.

계엄군은 현장 진압부대에 ‘발칸 위협사격 실시로 양민 경고 분리 및 위압감과 공포감 효과를 달성’하라는 구체적 지침을 제시하면서 '무장을 한 자나 사격을 하는 자는 사살하고 계속 저항하는 자는 집중사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같은 지시를 종합하면, 당시 육군 헬기는 민간인을 조준 사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18당시 병원사진 ⓒ 전 나경택본부장 제공

계엄사령부 수뇌부가 헬기사격 명령

5.18특조위에 따르면, 이 같은 지시를 주도한 이는 당시 계엄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황영시 등의 인물이다.

황영시는 5월 23일경,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에게 '미온적인 충정작전으로 광주사태를 수습하려 하지 마라' '전차와 무장헬기를 동원해 강경하게 충정작전을 실시하라' '기갑학교에 있는 전차를 투입하고, 무장헬기는 UH-1H 10대, 500MD 5대, AH-1J 2대 등을 투입해 신속히 진압작전을 수행하라'는 취지의 명령을 내렸다.

이어 황영시는 5월 20일부터 5월 26일까지 4회에 걸쳐 김기석에게 같은 내용의 구두 명령을 내렸다. 특히 '코브라로 APC를, 500MD로 차량을 공격하라'는 구체적 명령도 내렸다.

황영시 등은 5월 22일경 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순현에게 '무장헬기 코브라 2대를 광주에 내려 보내니, 광주 시내에 있는 조선대학교 뒤쪽의 절개지에 위협사격을 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인적이 드물었던 조선대학교 뒤편 절개지에 AH-1J 코브라 헬기가 발칸포로 위협사격을 했다는 증언도 나온 바 있다.

이 같은 지시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기간 육군은 광주에 출동한 40여 대의 헬기 중 일부 공격헬기 500MD와 기동헬기 UH-1H를 이용해 광주 시민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사격을 가했다. 확실히 밝혀진 사격 일자는 5월 21일과 27일이며, 기타 다른 날에도 복수의 헬기가 운용된 것으로 보인다.

김순현은 이 지시를 따라, 5월 22일경 103항공대장 이○부에게 '코브라로 광주천을 따라 위협사격을 하라'고 명령했고, 506항공대장 김○근에게는 '광주천에 무력시위(헬기사격)를 하라'고 명령했다.

11공수여단장 최○은은 5월 24일 13시 55분경 주답지역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철수하던 11공수 63대대 병력이 보병학교 교도대로부터 공격을 받자, 이를 폭도의 공격으로 오인해 103항공대장 이○부에게 '코브라로 무차별 사격을 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헬기 민간인 학살은 당시 헬기를 조종한 조종사들의 진술로도 확인된다.

광주에 출동했던 당시 헬기조종사 대부분은 과거 광주 출동 사실을 부인했으나, 5.18특조위의 조사에서는 이들 중 5명이 "헬기에 무장을 한 상태로 광주 상공에서 비행했다"고 진술했다.

다만, 이들은 헬기사격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재명도 민간인 학살 명령을 내렸다. 그는 5월 23일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 김기석 부사령관 등에게 ‘왜 전차와 무장 헬리콥터를 동원해 빨리 광주사태를 진압하지 않고 미온적으로 대처하느냐’고 질책했다.

그간 5.18민주화운동 당시 헬기의 기관총 사격이 실제했다는 주장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 제기됐다. 결국 지난해 5월 15일, 광주시와 광주시 산하 5.18 진실규명지원단은 당시 61항공대 202, 203대대 소속 헬기가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부터 5시 30분 사이 전일빌딩을 대상으로 헬기 사격을 실시했음을 처음 확인했다. (☞관련기사 : 신군부, 5.18 당시 무차별 헬기사격 사실로 드러나)

5.18특조위는 "헬기사격 목격자는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가 이뤄진 5월 21일과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재진입한 5월 27일에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다만 정확한 운용 정황을 확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5.18특조위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재구성하기 위해 헬기운행일지 등을 찾고자 노력했으나, 해당 부대들이 이를 보관하고 있지 않거나, 보존기간 경과로 파기했다고 주장해 확인에 실패했다"고 밝혔다.

▲ 지난해 9월 13일,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가 광주 동구 전일빌딩에서 국과수 감식결과 1980년 5·18 당시 헬기사격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 탄흔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헬기사격은 양민 학살...비인도적 살상 행위"

이와 관련해, 5.18특조위는 "5월 21일 헬기사격과 27일 헬기사격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고 밝혔다.

5.18특조위에 따르면, 5월 21일 헬기사격은 전남도청 인근과 광주천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계엄군은 시위 군중을 강제 해산하고, 전남도청 앞에 있던 공수부대와 새로 광주에 투입된 20사단 병력을 교체하려는 과정에서 비무장상태 시민을 향해 헬기사격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은 비무장 시민에게도 헬기로 직접 사격을 가했다.

