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는 제왕적 대통령이었나?

[이관후 칼럼] 진짜 문제는 국회와 선거제도

벌써 1년

벌써 1년입니다. 제 달력에 따르면 며칠 전인 12월 20일에 제 19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어야 합니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탄핵되었고, 새로운 대통령이 뽑혔습니다.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일단 잘못된 것들이 바로잡혀가는 중입니다. MBC의 사장이 교체되자 금세 정상적인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법원의 부름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 구치소에 갔습니다. 외교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의 잘못을 할머니들께 고했고, 공정위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에 대한 대체가 잘못되었음을 시인했습니다.

세월호에 대해서는 더 제대로 된 조사가 어서 시작되기를 기다립니다. 해외입양 문제, 형제복지원 사건 등에 대해서도 이 정부가 더 많은 것을 밝히고 피해자들에게 응당한 사과와 보상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혁의 종점은 정치의 변화 그 자체에 있을 것입니다. 정치의 변화를 말할 때, 한국에서 가장 흔히 문제시 되는 것은 '제왕적 대통령제'입니다. 특히 박근혜 이후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은 이제 학계의 용어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정치인들과 일부 언론에서 이 말을 맥락없이 편의대로 마구 사용하는 바람에 더 많은 오해가 생기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박근혜는 과연 제왕적 대통령이었을까요?

ⓒ프레시안(최형락)

박근혜는 제왕적 대통령이었나?

우리 대통령이 사법부나 행정부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그것이 법과 정의를 넘어서서 자의적으로 행사될 가능성의 측면에서 보면, 한국의 대통령제는 제왕적인 면이 있습니다. 청와대와 기업의 유착, 사법부와 검찰의 청와대 눈치보기, 국정원, 감사원, 경찰 등 정보나 감시 기능을 가진 기관들의 잘못된 운영을 보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 보입니다.

그런데 민주적으로 뽑힌 대통령이 자본과 사법권력, 정보기관 등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면 그 역시 문제가 아닐까요? 기업에서 사법부와 행정부까지, 위에서 언급한 이 모든 기관들이 불필요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박근혜가 한 것처럼 해경을 해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국정농단과 부패의 원인은 '대통령제' 자체보다는 그것의 잘못된 운영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운영의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법이나 정의를 무시하고 권력에만 충성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원세훈 같은 출세주의자들의 욕망, 다른 하나는 김기춘 같은 사람이 보여준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망상에 사로잡힌 어긋난 충성심입니다.

물론 민주주의는 이러한 문제들을 묵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이 통치할 때조차 그것을 제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정치체제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촛불이 보여준 것이 바로 그러한 장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거대악이 임기를 다해가고 사태의 심각성이 표면화되기 전까지 시민들에게 별다른 수단이 없다는 것 역시 대통령제의 특징입니다. 물론 이것은 대통령제만의 특성은 아니고 그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 다른 권력구조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현대 민주주의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할 것입니다.

제왕을 불가능하게 하는 의회

그래서 우리는 대통령제에서도 다른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의회'입니다. 소위 '3김 정치'가 막을 내린 이후, 우리 대통령들은 늘 애를 먹었습니다. 우선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한 정권은 실제로 정치적 성과를 내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권력 후반기로 갈수록 여당 내에서도 반대파가 힘을 얻게 됩니다.

여전히 저는 박근혜가 무너진 정치적 계기가 유승민 공천파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천파동을 보다 못한 여당 지지자들은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고, 여당은 선거에서 패배했으며, 레임덕이 시작되었고, 그러자 최순실에 대한 제보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다 알 듯이 탄핵이었습니다.

저는 지난해 한국에서 나타난 일련의 사태가 우리나라 정치 체제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들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간이 아주 짧았고, 과정이 드라마틱했을 뿐이지 오히려 전형적이라고 할 만한 일이 벌어진 셈입니다.

우선 대통령은 행정부와 사법부, 심지어 언론에 압도적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입법부를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 입법부 내에서 여당조차 대통령이 마음대로 하기 어렵다는 것, 무리한 시도를 할 경우 선거에서 대통령이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잘 드러났습니다.

