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이 아니라 '존엄'으로

[김민웅의 인문정신] 문재인 대통령이 받은 세계 시민상의 요구와 평화

트럼프의 유엔 연설과 유엔 그리고 우리

"국제 사회와 유엔이 당면한 평화와 안전 유지와 관련한 주요 문제에 대해 확고하고 구체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

청와대가 지난 19일 공식 발표한 내용이다. 무엇에 대한 이야기였을까?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유엔 연설에 대한 평이었다. 유엔 데뷔 첫 무대에서 그는 "미국은 막강한 힘과 인내심을 가지고 있으나, 만일 미국 자신과 동맹을 방어할 수밖에 없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totally destroy)하는 선택 외에는 없다"라고 말했다.

현장의 반응은 어땠을까? <워싱턴 포스트>는 "굳게 얼어버린 침묵(stony silence)"이라고 보도했다. 한마디로 분위기가 싸늘했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트럼프가 전임 대통령들이 강조했던 미국의 세계적 책임보다는 "미국 우선주의 정책(American First policy)"를 내세우면서, "250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북한지역"의 전면 파괴를 선언한 것을 문제 삼았다. 사설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his own advocacy for human dignity)"고 해놓고는 이를 이뤄내기 위한 "국제 협력과 다자 간 기구의 가치를 손상시켰다"고 비판했다.

<뉴욕 타임스> 사설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분쟁을 평화적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 할 유엔, 전쟁 위협을 내세우지 말아야 할 유엔"에서 "아들 부시의 2002년도 저 악명 높은 '악의 축' 발언과 다른 바 없는 언동(performance)"을 했다고 강조했다. 사설 제목은 '유엔에 있는 전쟁 선동자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Warmongers and Peacemakers at the UN)'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대한민국 정부는 도대체 어떤 입장에 서 있는 것일까?

미국에 대한 위협을 제아무리 전제로 하고라도 그 대응이 북한의 전면파괴라는 선언에 대해 "국제 사회와 유엔이 당면한 평화와 안전 유지와 관련한 확고하고도 구체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에 대한 지지와 동조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전쟁은 안 된다"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의 유엔 발언을 계기로 완전히 철회하는 것인가? 유엔의 존재 목표는 어떤 최악의 경우에도 평화적 조처를 끊임없이 취하는 동시에, 어느 일국의 우선주의 정책이 아니라 다자 간 논의를 통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에 있다. 청와대를 통한 정부의 발표는 이와 정면 배치된다.

세계 시민상 수상자 문재인 대통령의 소감

트럼프 대통령의 유엔 연설이 있던 날, 문재인 대통령은 대서양협의회(Atlantic Council)가 수여하는 '세계 시민상(Global Citizen Award)'을 받고 "나는 먼저, 이 상을 지난겨울 내내 추운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대한민국 국민들께 바치고 싶습니다"라며 "나는 촛불 혁명으로 태어난 대통령입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나는 평화의 힘을 전 세계에 보여주고,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위기에 희망을 제시한 대한민국의 촛불시민들이야말로 노벨 평화상을 받아도 될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면서 "오늘 내가 받는 상에는 세계 평화를 위해 한반도의 평화를 만들어내라는 세계인들의 격려와 응원도 담겨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대서양 협의회의 세계 시민상 역대 수상자의 명단에는 베트남 전쟁의 비극을 연장시키고 칠레의 피노체트 등을 비롯한 남아메리카 군사독재정권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해 했던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2012년), 지금도 여전히 전쟁 국가 추진에 앞장서고 있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2016년)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단체가 주는 세계시민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긴 하나, 한국의 촛불혁명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의 촛불시민 혁명이 세계적 발언권을 얻게 되었고, 그 의지와 역량이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확실하게 표명될 수 있는 자리였다는 점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의 세계시민상 수상과 그 소감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오후 (현지시간) '세계 시민상'을 수상한 뒤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충돌하는 메시지, 문재인 대통령의 자리는?