5.18특조위는 5월 21일 사격을 두고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것으로, 계엄군 진압작전의 야만성과 잔학성, 범죄성을 드러내는 증거"라며 "특히 시민과 물리적 충돌 과정에서 실시된 지상군의 사격과 달리, 헬기사격은 계획적·공세적"이라고 지적했다.

5.18특조위는 이어 "5월 21일 비무장 시민에게 계엄군이 가한 헬기사격은 지금껏 5월 21일 집단발포를 두고 '무장시위대에 대한 자위권적 조치'였다는 계엄군의 주장을 뒤집는 증거"라며 "민주화를 요구한 광주 시민을 상대로 한 비인도적이고 적극적인 살상행위로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5월 27일의 헬기사격은 계엄군 특공대의 전남도청 진입을 위해 주변에서 가장 높은 전일빌딩에 설치되어 있을지 모를 LMG와 시민군을 제압하기 위해 실시됐다. 해당 사격은 이미 1997년 4월, 대법원 판결을 통해 내란목적살인죄로 결론 지어졌다.

5.18특조위는 "칼빈 소총 등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약 300명의 광주시민을 상대로 치밀한 군사작전에 따라 공수부대 3개 여단과 2개 정규사단 약 7300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대량살상 능력을 갖춘 무장헬기까지 동원해 헬기사격을 가하고 시민을 살상한 집단살해 내지 양민학살"이라고 강조했다.

5.18, 육해공 3군 합동작전으로 민간인 학살

해군과 공군도 민간인 학살을 준비했던 사실도 확인됐다. 전두환 군부가 광주 시민 학살을 위해 3군 전체를 총동원했다는 뜻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해군은 해병대 1사단 3연대 33대대 병력을 마산에 대기시켜 광주 출동을 준비했다. 하지만, 계엄군의 진압작전 변경으로 해병대 추가 투입 실효성이 떨어져 대기 나흘 후 출동 해제했다.

공군은 폭탄까지 준비했다.

공군은 수원 제10전투비행단 F-5 전투기들과 사천 제3훈련비행단 A-37 공격기들에 각각 MK-82 폭탄을 이례적으로 장착한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MK-82는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범용폭탄으로, 1991년 걸프전에서도 미국이 사용한 대인 살상용 폭탄이다. 최대파편 도달거리는 1.2㎞며 지면 착탄시 형성되는 폭파구는 깊이 3m, 직경 10m에 달한다.

만일 이 폭탄이 광주에 투하되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으리라 짐작 가능하다.

광주 폭격과 관련한 내용은 5.18기념재단이 지난해 12월 7일 미국 UCLA 동아시아 도서관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언론에 밝히며 처음 논란이 됐다. (☞관련기사 : "미국, 5.18 당시 광주 폭격 계획했다"…美 자료 공개) 다만 당시 발표는 미국이 광주를 폭격하려 했다는 내용을 담은 반면, 이번 자료는 우리 공군이 직접 광주 시민 폭격과 연계된 가능성을 보인 점이 다르다.

다만 5.18특조위는 공군이 전투기와 폭격기에 폭탄을 장착하고 대기시킨 목적이 광주 폭격이었는지, 계엄군의 광주 재진압 작전에 공군 폭격이 검토되었는지 등의 여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5.18과 관련한 당시 공군 자료가 거의 없고 △당시 공군지휘부 관계자들의 기억이 뚜렷하지 않고 △일부 관계자가 조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군도 5.18 민간인 학살에 책임

당시 공군 최고 수뇌인 공군참모총장 윤자중은 5.18에 공군이 관여토록 한 결정적 인물이다.

그는 5월 17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키로 결의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광주 상황을 베트남에 비유해 공군의 개입 명분을 만들었다. 그는 차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모임을 개최하기도 했다.

윤자중은 5월 21일 계엄사령관,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해군참모총장 등과 광주 상황 대책을 논의, 자위권 발동 결정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당일 16시 전국에 진돗개 둘 발령이 떨어지자, 즉시 전투지휘비 제1호를 발령, 16시 35분에 광주 제1전투비행단에 전투기 2대와 수송기 1대를 비상대기시켰다.

윤자중은 이어 25일 12시 15분에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해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27일 광주 재진압작전을 결정하는 데도 참여했다.

윤자중 등의 지휘에 따라 공군은 공수부대와 20사단 병력 일부를 광주로 공수하고, 군수품을 공수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 육군본부 지원 요청에 따라 광주 일원 항공사진을 촬영, 현지 부대에 지원했다.

공군이 광주 폭격 계획 세웠나

5.18 당시에도 공군이 광주에 더 깊숙이 개입하리라는 소문은 돌았다. 5.18 당시부터 '광주 폭격설'이 돈 이유다. 그 진원은 당시 광주에 있었던 공군 제1전투비행단에 주둔한 미 공군 관계자들이었다.