사실 우리 입법부는 구조적으로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적이며, 실질적으로도 그렇게 운영되어 온 측면이 있습니다. 심지어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조차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1971년, 3선 개헌을 성사시키고 거칠 것이 없던 박정희의 발목을 잡은 것은 국회였습니다. 김종필 총리와 더불어 6월에 임명된 오치성 내무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여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던 국회에서 통과된 것입니다. 이른바 10·2 항명 파동입니다.

서슬퍼런 박정희 시대였지만, 해임안이 통과되자 오치성 장관은 이틀 만에 사표를 냈습니다. 박정희는 결과에 분노했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주동자를 색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후락은 여당인 공화당 의원들을 23명이나 마구잡이로 끌고 가서 감금, 고문했습니다.

대통령이 입법부를 통제하기가 이렇게 힘듭니다. 오죽하면 이듬해에 만든 유신헌법에서는 대통령이 국회 정수의 1/3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지명하는 '유신정우회'를 만들어 여당인 공화당과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을 했겠습니까. 박근혜는 아버지의 사례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어야 했습니다.

문제는 대통령제가 아니라 선거와 정당

그래서 우리 대통령제는 국정원과 검찰을 주무르고 부패하기 쉬운 쪽으로는 제왕적이지만, 정치적 성과를 내는 측면, 특히 입법부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본다면 제왕적인지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의회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합니다.

사실 제도만 보면, 의회제의 수상이 대통령제의 대통령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집니다. 의회제에서의 수상들은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은 영국의 수상더러 '당신은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빼고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부러워한다는 말이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에서 수상이 독단적인 결정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다당제라는 정당체제입니다. 이들 나라에서는 1개의 거대정당이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연립정부를 수립하게 되고, 바로 그 연립정부 체제가 수상의 독주를 견제하는 '정치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연립정부에서는 수상의 정치적 능력이 의심받거나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정당들과의 조율과 협력에 실패하게 되면, 곧바로 정권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대통령제처럼 임기가 정해진 것이 아니고 지지율이 급락하면 언제든 의회해산과 조기총선의 압박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임기초반이든 후반이든 상관없이 수상은 정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독주를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의회제는 '제도'와 '기구'에 의존하기 보다는 '정치' 그 자체에 더 많은 기대를 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정치인들과 정당들의 정치적 행위에 의해 견제와 균형이 발생하고, 그것이 정당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에 의해 뒷받침되는 형태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정부형태를 어떤 식으로든 바꾸게 된다면, 그에 걸 맞는 선거제도의 변경, 정당체제의 변경을 고려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어떠한 원리에 의해 정부의 민주적 운영을 담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필요합니다.

가령 의회제이지만 소선거구제를 유지하고 단독정당의 정부구성을 정치적 관행으로 하고 있는 영국 같은 곳에서는, 정당들의 높은 정치적 책임성과 상원의 존재가 다당제의 역할을 어느 정도 대신 합니다. 우리가 정부형태를 바꿀 때는 우리에게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지방선거는 제도 변화의 나침반 될 것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냅니다. 내년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당장 선거가 있습니다. 내년의 선거는 여느 때의 보통 지방선거와는 그 의미가 다를 것입니다. 어떤 변화가 어떻게 나타날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됩니다.

개헌 논의는 주춤하지만,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지방선거 이전에 대통령의 개헌발의로 시작될지 아니면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그 이후에 시작될지 모르지만, 그러한 숙제가 우리 앞에 곧 주어질 것은 확실합니다.

제도가 정치적 변화를 선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정치적 변화가 제도의 불가피한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제도적 변화는 정치적 실제를 추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방선거는 우리가 갖고 있는 선거제도나 과거의 정당체제에 대해 국민의 갖고 있는 의견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것이 내년 선거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년 선거에서 화두가 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정치로부터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정치에 관심과 애정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는 필요악이 아니라 그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악으로 만들지 선으로 만들지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공적 결정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되,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것 역시 그 결정에 달렸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컨대, 정치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정치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이야말로 작년과 올해 우리가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년에도 그것이 계속되기를 기대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이관후

16대, 17대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하고, 영국 런던대학교(UCL)에서 '정치적 대표'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와 경남연구원에서 일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정책보좌관, 국무총리 메시지비서관을 지냈다. 정치의 이론과 현실에 모두 관심이 있다.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있으며, <프레시안>을 비롯해 <경향신문>, <한겨레>, <피렌체의 식탁>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