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미문의 살인 사건으로 역사의 벽화를 그리다

[김경욱의 데자뷔] 두 번 이상 봐야 할 영화 <고령기 소년 살인사건>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91년에 발표된 이후 아시아 영화의 걸작으로 평가되어 왔다. 한국에는 2007년 부산영화제를 통해 소개되었고, 지난 11월 23일 디지털 리마스터링 된 상영시간 3시간 57분(1991년 당시에는 3시간 5분)의 감독판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에드워드 양(楊德昌)은 허우샤오시엔과 함께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신랑차오 운동)'를 이끌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타이베이 이야기>(1985), <공포분자>(1986)와 함께, '타이베이 3부작'으로 불린다.

에드워드 양의 부모는 1949년, 공산당에 패배한 국민당을 따라 중국 상하이에서 대만으로 이주했다. 그의 나이 두 살 때였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그의 청소년 시절, 주위에서 벌어진 '14살 소년이 같은 또래의 소녀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을 소재로 했다. 1961년, 타이베이에서 일어난 그 사건은 중화민국이 설립된 후 최초의 미성년자 살인사건이었다. 그는 14살 때 접했던 사건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영화로 만들었다.

거의 삼십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을 통해 에드워드 양은 1960년대 대만의 증후를 드러내려고 했다. ‘패배한 국민당을 따라 수백만의 중국인들이 대만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 험난한 시기에 아이들은 안정된 성장환경을 박탈당했다. 그들에게는 부모세대의 불안이 그대로 투영되었다’고 설명하는 영화 도입부의 자막에서, 그 의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므로 14살 소년 샤오쓰(장첸)와 그의 가족,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 시대 대만의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샤오쓰의 부모는 상하이에서는 엘리트였으나 대만에 이주한 다음에는 안정된 생활기반을 마련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정규직 교사 자리를 얻으려고 애를 쓰지만 잘되지 않는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해 정치적으로 반공을 내세우며 반정부 인사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할 때, 아버지는 지인이 도모한 일에 연루되어 경비총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공직도 박탈당한다. 부모들이 악전고투하면서 섬세하게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는 동안, 아이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학교의 국어 선생이 한자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중국문명의 우월함을 설파할 때, 아이들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필두로 한 미국 팝송에 열광한다(이 영화의 영문명은 프레슬리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A Brighter Summer Days'이다).

다섯 아이들 중의 넷째인 샤오쓰는 국어시험 성적이 나빠 야간중학교에 가게 되면서, 대학 진학 대열에서 낙오한 아이들이 직면하는 열악한 환경에 휩쓸리게 된다. 아이들은 소공원파와 271파의 세력다툼에 휘말리고, 소모품으로 이용된다. 샤오쓰가 처한 세계는 힘의 논리만 있을 뿐, 법에 의한 공정함이나 정의 따위는 없다. 이들 사이에 아버지 없이 병든 어머니와 살아가는 소녀 샤오밍이 있다. 그녀는 오로지 어머니와 함께 기거할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희구하면서, 자신의 미모에 관심을 갖는 모든 남자들에게 접근한다. 그로 인해 샤오쓰를 비롯한 그녀 주변 남자들의 갈등은 더욱 증폭된다. 그 결과는 전대미문의 살인사건이다.

스릴러 같은 제목에 선정적이고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를 다루는 이 영화는 보기가 쉽지는 않다. 영화의 배경인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대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적으로는 거의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대만을 잘 알지 못하는 관객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영화로 보인다. 감독의 말을 인용하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역사를 다루는 커다란 벽화 같은 영화다. 영화는 그 어떤 수사도, 장식도, 과장도 없이 그 자체로 삶이 될 수 있다."(<키노>(2000년 11월)) 그러므로 그 벽화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장면 하나하나가 어떻게 결합되는지, 어떻게 모여서 이야기가 되고 의미를 전달하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고 추론하고 생각해야한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샤오쓰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범죄를 변호하거나 비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모든 장면이 살인의 원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너무나 많은 장면에서 살인의 징후(예를 들면, 샤오밍이 샤오쓰를 향해 장난으로 총을 겨누다 진짜 발사를 했을 때, 샤오쓰가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어둠을 밝히던 손전등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을 때)가 있다. 파국으로 향하는 불안의 느낌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조용히 점점 침잠해 간다. 그러면서 영화는 1960년대 대만사회가 대륙의 이주민들과 독재정권, 경제성장과 근대화의 중첩된 모순 속에서 비극을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더욱 비극적인 건 그 모순의 칼날이 사회의 가장 약한 청소년들에게로 향하면서 폭력으로 분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소공원파의 전설적인 두목 허니처럼 자살에 가까운 타살을 선택하거나(티셔츠에 샤오밍의 피를 잔뜩 묻힌 채 어쩔 줄 모르는 샤오쯔는 자살을 원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샤오쓰의 셋째 누나처럼 종교(기독교)에 매달리면서 분노를 용서와 감사로 치환하려고 한다.

대중영화는 대중의 판타지를 만족시킨다. 삶이 더 나아지기를 열망하는 대중의 판타지를 위해 대중영화는 흔히 주인공들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을 약속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보기 힘든 또 다른 이유는 인물들의 삶이 점점 더 나아지기는커녕 결국 붕괴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영화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인간의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들어있기에 봐야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P.S: 1.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90년에 발표된 <비정성시>(상영시간 158분)와 비교되는 영화이다. <비정성시>를 연출한 허우샤오시엔은 에드워드 양과 동갑으로, 중국 광동성에서 태어나 한 살 때 부모를 따라 대만으로 이주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1947년, 대륙인과 대만인이 충돌한 2·28사건을 다루고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전구에 불이 켜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비정성시>의 첫 장면과 같다. 두 편을 같이 본다면, 대만 현대사의 굴곡을 짐작해 볼 수 있고 한국현대사와의 공통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연기한 장쿠오츄와 장첸은 실재 부자지간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는 두 개의 장면이다. 두 번 모두 나쁜 상황인데, 첫 번째 장면에서는 낮에 아버지가 아들을 격려하고(장면1), 두 번째 장면에서는 밤에 아들이 아버지를 위로한다(장면2).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이다. 이 영화를 찍을 때 장첸은 15살이었는데, 아버지가 에드워드 양 감독의 친구여서 출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이 영화에는 인상 깊은 장면이 아주 많다. 특히 샤오쓰와 샤오밍이 데이트 하는 장면은 정말 아름답다(장면3, 장면4).

▲ 장면 1.

▲ 장면 2.

▲ 장면 3.

▲ 장면 4.

3.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꼭 두 번 이상 보기를 권하고 싶다. 첫 번째 보기에서 인물들의 관계와 구성 그리고 스토리를 파악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 보기에서 주의 깊게 인과의 사슬을 따라가다 보면, 쇼트 하나하나가 벽화를 만들어가는 연출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이 영화에는 롱테이크가 매우 많은데, 대표적인 예로는 샤오쓰가 뜻하지 않게 마주친 샤오밍과 대화를 나누다 칼로 살해하게 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편집 없이 길게 이어지는 장면을 통해 관객은 두 인물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감정선을 쫓아가면서 우발적으로 보이는 살인에 이르게 된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 재미가 들리면, 할리우드 영화를 추종하는 영화들이 시시해 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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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동국대와 중앙대에서 영화이론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YU HYUN-MOK>(2008),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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