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과 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를 포함한 한-미 연합군사훈련 규모 축소를 미국과 논의할 수 있다."
두 번째 문장은 이미 국내 언론이 숱하게 보도해 잘 알려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을 '비상임'으로 맡고 있는 문정인 연세대 교수의 발언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문장의 발언 주인공은 누구일까? 놀랍게도 1차 한반도 핵위기가 정점으로 치닫던 1994년 3월 중순에 개리 럭(Gary Luck) 주한미군 사령관의 발언이었다.
과거의 일을 꺼내든 이유는 간명하다. 두 발언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문 교수의 발언보다 개리 럭 당시 사령관의 발언이 훨씬 급진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은 군사훈련 중단은 고사하고 '축소'조차 거론하는 것을 허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문 교수의 발언을 '색깔론'으로 몰고 가는 보수 언론과 보수 정당의 반발은 논평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이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조차 너무 소극적이고 수세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은 20일 미국 CBS와 인터뷰에서 크게 세 가지 입장을 밝혔다. 문정인 교수의 발언은 "개인적인 견해"이고, "연합훈련 축소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며, "선거 과정에서 한미군사훈련의 축소 혹은 조정을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국내 보수층의 반발과 미국의 의구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나온 발언들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발언들이 실망스러운 이유는 이렇다. 우선 문 대통령의 말 바꾸기이다. 그는 대선 후보 때인 4월 27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북핵 동결이 검증된다면 한미 간 군사훈련을 조정하거나 축소하는 등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문 교수의 '워싱턴 발언'은 이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당장 불거질 수 있는 문제는 문 대통령과 문 교수 사이의 '신뢰'이다. 대통령과 특보 사이의 신뢰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대통령의 정책 결정에 유용한 참고가 될 수 있는 특보의 자문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문 교수가 통일·외교·국방을 아우르는 식견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북핵 문제 대처에 있어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적 선택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대통령이 "연합훈련 축소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 상황에서 정부 내에서 이 옵션을 검토하거나 한미간에 협의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북핵 동결과 완전한 핵 폐기'라는 2단계 해법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길로 가기 위해서는 한미군사훈련의 축소 내지 중단은 거의 필연에 가까운 상응 조치 가운데 하나다. 한미 양국이 최강의 무력을 과시하면서 북한에게 핵을 내려놓으라고 얘기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90년대 초반 1차 핵위기와 군사훈련의 관계사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다. 보수 정권들인 노태우-조지 H.W 부시는 92년 1월 당시 세계 최대 군사훈련이었던 '팀 스피릿'을 전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발표하고 이에 앞서 북한에 통보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협정 가입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한미 국방 당국이 92년 10월 '팀 스피릿' 재개 방침을 밝히고 이듬해 강행하려고 하자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응수했다. 그런데 이때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군사훈련 '축소'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전에 약 20만 명이 참가하던 규모를 절반으로 줄였고 특히 미군의 참가 규모를 1만 9000명으로 대폭 감축했다. B-52와 같은 전략 자산 투입도 없었다. 이는 93년 6월과 7월 북미 고위급 회담 분위기 조성에 크게 기여하면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유보 및 핵 동결 협상 의사 표명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이로써 위기는 수습되는 듯 했지만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이에 특별사찰을 놓고 갈등이 격화되면서 94년에는 더 큰 위기가 찾아왔다. 당연히 '팀 스피릿'도 최대 논란거리였다.
한미 양국의 강경파는 팀 스피릿 중단을 "북한의 악행에 대한 보상"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팀 스피릿을 중단해도 대북 억제 및 방어에 전혀 문제가 없다며, 중단 쪽으로 입장을 정리해갔다. 이 과정에서 앞서 소개한 개리 럭 사령관의 조언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팀 스피릿은 그해 10월 북미 간의 제네바 합의 체결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고, 그 자리에는 규모와 성격이 훨씬 완화된 연합전시증원연습이 대신했다.
이처럼 1차 핵위기는 군사훈련의 실시 여부 및 그 규모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다. 하여 문재인 정부는 '북핵 문제 해결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군사훈련 축소를 포함한 여러 가지 옵션을 미국과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어야 했다. 만시지탄이지만 지금이라도 미국과의 정상회담 실무 협의에서 이를 타진할 필요가 있다.
물론 당시에는 북한이 핵 '개발' 단계였다면, 지금은 핵무장을 넘어 '고도화' 단계인 만큼 다른 대응이 필요하다고 여길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대응'이 꼭 군사훈련의 판을 유지하거나 키우는 것일 필요도 없고, 또한 그래서도 안 된다. 그 결과는 북핵 동결이나 폐기가 아니라 더 커지고 날카로운 북핵으로 귀결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대규모 한미군사훈련을 통한 무력시위는 '북한을 불안하게 만들어야 우리가 안전해진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따라 2010년 이후 군사훈련의 판은 계속 커져 왔다. 특히 미국의 전략 자산이 대거, 그것도 공개적으로 투입되어왔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안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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