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 <남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평

[기자의 눈] '답'만 옳고 '풀이 과정'이 틀렸다

시민사회에서 널리 존경받는 원로 학자이자 지식인이던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이 법무장관에 지명되면서, 그가 작년에 쓴 책 <남자란 무엇인가>에 담긴 여성비하적 표현이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안경환 법무장관 내정자가 쓴 책에는 "몸을 팔려는 여성이 있고 성적 본능을 제어하기 힘든 사내가 있는 한 매춘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젊은 여자는 정신병자만 아니면 거지가 없다는 말이 있다. 구걸하느니 당당하게 매춘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술과 여자는 분리할 수 없는 보완재다. 여성은 술의 필수적 동반자다" 등의 표현이 나온다. (☞관련 기사 : "젊은 여성은 매춘으로 살 수 있다"…안경환 저서 파문)

안 내정자가 인권위원장으로서, 지식인으로서 해온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온 쪽, 이른바 '진보 진영'에서의 충격 강도가 더 컸다. 처음 한 종합편성케이블 채널에서 관련 보도가 나왔을 때나, 많은 신문들이 문제적 표현을 책에서 확인해 보도한 이후에도 안 내정자를 긍정 평가해온 이들 사이에서는 '설마'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 표현이 쓰인 게 사실이라 해도 이해할 만한 맥락이 있겠지'라는 취지의 기대였다. 서울대 교수나 인권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여성 권익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시민단체로부터 상을 받기도 했던 안 내정자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일부 매체 기자들은 부랴부랴 책을 구해 읽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거나 시간이 걸리자, 전자책(e-북)을 구입해 읽기도 했다. <프레시안> 기자들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안 내정자는 논란이 되자 법무부를 통해 배포한 해명 자료에서 "언론 등에서 일부 저서의 내용을 발췌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안 후보자가 남자의 욕구, 공격성, 권력 지향성과 그에 따른 남성 지배 체제를 상세히 묘사하고 비판하기 위한 맥락에서 사용한 표현들"이라며 "여전히 성욕에 매몰돼 있는 시대착오적 남성들의 행태에 경종을 울리고, 궁극적으로는 남성의 구태적 지배문화를 대체하는 여성의 소프트 파워를 주목하며 남성사회(문화)의 대변혁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기술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즉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들일 뿐이며 "이를 두고 오히려 '구태를 정당화하는 것'이라 해석하는 것은 후보자의 진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책에 담긴 전체 내용으로 미뤄볼 때, 안 내정자의 "진의" 내지 책의 취지는 그가 해명한 대로 기존의 남성 중심 사회·문화를 비판하는 데 있다는 점을 수긍할 수 있다. 안 내정자가 법무장관으로 임명돼 국정의 일익을 맡는다고 했을 때, 그가 성매매(성 구매) 행위에 온정적인 처분을 내린다거나, 여성 차별·대상화를 악화시킬 어떤 행정행위를 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안 내정자가 책을 통해 내리고 있는 결론은 '…임에도 성매매는 근절돼야 한다', '…임에도 남성 중심 문화는 개선돼야 한다'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임에도 불구하고'에 담긴 내용들에 있다. 특히나 안 내정자의 전공인 법학은 '논리의 학문'이다. 법원이 내리는 판결에서는, 결론에 해당하는 '주문'뿐 아니라 그 논거를 담은 '이유' 역시 매우 중요하다. '주문'은 해당 사건 한 건에 대해서면 영향을 미치지만, '이유'는 앞으로 발생할 수많은 유사 사건을 심판하는 데 있어 전범(典範)이 된다. 때문에 설사 결론이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어떤 논리적 과정을 거쳐 그같은 결론에 이르게 됐는지 역시 매우 중요하다. 박근혜 탄핵심판에서 "피청구인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결론에 못지않게, 박 전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 탄핵 사유가 된다는 재판관 김이수(헌재소장 후보자)의 '소수 의견'이 큰 관심을 받은 이유다.

이를테면 책의 한 부분을 보자.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다

저자는 물론 '성욕은 본능이기 때문에 성매매나 성폭력이 정당하다'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위 문장으로 시작한 문단 전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하 인용문에 나오는 밑줄·굵은 글씨는 원저자의 표현이 아니라 칼럼 필자의 강조임.)

■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다. 그러나 그 본능을 다스려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남자라야만 자신과 세상을 함께 다스릴 수 있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보면, 남자는 여자의 유혹에 약하게 진화돼 왔다. 여자는 생존을 보장해 주는 한 남자와 안정된 관계 속에 자녀를 양육하는 데 관심이 쏠려 있지만, 남자는 되도록 많은 정자를 많은 곳에 뿌리는 일에 관심을 둔다. 난교는 남자의 생래적 특성이다. 여자는 일생 동안 300개 정도의 난자만을 생산할 뿐이다. 그런 까닭에 소중하게 아껴두었다가 되도록 비싼 값에 교환하고 싶어한다. 반면에 남자의 정자 수는 무한정이다. 종종 남자는 '뇌에 생식기가 달렸다'는 농담을 한다. 이 말은 넓게 보면 생물학적으로 진리에 가깝다. 그러니까 남자는 여자의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도록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진화돼 왔다. 실제로 남자는 여자가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줘도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한다.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우리가 누군가에 성적으로 끌리는 것은 상대에게서 후손을 보존하는 데 중요한 자질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섹스의 존재 이유를 잘 설명하지만 특정한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어지는 의식적 동기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실마리를 제시하지 못한다. 또한 진화생물학은 우리가 아름다움에 끌리는 이유는 아름다움은 곧바로 건강을 보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름답다'는 말의 본질에는 강한 면역 체계와 넘치는 스태미너의 소유자인 건강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러나 이 문단 전체를 봐도, "본능을 다스려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남자라야만 자신과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결론'이 어떤 논거로 뒷받침되는 것인지는 좀처럼 알기 어렵다. 문단을 채우고 있는 표현들은, 저자가 '…임에도 불구하고 본능을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동원한 말들이라기보다 오히려 반대의 주장을 강화하는 논거로 더 적합해 보이는 것들이다. 이런 패턴은 책 전체에서 십수 차례에 걸쳐 반복된다.