그런데 트럼프의 연설, 청와대의 발표, 그리고 문재인의 수상 소감은 서로 충돌하며 우리에게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북한의 전면 파괴와 유엔이 지향하는 세계 평화는 양립할 수 없고, 문재인의 수상 소감 한 대목인 "국민들이 제 손을 꼭 잡아 쥘 때 전해오는 것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라는 간절함입니다"는 트럼프의 전쟁 위협과 공존할 수 없다. 더군다나 노력하기에 따라 북한과의 평화적 대화의 길이 전면 차단된 상태도 아닌 조건이다. 이런 판국에, 북한 주민 전체를 몰살시키는 전면 파괴가 세계적 평화기구인 유엔에서 거침없이 나왔다는 것에 대한 일체의 비판이나 유감 표명 없이 환영 논조를 발표한 정부의 태도는 묵과하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입장이 북한의 계속되는 핵과 미사일 실험으로 곤혹스러운 지경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강대국 정치 문법 사이에 끼여 외교적 처신이 대단히 어렵고, 대화를 통한 해법의 실천적 조건과 역량도 매우 제한적이다. 그런 까닭에 사드 배치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지지 세력 여론도 반대가 있긴 해도 상대적으로 이해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를 믿고, 또 어떻게든 이를 지켜내려는 촛불시민의 민심 일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세월 남북 관계에 전문적인 분석 기사를 써온 <시사인> 남문희 기자의 페이스북 글이 주목된다. 그는 "문통(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굴욕을 감내하면서 사실상의 핵보유국인 북한과 맞서 최소한 함부로 취급받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 그 생명 줄을 쥐고 있는 미국의 가랑이 밑을 기고 있는 것"이라면서 "기는 것뿐 아니라 미국이 짖으라고 하는 대로 짖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장면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가?"라고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사드 배치 선택을 비난하기 전에 우선 놓여 있는 상황을 이해하고 이전과 다른 현실을 직시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호소에 가까운 글이었다.

"기라면 기고, 짖으라면 짖는" 국가수반?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의 사드 배치 압박에 저항하면서 한반도 평화 외교를 못하고 있는 상황의 밑바닥에는 보다 깊은 고충과 속내가 있다는 것을 알면, 현 정부의 외교적 기조를 응원할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여기에 담겨 있다. 여기까지는 한 언론인의 나름의 절절한 마음이 담긴 논조라는 점에서, 비판은 물론이고 다양한 의견 가운데 하나로 귀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서 역할을 한, 또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의 발언을 보면 문재인 정부와 촛불시민 혁명의 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역사적 정체성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사안 인식과 선택의 중심이 되는 기조이기 때문이다.

김경수 의원은 남문희 기자의 글에 "문재인 대통령의 최근 통일·외교·안보 분야 행보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분석해 놓았다"고 소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마음을 잘 아는 정치적 측근이라고 알려진 정치인이 촛불 혁명으로 태어났다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대통령이 미국이 "기라면 기고 짖으라면 짖는" 굴욕적 행태를 보이고 있음을 이해하라는 논지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대통령 자신을 포함해서 촛불시민 전체,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 대한 모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발언에 대해 청와대가 아무런 유감이나 비평도 내놓지 않은 태도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최고 지도자의 굴욕이 외교 전략이라고 내세워진다면, 그 최고 지도자의 존엄과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존엄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인가? 존엄이 사라진 주권 국가는 국제 사회 어디에서 존중받을 수 있을까?

트럼프가 입증한 것

촛불시민 그 누구도 주권적 굴욕을 감내하고 사드를 배치하고, 그 대가로 어떻게든 평화의 고삐를 쥐어야 한다고 믿는 이가 있을까? 그리고 그 방법이 진정 현실적이며 옳은 것인가? 사드 배치 이후 유엔에서의 트럼프 발언은 이런 논리와 전제, 그리고 기대가 모두 헛될 뿐만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중대한 판단 착오다.

존중받지 못하는 주권 국가에 대한 강대국 미국 대통령의 태도가 여기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북한 전면 파괴는 절대로 남한의 안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군사적 선택의 폭을 좁히고 대화와 평화로 가는 길에 대한 조언을 한 바 있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에 대한 송영무 국방장관의 비난 발언("안보나 국방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해서는 안 될 사람", "학자 입장에서 떠드는 느낌이지 안보 특보로 생각되지 않아 개탄스럽다")은 이런 문재인 정부의 대미정책 기조와 연관 있다고 보일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실수가 아닌 것이다. 청와대의 경고를 받은 송 장관은 자신의 발언 취지와 의미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발언이 과했다"라고 했다. 표현상 도를 지나쳤다는 것이지, 발언 의도의 본질에 대한 후퇴나 반성은 아니었다.