이와 관련, 당시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 충정작전 시 위력 과시를 위한 공군 전투기의 광주상공 비행을 전교사령관이 필요시 제1전투비행단장과 협조 지원 가능토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5.18특조위는 "윤자중이 5월 21일 16시 35분에 광주 제1전투비행단에 전투기 2대와 수송기 1대를 비상대기시킨 지시를 두고 광주를 폭격하려는 목적 하에 이뤄진 것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면서도 "선박으로 해상 도주하는 시위대를 소탕하려는 작전 지시는 내렸거나, 적어도 광주 진압작전과 밀접한 연관 하에 그 같은 지시를 내린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5.18특조위는 이어 "광주진압작전 진행 과정에서 5월 21일 공수부대의 시 외곽 철수 후 최소 3차례 이상 진압작전계획이 작성·검토되었고, 그 중 적어도 한 번은 대규모 인명 살상을 전제로 하는 진압작전계획이 검토되었음이 여러 가지 정황으로 확인됐다"면서도 "공군에 의한 광주폭격을 포함한 진압작전계획이 검토되었는지 여부는 확정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여전히 5.18은 은폐되고 왜곡 중

5.18특조위는 진상 조사 결과, 국정원, 국방부 등이 범 정부 차원에서 5.18 관련 자료의 은폐·왜곡을 조직적으로 시도했다고 강조했다.

5.18특조위에 따르면,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이 끝난 4개월 후인 1985년 6월,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주도한 범정부 차원 기구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에는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 문공부, 육군본부, 보안사, 치안본부, 청와대, 민정당, 안기부 등이 참여했다.

이 조직 실무위원회(위원장 안기부 2국장)는 위장명칭으로 '80위원회'를 사용, 5.18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수집·종합해 소위 '광주사태 백서' 발간을 시도했다. 이 자료는 5.18에 군부의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뒷받침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18특조위는 아직 해당 백서를 확보하지 못했다.

1988년 5월에는 국방부가 국회 청문회에 대비해 '국회대책특별위원회'(위원장 국방부 차관)를 조직했다. 1988년 국회에서 진행한 '제5공화국 청문회'는 전두환 군부의 비리와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마련되어 당시 큰 관심을 모았다.

당시 국회대책특별위원회의 성격과 목적을 짐작 가능한 부분이다. 이 기구는 육군(작전명령, 상황일지 등), 국방부 동원예비군국(국회 답변서 등), 국방부 법무관리관실(군사재판 기록), 보안사(합동수사기록, 유언비어 등), 한국국방연구원(시중 관련 책자, 신문 등) 등에 나누어 그 역할을 맡겼다.

군부는 5.18과 관련, 군에 불리한 자료를 군의 시각에 맞게 은폐·왜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조직도 만들었다. 국방부 산하 각 기관이 참여한 실무위원회인 일명 '511연구위원회(위원장 국방부 동원예비군 국장)'와 511상설대책위원회가 해당 조직이다. 보안사도 별도로 511분석반을 편성했다. 5.18특조위에 따르면, '511'은 5월 11일 업무를 시작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5.18특조위는 511연구위원회 주도 아래에 "계엄군으로 출동했던 특전사의 전투상보, 20사단 전투상보, 31사단 전투상보 등과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장병들의 체험수기 등이 왜곡"되었다며 "5.18특조위가 '가짜와의 전쟁'을 치르는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5.18특조위는 또 "군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 중 5.18과 관련한 중요한 부분들이 제대로 기재되어 있지 않거나, 마이크로필름(MF)으로 전환하면서 보존연한의 경과 등을 이유로 폐기되어 37년 전 당시의 원본문서를 찾기 어려웠다"고 전했다.

아울러 "일부 기관의 비협조가 있었고, 특조위에 강제조사권이 없어 자료 확보와 면담조사에 많은 제한이 있었다"고도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5.18특조위는 "한국 공군의 작전 등 군사 활동과 관련한 미국 공군과 미국 대사관 자료를 포함한 국외 자료 조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해당 조사에 상당한 시일이 예상되므로, 현재로서는 종국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번 자료를 발표하며 5.18특조위는 "현재 국회에 입법 발의된 5.18 관련 특별법에 따른 특별기구의 조사를 통해 수원과 사천의 공대지 폭탄 장착의 목적 등 5.18 당시 계엄군의 광주 재진압 작전에 폭격이 검토되었는지 여부가 명확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또 "독립적인 조사기관의 성역 없는 자료 수집과 관련자에 대한 조사도 보장되어야 한다"고도 제안했다.

5.18특조위는 "(전두환 군부가) 국가와 계엄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법을 저질러, 그 잘못된 행위로 많은 시민이 희생을 겪었고 지금까지도 그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며 "이제 국가와 군이 국민에게 진솔하게 사과하고 과거로부터의 절연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조사활동 전 과정을 담은 특별조사위원회의 백서 및 조사기록, 62만 쪽에 달하는 각종 자료들이 앞으로 역사적 진실규명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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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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