■ 성적 욕망과 능력이 저하되면서 중년 남자는 시각적 욕망에 더 심취한다. 여자는 청각과 후각에 민감하지만, 남자는 시각에 민감하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도 여자에게 눈길을 흘깃거리는 이유는 나이가 들수록 욕망이 그쪽으로 강렬하게 전이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은 응시는 본질적으로 '사악한 눈', '탐욕으로 가득찬 눈' 이라고 강조한다. 현실적으로 '선한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응시가 사악한 이유는 그것이 욕망하는 대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선은 욕망을 낳고, 욕망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탐욕을 낳고, 탐욕은 시기심을 낳으며, 시기심은 자기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공격하는 폭력성을 낳는다.

■ 많은 남자들이 중년의 위기에서 열정의 불을 지피고 싶을 때 시도하는 가장 보편적 방법이 외도다. 실제로 젊은 여성은 중년 남자가 원하는 것을 준다. 그를 존경하고, 그가 주는 것에 감사하고, 그가 되찾고 싶어하는 장소에 따라간다. 젊은 애인과 함께하면 중년 사내는 새로운 성적 충동에 눈뜨고, 마치 삶이 회생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내들은 경악하지만, 남편은 외도한 사실에 죄의식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의 성적 능력을 되살리는 일이 너무 급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감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중년이 되면 더 이상 섹스를 통해 남성다움을 인정받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청년 시절에 섹스로 일원화해둔 욕구와 감정의 창구를 다원화해야 한다. 섹스가 아닌 대화로 감정을 표현하고, 섹스가 아닌 운동이나 취미생활에서 모험심을 추구하고, 섹스가 아닌 업무영역에서 성취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김형경의 교과서적인 충고다. 그러나 교과서가 제시하는 표준적 정답은 밋밋하다. 뭔가 군침이 돌 만큼 상큼한 별미를 찾는 것이 사내의 생리다.

■ 남자는 죽는 순간까지 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 생명의 씨앗을 갈무리하고 있으면서 언제라도 뿌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다. 그러나 하초에 힘이 빠지고 소변 줄기가 제자리에 멈출 때 남자의 허무는 극도에 달한다. (중략)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거동조차 부자유스러운 노인이 병수발을 위해 온 중년의 도우미 미자의 몸에 눈빛을 보낸다. 배우 김희라의 표정이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다. 그 절실한 노인에게 건네는 중년 아낙네의 육보시는 경건하기까지 하다.

중국 문화권에는 젊은 여자의 체취가 노인에게 불로초 선약이라는 오래된 전설이 전해진다. (중략) 소변 조절 기능이 떨어져서 기저귀를 차고 다니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젊은 여성과 섹스를 했다는 재벌 총수의 신화도 있다. 노인의 성적 판타지는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마지막 이유이기도 하다. 옛날 일본 정치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일종의 잠언이다. "가운뎃다리 힘이 빠져야 국정을 논할 자격이 있다." 그만큼 성욕은 본능적이고 절박하기에 쉽게 이성과 균형감을 잃게 만든다는 뜻이다.
요컨대 성욕을 품위 있게 유지하고 다스리는 것이 늙은 남자의 지혜일 것이다.


이런 문단들에서, 물론 최종적 '결론'은 "교과서적 충고"나 "시선으로 인해 생기는 탐욕과 시기심의 자제", "늙은 남자의 지혜"에 있다. 하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중년 남자의 시선"과 "외도", "섹스에 대한 노인 남성의 집착"에 대해 긍정적으로 읽힐 소지가 다분한 언설들이 굳이 저렇게 많이 필요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는 저자의 인격에 대한 신뢰에도 불구하고, 집필 의도나 동기가 단순히 "남성 지배 체제를 상세히 묘사하고 비판하기 위한"(법무부 보도자료) 것뿐이었는지 의심하게 한다.