청와대의 경고도 "떠든다"는 표현과 "통일부의 대북 지원 결정 논란"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에 기초해 "국무위원으로서 적절하지 않은 표현과 조율되지 않은 발언으로 정책적 혼선을 야기한 점을 들어 엄중 주의 조치했다"는 요지였다. 문정인 특보가 주장하고 있는 대화 노선의 가치를 훼손한 점에 대한 유감 표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엔이 정한 '세계 평화의 날' 9월 21일

그렇지 않아도 9월 21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평화의 날' 36주년이다. 유엔은 경희대학교 창립자 조영식 박사의 제안으로 이뤄진 이 날에 대해 2017년 슬로건으로 '다 함께 평화를 : 인류 모두에 대한 존중과 안전 그리고 존엄(Together for Peace: Respect, Safety and Dignity for all)'으로 내걸었다. 특정 대학의 창립자가 제안한 날이라고 해서 그 대학만의 행사라거나 소유물은 당연히 아니다. 인류 보편의 갈망이 담긴 기념일이다.

경희대학교는 올해 세계평화의 날 행사 주제로 '전환의 시대: 촛불과 평화의 미래'라고 정했으며 미카엘 잔토프스키 체코 하벨 도서관장, 리베르토 바우티스타 전 CoNGO 의장, 게리 제이콥스 WAAS CEO, 박영신 연세대 명예교수, 송재룡 대학원장 등이 원탁 토론에 참여한다. 한반도 평화가 세계적 사안이 된 현실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고등교육 기관으로서 중요한 임무다.

게다가 체코의 벨벳과 한국의 촛불이 어떤 시민 의식의 변화와 미래를 가능하게 할 것인지를 비교 논의하는 것도 우리의 촛불 혁명이 가진 세계사적 의미를 자리매김하는데 의의가 높다. 결국 평화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한 책임은 시민사회가 지고 가야 하며 한반도의 상황을 푸는데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외교적 반경은 그 국가의 시민 역량과도 직간접적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이루라는 것이 촛불시민 혁명의 요구라는 점은 문재인 대통령의 수상 소감에서도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시민사회의 역할

그렇다면, 시민사회는 촛불 혁명의 존엄한 역사적 무게와 의의를 인식하면서 갈등과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기조로 하는 유엔의 본질적 지향과 일치하는 움직임에 선도적, 내지 주도적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움직임은 아무래도 시민사회보다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뉴욕 타임스> 사설로 돌아가면, "트럼프의 연설에는 일말의 타협이나 협상에 대한 관심의 여지가 없었다"며 오바마의 연설을 환기시키면서 "미국은 미국 자신만이 아니라 세계적 정의와 풍요에 대해 국제사회와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지구사회는 미국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우선해서 다른 나라들이 따라가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주권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주권이 존중되어야 하며, 국제사회의 다자적 논의와 협력 속에서 평화의 미래를 일구어내야 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을 믿는 것이 아니라, 촛불시민의 미래 의지를 믿어야 마땅하다. 또 그러리라 본다. 그렇다면, 믿는 바대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남북 관계를 국제 관계 속에서 풀어본 경험이 있는 역대 장관을 포함해 한반도 평화를 지향하는 촛불 정신에 충실한 우리 사회의지적 역량과 시민사회의 힘은 충분하다. 이전과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이들의 경험과 인식이 무의미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역사적 지혜의 가치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의 해법이 지향하는 관건은 달라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과 책임

대통령이 한완상, 임동원, 정세현, 이재정, 이종석 등 역대 통일부 장관의 의견을 듣고 솔직하게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백낙청, 고은, 백기완, 함세웅, 명진, 강우일, 문정현 등 우리 사회 원로 인사의 충심을 듣는 자리를 갖는 것 역시 부담을 갖지 말고 생각해볼 일이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법에 노력해온 중견 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 역시 책임 있는 정부의 모습이다. 덧붙이자면, 평화운동을 하는 시민사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인다면, 정부의 평화에 대한 소통과 정책의 기반은 더욱 단단해지지 않겠는가? 이게 다름 아닌 촛불시민 혁명의 동력이며, 그 동력에 기초한 정부가 바로 문재인 정부여야 하지 않겠는가?

적대적 군사 체제를 유지 증폭하는 휴전 상태를 종식시킬 평화 협정과 북한-미국의 외교적 관계 정상화라는 길을 놓고 어디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당연히 북한은 우리의 우려에 진지하게 반응해야 하며,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핵무기가 더는 필요하지 않은 상황을 조성해야 하는 것, 그것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평화를 보장하는 근본적 해법이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연설을 기대해본다면 과욕일까? 유엔이 제공하는 무대에서 촛불과 평화를 하나로 이어 세계적 사건으로 만드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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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미국 진보사학의 메카인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화독법>, <잡설>, <보이지 않는 식민지> 등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 했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국제·사회 이슈에 대한 연재를 꾸준히 진행해 온 프레시안 대표 필자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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