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전망으로는 마지막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인다. 외교를 돈 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킨 트럼프는 한반도의 안정적인 현상 유지와 불안한 현상 유지 사이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는 '아웃사이더' 트럼프가 미국 주류와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최근 트럼프는 '말 폭탄'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8월 초에 미국 국방정보국(DIA)으로부터 "북한이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에 실을 수 있는 소형 핵탄두 개발을 마쳤다"는 보고를 받고는 "미국을 계속 위협하면 북한은 이제껏 세계가 보지 못했던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지난 9월 19일 유엔총회 연설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미국과 동맹을 방어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또한 김정은을 "로켓 맨"으로 지칭하면서 "그가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정권에 대해 자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어느덧 잊고 있는 것이 있다. 트럼프는 말 폭탄만 쏟아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지난해 대선 후보 당시 "김정은과 만나는 건 문제 없다"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러자 클린턴 캠프는 트럼프를 겨냥해 "가장 가까운 동맹국 지도자를 모욕하고 김정은과는 대화하고 싶다는 것이냐"며, "트럼프가 김정은에 기이하게 매료돼 있는 것 같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클린턴의 발언을 두고 "그들은 북한과 협상하는 것이 꺼려지지 않느냐고 말한다.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대화 용의를 거듭 확인했다. 아울러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으로 오면 "국빈 만찬이 아니라 햄버거를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대통령 취임 3개월여 후인 5월 초에는 "김정은과 만나는 것이 적절한 일이라면 단연코 그를 만날 의향이 있으며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대선 후보든 미국 대통령이든 트럼프처럼 북한과의 정상회담에 이처럼 적극적인 발언을 내놓은 사람은 없었다. 거꾸로 "화염과 분노", "북한 완전 파괴"와 같이 전면적인 핵 공격을 암시하는 공개적인 발언을 한 미국 대통령도 트럼프 말고는 없었다. 기이하게도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발언을 한 사람도, 북한에 극단적인 말 폭탄을 쏟아낸 사람도 동일 인물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북한이 핵탄두 장착 ICBM 보유에 빠르게 접근하자 초강경 노선으로 확연히 기울고 말았다. 현재까지는 그렇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트럼프의 극단적인 널뛰기가 함의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양극단을 오가는 그의 발언이 고도의 전략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그는 불확실성을 극대화함으로써 특유의 '헤드 게임'을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 상대가 미국인들이든, 북한과 같은 주적이든, 한국과 같은 동맹국이든, 중국과 러시아와 같은 전략적 경쟁자이든, '도대체 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이냐'는 혼란스러움을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의구심은 미국 의회와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조차 팽배하다. 가히 '미친 자의 이론(madman theory)'의 '끝판왕'이라고 할 법하다.
또 하나는 트럼프의 널뛰기에 대한 미국 주류의 반응이다. 트럼프가 "김정은과 만나겠다"는 식으로 말했을 때에도, "화염과 분노"나 "북한 완전 파괴"와 같은 극단적인 전쟁불사론을 말했을 때에도 미국 주류의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한마디로 '미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반도 현상유지에 대한 미국 주류의 관성적인 집착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북미 간의 전쟁은 물론이고 북미 정상회담을 통한 대타협도 한반도 현상 변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조바심이 트럼프에 대한 맹비난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트럼프의 순방이 가져올 결과 가운데 '불안한 교착 상태의 지속'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전망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트럼프의 '공포 외교'는 한국에 대한 무기 판매 증대 및 한미 FTA 개정 협상, 미중 간의 무역 불균형 완화에서 강력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상업주의와 부합한다. 한국과 중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최대의 압박"에 동참토록 하는 유력한 수단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의 '공포 외교'는 미국 내 자정기능을 야기해 그의 극단적인 선택을 견제하는 결과도 낳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 유지와 교착 상태는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북한은 어떻게 해서든 현상 타파를 시도할 것이고, 현상 변경이 평화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북미 간의 대결은 더욱 고도화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주민들이 최대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점도 우리로서는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문재인 정부에게 크게 세 가지를 주문하고 싶다. 먼저 트럼프의 잠재된 북미정상회담 의지를 일깨워야 한다. 그가 대선 후보 시절에 미국인들의 반북 정서와 주류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북미 정상회담 의사를 잇달아 피력한 것은 그만큼 잠재된 욕구가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때마침 북한은 9월 15일 중거리 탄도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추가적인 핵실험이나 탄도미사일 발사를 자제해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이를 평가하면서 '이제 최대의 압박에서 최대의 관여로 이행하자'고 설득해야 한다. 트럼프의 리더십을 칭찬하면서도 이제 그 리더십을 미국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즉 북미 정상회담을 통한 대타협으로 발휘할 때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
트럼프의 '말폭탄'은 그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가져온 효과가 있다. 그건 바로 미국 주류 내에서도 북미 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가 북미 직접 대화, 특히 정상회담에 대한 의사를 피력하면 이에 대한 비판과 반대는 과거보다는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또한 한반도 문제 해결이 한국의 안정적인 경제 성장 및 유라시아의 지경학적 기회를 창출할 것이고 이것이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도 부합할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으면 한다.
둘째, 평창 행사를 반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시기적으로 평창 동계 올림픽(2월 9일~25일) 및 패럴림픽(3월 9일~18일)은 한미군사훈련인 '키 리졸브/독수리 훈련' 계획과 조우하게 된다. 자칫 한반도 긴장 상태가 한미군사훈련과 맞물리면서 평창 대회가 '폭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는 우리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에게 평창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 한미군사훈련의 일시 중단을 제안할 수 있는 유력한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11월 7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러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 사유로 굳이 공개적으로 북한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올림픽 정신에 따라 평창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조치라고 발표하면 그만이다. 이렇게만 해도 '나비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우선 군사 훈련 중단 발표는 북한의 추가적인 핵실험이나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억제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다. 북한의 자제가 앞으로도 이어진다면, 한미 양국은 명분을 세우면서 북한과의 대화에 나설 수 있다. 거꾸로 한미 양국이 평창 대회를 위해 군사 훈련을 중단키로 하면, 북한 역시 도발을 자제하면서 대화에 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군사 훈련 중단 발표가 북한의 평창 대회 참가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초대장이 될 것이라는 점도 자명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접근은 중국과 러시아 정부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해온 '쌍중단'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새로운 입구를 찾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쌍개시'를 제안하고자 한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 '개시'를 출발점으로 삼아보자는 것이다. 한미일은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보여야 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정책의 철회"를 비핵화 논의의 전제 조건으로 삼으면서 평화협정 논의 시작이 그 유력한 출발점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쌍개시' 제안은 이러한 양측의 입장을 두루 고려한 것이다.
물론 현 상황에서 북미 양측이 선뜻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양측 모두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게 북미 관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한국이 이러한 제안을 공론화하면서 관련국들을 설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반도 운명의 주인으로서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다.
흔히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기본 원칙은 네 가지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4No'로 일컬어진다. 북한의 정권 교체도, 북한 정권의 붕괴도, 한반도 통일의 가속화도, 38선 이북으로의 미군 이동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한 어떤 고위 관료도 한반도 평화협정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피력한 적인 아직 없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도 여러 차례 피력했고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확인한 바 있는 '4No'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한반도 평화협정에 대한 적극적인 의사 표명이라는 점을 주지시켜야 한다. 한반도가 64년째 정전 상태에 있고 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할 때 비핵화에도 성큼 다가설 수 있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이번 정상회담이 이를 위한 좋은 기회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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