선해하자면, 저자는 여성주의적 접근에 대해 그야말로 '사내'다운 패기로 목숨을 걸고 완강히 반대하는 일부 성차별주의자들이나 고연령 세대들을 포섭하고, 그들이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 체계를 통해, 여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의 행동 변화를 일으키리라고 조금이나마 기대할 수 있는 실용적 설득의 방법을 일부러 택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성들은)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농담도 자칫 잘못하면 성희롱이 되고, 악의 없는 친밀한 신체 접촉도 성추행이 된다며 당혹스러워한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은 크게 달라졌다"거나 "남자보다는 여성 정치인이 덜 부패할 것이다. 그것은 남녀의 본성의 차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여건 때문일 것이다. 여성 정치인에게는 부패할 여건이 덜 조성되고 기회도 적기 때문일 것이다. 부패의 주된 원인이 되는 환락 문화도 남성들의 전유물이다" 등의 서술은 이런 '선해'를 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된다는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중년 사내들이 많다. 이제 우리나라의 법도 그렇게 됐다. 아내가 원치 않는 남편을 강간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자의 무기는 공격용인데 반해 여자의 것은 수비용에 불과한데 어떻게 여자가 남자를 강간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은 시대의 변화에 둔감한 사람이다" 같은 단락에서도, 저자의 의도가 "이제 우리나라의 법도 그렇게 됐다"에 있지 어떤 남성들이 품은 "의문"이나 그들이 받은 "충격"에 있지는 않다고 가정한다면 이같은 '설득의 효과'를 노리고 썼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책의 모든 부분이 그렇게 이해될 수 있는 범위 내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도 이같이 '선해'를 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도 저자를 비판한다. 홍 교수는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저자는 생물학적 남성의 '본질'을 일종의 고정 변수로 본다. 이것 자체가 문제"라며 "아마 저자는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사실'이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특히 자신과 같은 '중·노년의 한국 아재'들에게는 그렇게 설명해야 성폭력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을지도 모른다"고 전제하면서도 "만약 그런 의도였다고 해도 책은 오해의 소지를 스스로 줄였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이 이슈는 '오해'가 부르는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자칫 '본성'대로 행동하는 남성의 모든 행동이 양해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크고 그 부정적 결과가 너무 막대하다"며 "또 그 이전에 저자의 가정 자체에 문제가 있다. 그것이 과연 남성의 '본질'인지도 의문일뿐더러, 그런 본질주의적 접근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어떤 해석을 붙여도 문제가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은밀한 방식으로 남성 지배를 강화하는 의견이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성욕은 남자의 본능?

특히나 '남성의 성욕은 본능'이라는 전제는 이 책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 섹스에 대한 남자의 욕구는 학습된 행동이 아니라 타고난 것으로 테스토스테론, 바소프레신, 도파민과 같은 생화학물질이 작용한다. 남자의 뇌는 사정이라는 최종 목적을 달성하는 데 집착한다. 남자에게 연애는 섹스의 목적이고, 여자에게 섹스는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이다

성욕이란 것은 모든 사내에게 숨은 절실한 욕구다. 살인, 절도, 강도와 같은 범죄는 누구나 쉽게 저지르지 않는다. 비록 음주 후 인사불성 상태에서도 이런 행위는 좀체 변하지 않는다. 오랜 학습을 통해 잠재의식 속에 확실한 금기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행위는 다르다. 남자의 성은 금기가 아니다. 오히려 성행위를 조장하는 사회문화다. 다만 상시 대면하는 특정인만을 상대로 반복하고, 그 사람과 습관적으로 성행위를 해야 한다. 그것이 일부일처제의 기본 규범이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사내의 생체 리듬에 어긋난다. 오로지 윤리와 도덕이라는 인위적인 의식의 조작을 통해 본능을 제어해야만 한다. 그래서 사내는 언제나 용감한 선택과 부자연스러운 자제 사이에서 고민해야 한다

■ 남자들의 정신은 원래는 원주민 여성의 벗은 몸을 보고도 별반 성욕을 느끼지 않도록 설계돼 있지만, 포르노 앞에서는 통제 불능이 되는 구조적 결함이 있다. 만사를 제쳐두고 잠시 (때로는 몇 시간) 포르노 사이트에 은거하고 싶어하는 사내의 욕망은 통제하기 힘들다.

■ 가끔 남자도 자신의 '성 기관'을 불편해한다. 불수의근이라는 책임회피성 이름을 붙이고, 그것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움직인다고 한다. 그들은 감정 표출을 두려워하면서 억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욕도 주체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며 두려워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차피 그 여자를 안아보고 싶은 욕망이 들 때다. 머릿속에 든 것이나 용모도 이런 종류의 욕망을 보강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인텔리 남자가 섹시하지 않은 것은 이런 보강용 자질에 지나친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 남자에게 왜 성적 능력이 그토록 중요한지 궁금해 하는 여성이 많다. 왜 성적 능력을 사회적 역량이나 정서적 안정감과 같은 것으로 느끼는지, 성욕을 해소하지 못한 남자는 왜 로켓포처럼 위험해지는지, 왜 성적으로 거절당한 남자는 간혹 상대을 죽이거나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진화심리학자는 남자의 성욕과 성 기관의 작동 방식에 대해 '자연의 유일한 실수'라고 표현했다. 수컷들의 성관계를 파탄낸 주범은 문명화다. 수컷들의 성적 자유는 서양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전통으로 이어져 왔는데, 성적 본능은 이렇다 할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고전 철학과 유대교 및 기독교 윤리가 대중에 침투하면서 오늘날의 습속이 됐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수많은 성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간 것이 바로 문명이다. 인간의 친절과 도덕적 교양을 존중하고 인권을 중시하는 우리의 문명이 야만의 주범이라니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랑과 상냥한 친절의 능력이 진보할수록 도리어 족쇄가 되어 이성을 유혹하려는 시도를 주저하게 만든다. 문명은 남녀관계에 있어서 관대함, 세심함, 평등의식, 공평한 가사 분담과 같은 값진 미덕을 선사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문명화는 적어도 우리의, 아니 남자의 성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남성의 성욕은 본능'이라는 전제는, 저자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현재의 우리 사회에 실질적으로 미칠 해악이 결코 적지 않다. 야생동물의 번식 욕구와 인간의 성욕은 그 복잡성이나 발생 동기 등에서 다르다고 보기도 하지만, 굳이 성욕을 '본능'으로 범주화한다고 쳐도 그 주체는 '남자'가 아닌 '인간'이어야 마땅하다. 저자가 책에서 지적한 대로 "유사 이래" 남성의 성욕은 존중받아 온 반면, 여성의 성욕은 드러내지 말아야 마땅했던 어떤 것이었다. 같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어떤 성(性)의 성욕만이 "본능"으로 인정받았고 다른 성 정체성을 지닌 이들의 욕망은 무시됐다.

