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마 "10년 청춘 다 날아갔지만, 적어도 침묵하진 않았다"

영화 <공범자들> 시사회

"방송의 미래를 망치지 마세요."

영화 속 누군가가 일침한다.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삿대질하는 그의 모습에 관객은 '빵' 터졌다. 그는 누구인가. 최승호 PD와 박성제 기자에 대한 '묻지마 해고'를 인정한 녹취록의 주인공 백종문 문화방송(MBC) 부사장, MBC를 '엠X신'으로 만든 공범자들 중 한 명이다. (☞관련 기사: MBC 간부, 최승호‧박성제 '묻지마 해고' 인정 파문, 'MBC 백종문 녹취록' 제보자 "100억 받을 계획으로…")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17일 개봉한 영화 <공범자들>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바로 백 부사장의 말이다. "방송의 미래를 망치지 마세요."


KBS‧MBC의 잃어버린 10년

공영방송 한국방송공사(KBS), MBC는 MB 정부의 시작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임기 중 검찰총장과 KBS 사장에게는 전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들었던 정연주 전 KBS 사장은 MB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해임됐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촛불 국면에서 주목 받았던 <시사투나잇>, <미디어포커스> 등 시사 프로그램이 폐지됐다. 그리고 그 자리는 대통령이 직접 나와 국정을 홍보하는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 프로그램으로 채워졌다. 국민의 방송 KBS는 'MB의 방송'으로 전락했다.

MBC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제작진은 광우병 촛불 집회의 불을 당겼던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편 이후 검찰 기소됐다.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던 김보슬PD도 예외 없이 수갑을 차고 검찰 호송차에 올랐다. 이후 '4대강, 수심 6m의 비밀' 등 정권을 겨냥한 방송이 계속되자 결국 제작진이 물갈이된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최승호 당시 피디에게 사측은 "편향돼있다"고 지적한다.

기자, 피디들이 줄줄이 부당 징계를 받으며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 사이 KBS와 MBC에는 김재철·길환영 등 낙하산 인사들이 사장으로 임명됐다. 정권과 그 하수인들의 방송 장악 시도에 두 방송사는 2012년 유례없는 장기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투쟁의 결과는 해임, 전보 조치, 감봉이었다. 사측은 "공정 방송", "언론 자유"를 외치던 이들을 내몰고 입맛에 맞는 경력‧계약직 사원들을 대거 뽑았다.

그 결과, KBS와 MBC는 결국 공영방송은 고사하고 언론으로서 기능을 잃고 말았다. 세월호, 최순실-박근혜 국정 농단 국면에서 두 방송은 침묵했다. 기자들은 '기레기' 소리를 들으며 현장에서 내쳐졌다. 그리고 '정치권력의 사생아' 이야기를 듣던 종합편성방송 JTBC가 어느새 국민의 방송 반열에 올랐다. 지난 두 정권 기간은 KBS와 MBC에게는 '잃어버린 10년'이나 마찬가지였다.


▲영화 <공범자들> 속 장면. 김재철 전 MBC 사장을 찾아간 최승호 피디.

최 피디는 '잃어버린 10년'의 주역들을 쫓아간다. 전작 <자백>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영방송을 망친 공범자들에게 찾아가 묻고 또 묻는다. "왜 저를 이유없이 해고하셨냐"고, "왜 방송을 망가뜨렸냐"고. 그는 김재철 전 MBC 사장과 길환영 전 KBS 사장, 그리고 그들의 후임인 고대영 현 KBS 사장과 김장겸 현 MBC 사장에게서 답변을 듣기 위해 숨막히는 추격전을 펼친다. 좁은 오피스텔 복도와 계단을 달리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몸싸움을 벌이며 받아낸 답변은 <자백>의 주인공 원세훈 전 국정원장,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 적이 없습니다", "오해가 있습니다",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질문은 '종범'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최 피디는 마침내 주범을 찾아간다. "언론을 망가뜨린 주범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국회 청문회장에서 기자의 질문에 침묵하고 있는 고대영 KBS 사장의 모습.

"패배의 기록, 그러나 우리는 침묵하지 않았다"

공정 방송 수호를 위해 싸운 KBS와 MBC 구성원들에게 <공범자들>은 패배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고, 공범자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장기 파업 이후 해고된 이용마 전 MBC 기자는 그러나 "싸움의 의미는 기록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우린 암흑의 시대 침묵하지 않았다"며 "10년의 청춘과 인생이 다 날라갔지만,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기간에 우린 침묵하지 않았다"고 지난한 투쟁을 정리한다.

영원한 패배는 없다. 진실은 언젠간 드러나는 법이다. 공범자들이 벌인 '언론 농단'의 추악한 실체는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공범자들> 마지막 시사회였던 16일, MBC판 '블랙리스트' 배후에 고영주 이사장 등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장 면접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업무 배제 지시를 한 정황이 녹취록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관련 기사: "朴정권하 임명된 고영주가 MBC판 블랙리스트 배후")

최 피디는 이날 동대문구 신촌역 인근 메가박스 시사회를 찾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흥행으로 김장겸을 비롯한 공범자들을 쫓아낼 수 잇기를 바란다"며 성원을 부탁했다.


▲16일 시사회. 왼쪽부터 손정은 MBC 아나운서, 김민식 MBC 피디,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 최승호 피디,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 ⓒ프레시안(서어리)

손정은 앵커 "입사 11년 차, 그 중 절반을 방송을 못 했다"

이날 시사회에는 반가운 얼굴이 등장했다. 과거 MBC 간판 아나운서였던 손정은 앵커가 감독과의 대화 진행자로 나선 것.

손 앵커는 "사회공헌팀에서 일하게 돼 아나운서라고 소개하기가 멋쩍다"고 인사한 그는 "입사 11년 차인데 절반 가량을 방송을 못 했다"고 말했다.

주말 <뉴스데스크>를 진행하던 그는 2012년 MBC 장기 파업 이후로 방송에 나갈 수 없었다. 그는 "당시 김재철 사장이 소위 블랙리스트에 오른 아나운서들에게 방송을 맡기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아 하루종일 아나운서국에서 앉아만 있었다"며 그간 겪었던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최 피디는 "공영방송이 회복하면 가장 먼저 느끼는 순간이 손정은 앵커가 TV 화면에 다시 나타날 때일 것"이라며 손 앵커의 방송 복귀를 기원했다.

언제쯤이면 손정은 앵커를 다시 TV 화면을 통해 볼 수 있을까. 공범자들과 싸우다 지금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이용마 기자의 쾌유 모습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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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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