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인 뒤 '빨갱이였다' 하면 그만이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북 남원·임실 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다시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호남 지역의 지난 연재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난연재 보기

이데올로기 사슬에 순장이 된 사람들

1951년 초 전선은 38선을 중심으로 교착상태에 놓였다. 남과 북의 일진일퇴의 혼전 끝에 형성된 군사 대치선이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난 국군과 연합군은 전열을 정비한 뒤 9월 서울 수복에 이어 평양까지 진격했다.

그리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또다시 대치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중공군 전술에 밀린 연합군은 곧바로 퇴각, 또 한 번 서울을 내줘야 했다. 태백산맥 너머 소백산맥까지 밀린 전선은 다시 북상하면서 38선에 멈춰 섰다. 남과 북의 허리는 그렇게 고착화됐다.

남진과 북진이 반복되는 사이 주민들은 이리 쓸리고 저리 쓸렸다. 낮에는 우익, 밤에는 좌익이 차례로 마을을 점령했고, 어제의 대한민국이 오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체제로 바뀌었다. 달라진 세상 후에는 어김없이 피의 숙청이 뒤따랐고, 보복은 또 다른 보복으로 이어졌다. 전쟁과 학살의 광기는 우리 깊숙이 들어왔다.

▲ 전북 남원 강석마을 주민들이 학살된 그럭재 아래 저수지(당시 논) 둑에서 바라본 강석마을 전경. ⓒ커버리지(정찬대)

참수, 목이 베이다

1950년 9·28 서울 수복과 함께 전라북도에는 후방 치안 확보를 위한 토벌이 한창이었다. 지리산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데다, 수복 지역 곳곳에서 부역 혐의자 처형까지 더해지면서 학살은 쓰레그물 치듯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기분 나쁘면 '너 빨갱이지' 하고 데려가 족쳤고, 죽인 뒤 문제 돼도 '빨갱이였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들이 겪는 고통이 '진짜 전쟁'이었다.

전북 남원은 임실과 순창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거치는 길목―물론 우회는 가능했다―에 서 있다. 이 때문에 호남지역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창설된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이나 백야전전투사령부(사령관 백선엽)의 사단본부(지휘통제소)는 모두 남원에 설치됐다.

특히, 섬진강을 경계로 전북 순창과 전남 곡성에 맞닿아 있는 남원 대강면에는 인근 빨치산들의 출몰이 수시로 이뤄졌다. 이들은 대강면과 금지면의 경계를 잇는 고리봉 산맥의 그럭재(또는 기러기재)를 넘은 뒤 서남원을 거쳐 지리산 뱀사골과 달궁계곡에 숨어들었다.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대강면은 군경 토벌대의 우선수복 대상지이기도 했다.

▲ 수십 년 전 영문도 모른 채 군경의 총탄에 바스러진 송내마을 한 가옥의 흙벽이 지난 세월을 견디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1950년 11월 17일 새벽 5시. 국군 제11사단 소속 전차공격대대가 그럭재(기러기재) 너머 대강면 강석마을로 향하던 중 인근 송내마을에서 빨치산 부대와 한 차례 교전을 벌였다. 송내에는 전쟁 초 빨치산 소부대가 주둔했으나 전세가 뒤바뀌면서 대부분 입산했고, 이후 일부만이 남아 이렇듯 소규모 게릴라전을 폈다.

국군과 빨치산 간 전투는 싱겁게 끝이 났다. 전차공격대대는 다시 방향을 잡아 강석마을로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앞서 교전으로 신경이 곤두선 군인들은 민가에 들어서자마자 무작정 총격을 가했다. 사방으로 튄 총알은 흙벽을 뚫고 안방에까지 날아들었다. 주민들은 두터운 이불을 벽에 대거나 솜이불을 뒤집어쓴 채 숨죽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소개(疎開)는 이제부터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집 밖으로 끌어낸 뒤 청장년층을 따로 분류했다. 그리고 차례로 총살했다. 나이든 노인이나 부녀자, 심지어 어린아이까지도 학살의 대상이 됐다. 토벌과정에서 교전이 발생한 경우 군인들은 더 잔혹하게 주민들을 다루었다. 강석마을도 마찬가지였다.

군 토벌대는 주민들을 마을 어귀 논에 집결시켰다. 연령별로 분류하는 과정에서 몽둥이로 사정없이 구타했고, 일부는 일본도를 꺼내들며 위협하기도 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500여 명의 주민이 나이에 맞게 자리를 옮겼다. 당시 열네 살이던 김덕초 씨도 줄을 찾아 이동했다.

국군은 먼저 30대 이상 남자들을 한 명씩 즉결 처분했다. 현장에서만 3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김 씨의 형 김순도 씨(당시 32세)도 이때 총살됐다. 가을걷이를 마친 논바닥에 어느새 진득한 피가 흥건히 뿌려졌다.

▲ 1950년 11월 학살 당시 주민들이 집결했던 마을 어귀는 포도농사를 짓기 위한 비닐하우스로 덮여있다. ⓒ커버리지(정찬대)

30대가 끝난 뒤 20대 안팎의 젊은이가 지목됐다. 당시 일곱 살이던 김수영 씨는 한쪽에 선 아버지를 지켜봤다. 20대 후반의 김점동 씨는 또래 청년 19명과 함께 군인들 앞에 섰다. 좌익이나 부역 혐의 등을 추궁했지만 형식적이었고, 이들만 따로 포박돼 마을회관 앞으로 줄줄이 끌려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군인들 허리춤에 채워진 일본도가 '차가차각' 소리를 냈다.

"무릎 꿇어."

한 지휘관의 명령에 청년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다음 한명씩 후미진 곳으로 끄집고 갔다. 지휘관은 더듬거리는 청년에게 다시 한 번 무릎을 꿇으라고 지시한 뒤 목을 앞으로 빼라고 주문했다.

바닥에 내쳐진 청년은 아직까지 뭘 하려는지 가늠하지 못했다. 무릎은 왜 꿇고, 목은 왜 빼는지……. 인솔 군인 중 한 명이 잘 갈린 일본도를 하늘 높이 추켜세우더니 잠깐의 새도 없이 그대로 내리쳤다. 비명을 지를 것도 없이 정교한 칼날에 목덜미가 덜렁거렸다. 잘려진 대동맥에선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점동 씨가 앞에 섰다. 또 다른 군인이 검게 그을린 그의 목덜미에 긴 칼을 한번 대더니 단번에 후려쳤다. 목이 아직 붙어 있자 다시 한 번 힘껏 내리찍었다. 바닥에 쓰러진 김 씨가 온몸을 버둥거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단도를 빼 그의 뒷목과 근육을 후벼 팠다. 김 씨는 그제야 정신을 잃었다.

▲ 김점동 씨를 비롯해 마을 청년들이 참수된 장소. 현재 이곳은 대나무 숲이 됐다. 주민들 증언에 따르면 당시 바닥이 흥건한 채 핏물이 도랑이 되어 흘러내렸다고 전한다. ⓒ커버리지(정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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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대

신념이 담긴 글은 울림을 주며, 울림은 다시 여론이 됩니다. 글을 쓰는 궁극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연재 중이며, 오늘도 순응과 저항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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