인정받은 단 하나의 성은 '남성 이성애'였고, 무시당한 성은 남성 이성애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성이었다. 여성은 그 '나머지' 중 가장 다수였다. 그래서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라는 언술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그런 사회에서 성장한 남성들 가운데 상당수가 성욕을 본능으로 여기고, 자신의 성욕을 통제할 수 없다고 스스로 믿음으로써 정말로 스스로의 성욕을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의 인간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반대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그런 사회적 용인과 자기최면이 있었기 때문일 뿐이기도 하다.

성별에 따른 차별적 사회화로 인한 차이는 단순히 '본능으로서의 성욕'에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책에는 이런 부분도 있다.

■ 남자 뇌는 동시에 여러 소리를 듣기 힘들다. 연인이 카페에 들어가면 남자는 애인의 목소리만 들린다. 그러나 여자는 반경 10미터 내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대부분 듣는다. 여자는 읽기와 듣기를 동시에 집중할 수 있다. (…) 어느 휴일날 온종일 빈둥거리는 남편에게 아내가 말한다. "앉아서 TV만 보지 말고 빨래를 좀 개요. 그 정도는 TV 보면서도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이것은 싱글태스킹인 남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성이 이를테면 언어 능력이나 감정적 소통 능력에서 남성보다 뛰어나다는 통설과 마찬가지로, '멀티태스킹'에 능하다는 것 역시 '남성의 성욕은 본능'이라는 언술과 마찬가지의 이중성을 가진다. 여성의 소통 능력은 유전자에 새겨진 것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처지에 놓인 이들이 주변의 상황, 강자의 기분을 살피고 소통하려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일이다. 그래서 소통 능력이 가장 부족한 이들은 50대 이상의 남성이며, 같은 남성이라도 젊은 세대일수록 소통·공감 능력은 더 뛰어나다. 반대로 여성이라 할지라도 이런 환경에서 성장하지 않은 이는 소통 능력에서 장애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전직 대통령의 경우가 그렇다.

현대 사회에서 '멀티태스킹 능력'은 남성에게도 강요된다. 수많은 기업에서 부장급 이하 사원들은 늘 복수의 업무를 동시 진행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그런 처지의 말단 사원이라고 해도, 집에 돌아와서는 연인이나 어머니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TV를 보며 그저 쉬고 싶어 할 것이다. 멀티태스킹 능력은 권력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강요되는 것이지, 누군가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남자가 TV를 보며 빨래를 개는 것은 그래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단순히 '해보지 않은 일'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명제들, 즉 '여성은 멀티태스킹에 뛰어나다', '여성은 소통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다' 같은 명제들은 비유하자면 '서울대 학생들은 토익 성적이 높다'처럼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애초에 수능 점수가 높은 학생들만 받았으니 당연히 다른 학교에 비해 토익 등 자격시험 점수도 높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그게 서울대의 지리적 특성이나 면학 환경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왜 여성의 '능력'이나 남성의 '본능'은 심지어 "생래적"인 것인가?

남성 중심적 시선과 여성혐오


여성 문제를 파악하는 시각이 지극히 남성 중심적 시선과 사고에서 나온 경우도 물론 있다. 물론 저자가 60대 남성인 점을 감안하면, 어떤 면에서는 시각이 남성 중심적인 것은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가 밝힌 집필 의도가 '남성 지배 체제 비판'인 점을 생각하면, 다른 분야의 저서들과는 달리 이런 시각에서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남성 중심의 시선이 왜 문제인가? 그것은 그 속에서 여성은 소외되고, 타자화되고, 주체가 아닌 '대상'의 위치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 남자의 독점욕(중제) "여자란 반드시 열쇠를 채워 보관해야 할 소유물이다. 시중을 드는 용도로 창조된 존재이자 예속을 통해서만 비로소 완성에 이를 수 있는 존재다. 남자들이여, 여자를 찾아갈 때는 채찍을 잊지 말아라." 니체의 말이다. 이 말은 여자의 종속적 지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 대한 남장이 배타적 소유욕을 상징하는 모든 대상에 적용된다. 남녀의 욕구차이는 소유하는 물건의 차이에 그대로 반영된다. 여자의 물건은 시간의 소유와 관련된 반면, 남자의 소유는 공간의 소유와 관련돼 있다. 남자는 물건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 특별한 애착을 보인다. 여자에게도 소중한 물건이 있지만, 몇 가지에 한정된다. 보석류, 명품 가방, 옷과 구두 등등 대체로 자신의 성적 매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물건들이다.

아내에게 잠자리를 거부당할 때 느끼는 사내의 충격과 당혹감은 다른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심각한 상처를 유발할 수 있다.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성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섹스를 거절당했다고 해서 결코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프로야구 최고 타자의 타율이 3할대다. 홈런은 지극히 예외적인 횡재다. 또한 나를 거절한다고 해서 상대가 나의 인격이나 영혼에 혐오감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도 말라. 거절의 이유가 무엇이든 상대는 단지 나의 몸에 흥분을 느끼지 못할 뿐 도덕적 판단과는 무관하다.

■ 데이트 폭력으로 수많은 여자들이 친밀한 상대의 폭력으로 병원이나 무덤까지 간다. 남자는 성적 욕망과 함께 그 욕망이 거부될지도 모르는 불안을 함께 품고 여자에게 접근한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최종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 것이 사내의 생리다. 거부되면 불안은 분노로 전환된다. 불안의 분노와 욕망은 항상 함께 존재하며, 두 가지가 뒤엉켜 한 덩어리가 된 상태에서는 언제든지 에로스가 타나토스로, 사랑이 죽음으로 바뀔지 모르는 위험이 존재한다.

■ 모든 남성은 강간범이 될 수 있다. 경관으로 상징되는 세속적 권위와 물리력을 가진 사내는 힘의 철학에 산다. 남성이 자신의 존재와 힘을 과시하는 수단은 타인을 지배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남성에게는 강간도 힘의 지배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 남자가 자위행위에 사용하는 판타지는 실제 섹스의 예행연습이다. 만약 여성이 남자의 성적 판타지를 경멸하면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성적 판타지를 가진 남자는 대부분 정상적인 남자다. 따라서 오래 사귄 여성이 남자친구의 성적 실험을 경멸하며 완강하게 거부하면 헤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남자의 성적 판타지가 여자를 곤란하게 만들듯이 여자의 로맨스에 대한 환상도 남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 여자는 얼굴로 늙고, 남자는 마음으로 늙는다(중제) / '여자는 얼굴로 늙고, 남자는 마음으로 늙는다'는 영국 속담이 있다. 마음은 몸의 징표다. 비록 마음이 동해도 성기능을 상실한 노인에게는 자위는 고사하고 몽정도 일어나지 않는다. 꿈 속의 사랑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중략) 2010년에 발표한 박범신의 작품 <은교>는 그러한 슬픔을 절절하게 그렸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70대 노시인과 17세 소녀 사이의 애처로운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몸의 상태다. 어설픈 위안이나 헛된 망집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나이는 염연한 사랑의 조건이요 몸의 상태다.

이런 서술에는 '독점하려는 남자', '거부당한 남자', '폭력을 동원하고 싶은 남자', '강간도 수단인 남자', '판타지를 가진 남자', '소녀를 사랑한 늙은 남자'의 입장은 있으되, '지배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 여자', '거부한 여자', '맞은 여자', '강간당한 여자', '파트너의 섹스 판타지를 거부한 여자', '17세 소녀'는 없다.

여성을 '대상 또는 객체로 보는 시선의 결정체는 이미 언론에 많이 인용 보도된 아래의 문단이다. 남성은 술과 함께 '여자'를 향유하는 주체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여성은?

■ 술 여자 그리고 에로티시즘(중제) / 남자의 세계에서는 술이 있는 곳에 여자가 있다. 술과 여자는 분리할 수 없는 보완재다. 여자 없는 술은 만병의 원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내 혼자 마시는 술은 자신의 파괴로 이어지고, 사내들만의 폭음은 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윗세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이다. "술자리에는 반드시 여자가 있어야 한다. 정 없으면 장모라도 곁에 있어야 한다." 여성은 술의 필수적 동반자다. 이는 만국에 공통된 음주 문화다. 여성이 술꾼들을 잘 다루기 때문이다. 진지한 이야기든 실없는 이야기든 여성은 사내들의 사연을 잘 들어주고 반응해 준다. 왜 사내들이 술집 마담에게 아내나 자신의 비밀을 쉽게 털어놓는 것일까?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 세대 사내들 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섹스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밝은 곳에서는 전혀 욕망이 일지 않는 사내도 많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고, 오랫동안 몸에 배인 습관이 됐다.

문제는 또 있다. 여성 차별과 관련해, 최근까지 한국 사회에서 나름의 긍정적 변화가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소한 현재까지는 여성이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가모장제'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한다거나, 마치 남성이 약자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엄존하는 가부장제 체제를 애써 외면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들음 직하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서술들이 이런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가모장제 시대가 열리다(중제) / 중산층이 서서히 '가모장제'로 바뀌고 있다. 직장에서 일하는 엄마와 집 안에서 일하는 아빠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낯설지 않은 일상적 모습이 돼가고 있다. 여자들이 사회경제 질서를 재편했다.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의 경제는 여성이 규칙을 만들고 남성이 따라잡는 흐름이 돼가고 있다.

■ 2016년 봄에 일어난 일이다.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가 제작한 여성주의 티셔츠가 널리 유포됐다. '여성은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슬로건이 적혀 있었다. 페이스북 측이 '메갈리아2', '메갈리아3' 등 여성주의 페이지를 일방적으로 폐쇄한 데 대한 항의 프로젝트였다. 아마도 남성우월주의자들의 압력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이 들었던 것 같다. 결과는 메갈리아 여성 군단의 대성공이었다.

아내를 잃는 것은 한국의 중년 사내에게는 커다란 비극이다. 남자들은 자신을 보호하는 능력이 취약하다. (중략) 부양할 자녀가 딸린 중년 남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혼한 사내는 심리적 부담 또한 크다. 드물게 사회적 지위와 재력이 든든한 사내에게는 제2의 인생을 설계할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비극이다. 그것은 속절없이 한물 간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메갈리아 사태'가 '여성 군단의 대성공'으로 마무리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현실에서의 승패는 그렇지 못했다. 또 중년 부부의 이혼이 남녀 중 어느 쪽에 더 '치명적'인 영향을 가져오는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혹시라도 이렇게 미리 겁을 줘서, 상대적으로 경제적 강자인 중년 남성들이 '아내를 버리'지 못하게 계도하려는 것이 서술 의도였다면 모를까, 남자들이 여성에 비해 '취약하다'는 묘사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또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논리를, 설사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서라고 할지라도 그대로 차용한 부분은 매우 우려스럽다. 서술된 맥락을 봐서는 그것이 비판을 위해 차용된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이를테면 바로 아래에 인용된 서술은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떠도는 '김치녀'에 대한 비난과 내용상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두 문단 역시 여성혐오의 혐의를 거두기 어렵다.

■ 모든 남자는 소모품이다(중제) / 모든 남자는 소모품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원리는 마찬가지다. 암컷에게 수컷은 종족 번식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소모품인 남자가 여자를 이길 방법은 없을까? 이것은 인류의 역사적 과제였다. 정치, 경제, 종교, 전쟁, 예술, 법, 건축, 문학 등 모든 분야에서 남성이 주도한 역사는 모성에 대항하는 반역의 역사였다. 반역은 성공했다. 이는 전쟁과 가부장제 덕분이었다. 전쟁이 뒷전으로 물러나고 평화의 문화가 일상에 정착되면 여성의 입지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모든 여자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되면 남자는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대다수 공장 노동자들이 로봇으로 대체되는 날이 오면 여자들은 더욱 당당해질 것이다. 그러면 다수의 남자들은 전쟁을 갈구할지 모른다. (중략) 여성의 입지가 넓어진 현대 사회에서는 여자들이 원하는 것이 더욱 복잡해 보인다. 일본 여성이 원하는 편안하고 소통 잘 하는 남자, 유럽 여자들이 원하는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남자, 미국 여자들이 원하는 동등하게 존중해 주는 남자…. 그런데 한국 여자들은 이 모두를 함께 원한다. 어떤 여자는 '나를 재미있게 해주는 남자'를 이상형으로 꼽고는, 여기에 더해 명품 가방을 원한다. 이래저래 한국 남자들의 입장은 더욱 딱하고 서글프다. (중략) 한국의 젊은 남자는 힘들다. 가부장제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세대, 가족에 대한 무한 책임을 지지만 그에 따르는 권리는 없다. 이제 가부장제는 해체되고, 집안의 권력은 구성원 모두에게 분산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남자들이 더욱 결혼 생활을 고통스러워한다. 새 세대는 아버지 세대의 짐을 훨훨 벗어던져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도 가족도 살 수 있다.

■ 대부분의 여자는 타고난 얼굴로는 자신을 표현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느낀다. 여자의 화장은 인류사에 오랜 습속이다. 비록 아침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화장은 뺄 수 없다는 여성이 많다. 칠을 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단순한 화장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때로는 얼굴의 일부를 깎아내어 원형을 개조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오래전부터 한국은 세계 제일의 성형국가가 됐다. 우리나라 영화나 TV에 등장하는 한국 여성은 모두 쌍꺼풀눈이다. 언제부터인가 '생얼'의 여자는 희귀동물로 분류된다는 냉소가 따른다.

■ 페미니스트를 혐오하는 사람 중에는 이런 여성을 예로 들어 페미니스트 전체를 비하하기도 한다. 이른바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은 남자에게 인기가 없기 때문에 자격지심에서 그런 투쟁을 한다고 말한다. 반박할 일고의 가치도 없는 편견이지만, 문제는 이런 편견을 가진 사내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여권운동의 전면에 나선 미모의 여배우들도 더러 있지만, 그 숫자나 비율은 남자들의 편견을 잠재울 만큼 높지 않다. 대부분의 미녀들은 아름다움을 자산으로 이용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저자는 여성이 화장을 하는 이유를 여성이 스스로 "타고난 얼굴로는 자신을 표현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것에서 찾는다. 여성에게 화장을 강요하는 사회 구조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의 의지에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독해될 소지가 충분히 있다. 또 그 아래 인용된 문단은 "반박할 가치도 없는 일고의 편견이다."로 끝났어야 마땅하다. 페미니스트 가운데 "미모"를 갖춘 여성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셈하는 이유는 헤아리기 어렵다. "미녀들은 아름다움을 자산으로 이용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라거나, "미모를 큰 재산으로 삼아 남성의 지배체제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내세우는 여자들도 많다"와 같은 서술도 '지배 체제'가 아니라 그 체제에 종속된 여성들을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성의 권리에 대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남성이 (시혜적으로) 인정해 줘야 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도 엿보인다.

■ 대부분의 여자들은 릴리스와 이브의 공존을 갈망한다. 그리고 남자들도 그 정도는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하여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서로 동등하다는 의식을 가지려 애쓴다. (…) 우리 사회에도 은하선 같은 현대판 릴리스들이 양산되고 있다. 굳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찬양할 바는 못 되더라도 크게 눈살 찌푸릴 일도 아니다. 여성의 성적 자각과 자율적 행동을 주장하는 것은 양성평등의 철학과 이념에서 비춰볼 때 당연한 일이다. 서울 시내 한 대학의 남학생 단체 카톡방에서 동료 여학생들을 두고 벌인 성적 잡담이 공개돼 물의를 일으켰다. 남성 내부자가 정보를 제공했거나 흘렸을 것이다. "동료 여학생은 몸만 가진 존재, 성욕의 대상으로 단순화돼 있다." 여성 네티즌들의 강한 비판이 일었다. 각 대학의 남학생 단체 카톡방에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신세대 남자는 구세대와는 달라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 1992년에 소설가 이문열이 <선택>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펴냈다. (중략) 책에는 주인공 화자의 입을 통해 전통 윤리와 문화에 대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그릇된 인식을 비판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 강하게 일고 있던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한 많은 남성들의 은근한 불만을 대변한 측면도 있다. 소설의 출판을 계기로 고루한 남성 대 현대적인 여성의 대결이 벌어졌다. 작가 세대의 남성들은 이문열의 작품에서 은근한 희열을 느꼈고, 여성운동가들은 조직적인 작가 반대 운동을 벌여 이문열 작품의 장례식을 여는 소동을 벌였다.

■ 결혼생활에서 성공한 여자들은 대부분 남편에게 요구하던 이상적인 로맨스를 의식적으로 바꾼 사람들이다. 너무 오랫동안 이상적인 로맨스에 매달리는 여자들은 불행한 결말을 맞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생기고 남자의 부양능력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깨달은 여자는 결혼 초기에 걸었던 로맨스를 포기한다.

은하선 씨처럼 자신의 욕망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여성은 왜 "찬양할 바는 못 되"는가? 왜 "크게 눈살 찌푸릴 일도 아니"라는 기묘한 '칭찬'을 받아야 하는가? 왜 여성 운동가들이 벌인 <아가>와 <선택>의 장례식이 "소동을 벌인" 것으로 묘사돼야 하는가? 왜 여성은 남성에게 "로맨스를 요구"하다가 "부양 능력이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 정도의 존재인가?

이런 표현 차원의 문제는 독자들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미묘한 뉘앙스 차이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뉘앙스 역시 성적 감수성의 차원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아마도 저자인 안 내정자 본인 역시 이런 주장에 적극 동의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동성 결혼에 대한 단락에서, 판결문에 담긴 '무릇'이라는 하나의 부사어에 담긴 대법원의 오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이 문단에 나오는 서울서부지법 판결문의 내용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단순히 '결론(주문)'이 아니라 '이유(논거)'가 중요하다는 이 칼럼의 논지에 힘을 싣는 것이기도 하다.

■ 두 남자는 이듬해 5월 21일 '부부의 날'을 계기로 법정투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법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대법원은 '혼인은 무릇 남녀 간의 육체적 정신적 결함으로 성립되는 것'이라는 입장을 되풀이해 천명한 바 있다. 대법원이 판결문에서 강조한 '무릇'이라는 단어에는 역사적 당위와 국민적 상식이라는 사법적 확신이 담겨 있다. (…) 2016년 5월 25일, 서울 서부지방법원은 예상대로 김조광수 김승환의 신청을 각하했다. 그러나 판결문에는 세계적으로 동성혼의 합법화 추세가 현저하고, 시대의 변화가 가족 형태와 혼인 제도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 동성혼이 법적으로 승인받지 못하면 부양, 재산 분할, 유족 연금, 의료보험, 상속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법의 역할이 소수자라 할지라도 그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는 데 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그러나 판결문은 '별도의 입법 조치가 없는 한 현행법의 해석으로는 동성 간의 혼인을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맺었다. 새로운 시대정신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구체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 그나마 '무릇'을 내세운 대법원의 확신과는 달리 하급법원은 현재의 제도가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 의미가 있다.

만약 이 책의 저자가 단순한 작가이거나 지식인의 처지에 머문다면, 이 책의 내용은 이 글과 같은 '서평', 즉 평론이나 비평의 영역에서 논쟁할 일로 그치는 것이 마땅하다. 안 내정자가 최초 논란이 일었을 때 "독자들이 종합적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이런 영역에서 유효한 말이다. 하지만 '이 책에 담긴 것과 같은 인식을 가진 이가 공직 후보자로서 적격한가' 하는 문제는 엄연히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 서두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런 '틀린 전제'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바른 결론'을 갖고 있다면 당장 정책 수립이나 집행에 있어 현존하는 위험이 있지는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이런 '틀린 전제'를 고수하는 이가 국무위원으로 봉직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명백하게 노정된 불안 요소임은 명확하다.

혹자들은 '부적절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책의 결론은 성차별을 해소하자는 쪽이니 큰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어떤 공직 후보자가 '권력의 본성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다', '국가 기관은 태생적으로 시민을 감시하고 사찰하고 고문하려는 속성을 가진다'라는 '전제'를 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민주화도 됐고 하니, 국격을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사찰이나 고문은 하면 안 되겠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치자. 이 사람을 우리는 공직에 적합한 인사로 평가해야 할까?

덧. 성매매에 대한 안경환의 '이해적' 시선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저자가 성매매가 범죄이며 처벌받아야 한다는 확고한 의견을 책 곳곳에서 피력하면서도, 성매매에 대해 동정적 내지 온정적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인식 역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적 '데이트' 문화가 없는 곳에서는 성매매가 횡행할 것이라는 예단, 성매매를 "사내의 염원"으로 묘사한 표현, '원조교제'에 대한 발생론적 접근, 한 판사의 성매매 행위가 "변명될 리 없"는 "위법과 탈선"이라면서도 그 원인을 "사내의 생체 리듬"과 "아내의 무관심"에서 찾는 듯한 접근법은, 독자에게 '성매매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거나 '성매매를 금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독후감을 안겨줄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고 위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음은 해당 부분의 내용을 발췌한 것.

데이트 섹스가 금기시된 곳에는 은밀한 성매매가 성행하기 마련이다. '성매매는 사회적 행복 총량을 늘리는 필요선'이다. 한 성매매 여성이 당당하게 선언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은 탄생할 때부터 매춘을 법으로 금지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공창은 폐지됐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성매매는 일상이었고, 홍등가 없는 도시가 없었다. 성을 사는 남자는 처벌하지 않고 파는 여성만 처벌했다. (…) 2004년 3월,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됐다. 과거와는 달리 성을 사는 사람도 처벌한다. 적어도 법적 책임의 면에서는 성차별이 없어진 것이다. (…) 그러나 현실은 변함없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성도 상품이다. 성노동이 상품으로 시장에 투입되면 언제나 사는 쪽이 주도하게 되고, 착취가 일어난다.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성매매는 노동자의 절대 다수인 여성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악의 제도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성매매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남성 지배 체제라고나 할까?

■ 남자가 성매매를 하는 이유(중제) / 젊은 여자는 정신병자만 아니라면 거지가 없다는 말이 있다. 구걸하느니 당당하게 매춘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을 돈으로 사려는 사내는 지천으로 깔려 있다.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에는 매춘금지법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도덕적 이상이며 얼마나 무모하고 무익한 정치적 시도인지를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 세속의 법은 결코 시장의 원리와 인간의 본능을 정복하지 못한다. 육체의 본능은 이성의 통제에 저항하고 거부한다. 자신의 몸을 팔려는 여성이 있고, 성적 본능을 제어하기 힘든 사내가 있는 한 매춘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어떤 고결한 종교와 윤리적 이상을 내세워도, 그리고 아무리 엄한 처벌을 내려도 매춘을 근절할 수는 없다. 인간의 몸이 재화로 거래된 역사는 길다. 노예제도가 대표적 사례다. 젊은 여성의 몸에는 생명의 샘이 솟는다. 그 샘물에 몸을 담아 거듭 탄생하고자 하는 것이 사내의 염원이다.

■ 사랑도 권력관계다. 누가 더 많이 사랑하느냐에 따라 갑을관계가 결정된다. 대개는 젊고 예쁜 여자가 갑이고, 나이든 남자가 을이다. 이 관계를 대등하게 만들거나 역전시키는 방법은 돈이다. 중년 남자가 사랑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돈과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남자가 돈을 쥐고 있는 한 '원조교제'가 있다. 원조교제는 철저한 자본주의 윤리와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남녀관계다.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먼저 일종의 사회 제도로 공인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20세기 초중반에 미국의 대중잡지가 창조해 낸 환상이기도 하다. 남녀의 나이와 사회적 지위에 현격한 차리가 난다. 키도 가슴도 큰 쇼걸을 옆에 거느린 키 작고 배가 불룩 나온 중년 남자의 모습은 '돈과 섹스, 지갑과 가슴의 결합'이라는 도식을 만들어 냈다.
미국에서 현대 여성의 아름다움에 관한 이상을 묘사할 때 '큰 가슴'과 '비싸다'는 두 단어는 의미가 연결돼 있다. 사내는 고액의 비용을 기꺼이 감당함으로써 자본의 권력을 과시한다. (중략) 여자와 자동차를 동일시하는 태도. 양자 모두 값비싼 물건이다. 둘 다 스타일과 모델이 다양하고, 운전을 통해 성능을 확인할 수 있다. 남자가 데리고 다니는 여성은 운전하는 자동차처럼 남자의 취향과 재산을 공적으로 규정한다. 미국 남자에게 자신의 자동차를 남에게 운전하도록 맡기는 것은 마치 아내를 빌려주듯이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관념도 이렇게 형성됐다.

■ 서초동의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던 한 엘리트 판사에게 큰일이 벌어졌다. 야근을 앞두고 인근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연일 격무에 심신이 지쳤다. 우울했다. 술 한 잔을 곁들였다. 심신의 긴장이 약간 풀어졌다. 그의 흐릿한 눈동자 속으로 분홍색 전단지가 스며들었다. 무심코 거기 적힌 번호를 눌렀다. 젊은 여성이 더없이 상냥한 목소리로 받았다. 함께 모텔에 들었다. 그런데 운이 나빴다. 경찰의 현장 단속에 걸린 것이다. 성매매특별법 위반이다. 이 법은 성을 파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는 사람도 처벌한다.
성욕이란 것은 모든 사내에게 숨은 절실한 욕구다. 살인, 절도, 강도와 같은 범죄는 누구나 쉽게 저지르지 않는다. 비록 음주 후 인사불성 상태에서도 이런 행위는 좀체 변하지 않는다. 오랜 학습을 통해 잠재의식 속에 확실한 금기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행위는 다르다. 남자의 성은 금기가 아니다. 오히려 성행위를 조장하는 사회문화다. 다만 상시 대면하는 특정인만을 상대로 반복하고, 그 사람과 습관적으로 성행위를 해야 한다. 그것이 일부일처제의 기본 규범이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사내의 생체 리듬에 어긋난다. 오로지 윤리와 도덕이라는 인위적인 의식의 조작을 통해 본능을 제어해야만 한다. 그래서 사내는 언제나 용감한 선택과 부자연스러운 자제 사이에서 고민해야 한다.
한때 판검사에게 으레 주어졌던 작은 일탈에 대한 면죄부는 옛날 이야기가 됐다. (중략) 한 유능한 법관의, 이룬 것만큼 장래도 촉망되던 법조 인생은 전단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누른 순간 사실상 끝장이 났다. 그 불행한 판사가 처했던 구체적 사정과 사건의 세부적 정황은 잘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전형적인 시나리오를 생각하면 일말의 동정을 금할 수 없다. (…) 문제된 법관의 연령이라면 대개 결혼한 지 15년 내지 20년이다. 아내는 한국의 어머니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자녀 교육에 몰입한 나머지 남편의 잠자리 보살핌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답답한 사정이 위법과 탈선의 변명이 될 리는 없다. 다만 남자의 성욕이란 때로는 어이없이 악마의 유혹에 굴복한다. 이는 사내의 치명적 약점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곽재훈

프레시안 정치팀 기자입니다. 국제·외교안보분야를 거쳤습니다. 민주주의, 페미니즘, 평화만들기가 관심사입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