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농사 아닌, 생명이 깃든 농사를 해야 한다

[귀농통문] 씨앗 받는 남자, 이영동

전남 장흥에는 40년 가까이 토종씨앗을 받고 지켜오는 이영동 농부가 산다. 1953년생이니 올해 예순다섯. 스무서너 살 때부터 지금까지 반생에 가까운 세월을 한결같이 우리 씨앗을 받아오고 있다. 씨앗은 대체로 할머니, 어머니들의 손길을 거쳐 갈무리되고 이어져오는 터라, 씨앗 받는 남자로 살아온 내력이 궁금하여, 남도 끝자락에 있는 농부의 집으로 찾아들었다.

용산면 운주마을 한적한 곳에 나지막하게 자리잡은 집이 소박하다. 입춘을 갓 넘긴 2월 초순, 맵싸한 바람이 마당을 떠도는데 쨍한 햇살 속에 봄이 성큼 와 있다. 마당 한쪽에서 겨울을 난 마늘, 양파 들이 싹을 올리고 그 곁에는 두둑하니 흙을 덮고 토종 속노랑감자가 벌써 땅속에 들어앉았다(보름도 전에 심었다 한다!). 따뜻한 남쪽 나라, 남녘은 남녘이다.

안방에 들어서니 부지런한 주인 손길에 밭으로 나갈 채비를 마친 씨앗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먼길 온 객들 주려고 난로에 따끈하게 구워 놓은 흰물고구마를 내오신다. 적당히 달고 담백한, 어릴 적 먹던 옛날 고구마 맛이다. 고구마 한입 베어 물고, 씨앗들 수런거리는 듯한 소리 들으며 토종씨앗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남자가 되야갖고

'남자가 되야갖고, 씨앗이나 지키고 있냐'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남자가 큰일을 해야제 쪼끄만 씨앗에 얽매여있냐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마는 나는 생각이 달라요. 어머니 영향이 컸지요.

나는 살면서 도시 생활을 여섯 달밖에 안 했어요. 광주에서 넉 달, 서울에서 두 달. 우리 집이 형제가 많은디 나랑 밑에 동생만 초등학교를 나왔어요. 그런께 형들이, '너는 초등학교 나왔응게 도시로 가서 출세해'라고 막 내보내요. 갔는디 서울에서 도저히 각박해서 살 수가 없드라고요. 초등학교 나와서 도시에서 뭔 힘을 쓰겄어요. 어머니가 농사지어 해주시던 맛이 그렇게 그립더라고요. 여름이믄 쌀이 부족헌께 어머니가 울타리콩을 자주 밥에 넣어 해주셨어요. 또 참외를 여러 가지 색깔로 많이 심었는데 그 향기가 생각나고, 밀 농사지어서 만들어 주시던 개떡이랑 같이 만들어 먹던 두부…. 어머니랑 농사짓던 것이 그립고 어머니랑 해 먹던 음식 맛이 그리워, '이건 아니다'하고 내려와 부렀어요.

그런데 어쩌다가 돈 관계로, 남의 돈을 갚지 못해 감옥살이를 하게 됐어요. 그것이 토종씨앗에 대한 전환점이 됐달까, 토종씨앗에 깊이 빠져든 계기가 됐어요. 헌데 감옥살이를 어머니랑 같이했어요. 어머니는 돈을 얻은 죄, 나는 쓴 죄로. 그러니까 제가 어머니를 감옥살이시킨 거지요. 한겨울에 잽혀 갔는데, 겁나게 춥고 배가 고팠어요.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유치장에서 어머니는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서 간수 몰래 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어 나를 줘요. 당신은 마룻바닥에 맨발로 웅크리고 계심서. 그리고 꽁보리 주먹밥을 째깐씩 주는데, 어머니 몫으로 나온 밥을 창살 너머로 옆방에 있는 나를 줬어요.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어요.

저는 속없이 받아먹었어요. 그때 내가 스물두어 살 때라 한창 먹을 때고 내가 배가 고프니까 어머니 생각도 안 했어요. 지금만 해도 '어머니 잡수세요' 했을 것을. 그때는 속이 없어서 생각 없이 먹었다니까요. 어머니 생각도 않고. 봄이 되니까 어머니는 감옥에서 저를 만날 때마다 '씨앗을 숨궈야 할 건디' 하면서 애가 타셨어요.

두 계절이 지나고 나왔어요. 농사를 지어야는데 농사일이 손에 안 잡혀요. 나도 모르게 사람이 없는 곳으로, 산골짜기로 발길이 가드라고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산 중턱 바위 밑에 굴이 있는데 거기로 들어가 살았어요. 어머니가 보름에 한 번꼴로 오셨어요. 삼십 리 길을 자식 양식 갖다 주실라고. 나는 나 힘든 것만 생각했죠. 어머니의 마음 병은 생각도 못 했어요. 말썽을 많이 부린 거지요. 토굴에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는데, 스무 살이 되도록 남 사는 대로 세상을 그럭저럭 살았드라고요, 내가. '산에 들에 핀 꽃들은 사람들이 안 봐주는데 왜 여기서 이렇게 이쁘게 피어 있을까.' '이 뜨거운 여름에 바위손은 비 오기를 기다리며 바위에 웅크리고 있구나.' 식물들이 다 자기 할 일들을 하고 있드라고요.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돈, 돈을 모르고 살 수는 없을까.' '소는 풀만 먹는 데도 힘이 세구나.' '자연 앞에서만이 나는 평등하다.' 그런 생각들을 했어요. 사물을 보는 관점이 그 전하고는 아주 달라졌어요.

그런데 2년 뒤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예요. 징역살이 후유증으로. 그때까지 나는 나 힘든 것만 생각했지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실지 생각을 못 했어요. 너무도 큰 불효를 한 거죠. 두 해 만에 토굴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상을 치르고 봄이 되어 골방에 들어갔어요.

어머니가 씨앗들을 쥐가 안 먹게 오가리, 종재기, 보새기, 옹기그릇에 담아놨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다 좀이 먹고 썩어서 못 쓰게 되었더라고요. 어머니도 편찮으신께 못 심어 버린 거예요.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한나절을 울었어요. 좀이 먹어버린 씨앗 한 줌 쥐고서. 울다가 '아, 이것이 어머니 유산이구나.' 깨달았어요. 우리한테 그렇게 맛있게 해주시던 씨앗들, 옥수수 감자 고구마 쪄서 같이 먹고 냇가에서 참외 씻어 같이 먹던 생각, 뻐꾸기 소리 들음서 같이 밭매던 순간들이 생각나고. 우리를 먹여 살린 이 씨앗들을 어머니의 유산이라 생각하고 '이 씨앗들을 꼭 찾아 놔야겄다. 어머니가 정말 아끼시던 씨앗들인데. 그래야 어머니 앞에서 큰소리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때부터 어머니 씨앗 찾기에 나섰지요.

▲ 시계 방향 순으로 피마자밤콩, 울타리콩, 앉은뱅이강낭콩. ⓒ프레시안

어머니 씨앗을 찾으러

어머니 씨앗을 찾으러 5년 동안 남도 지방을 돌아다녔어요. 남의집살이도 함서. 돈 벌라고 댕긴 것이 아니고 씨앗을 찾으러요. 남의집살이 하면서도 한 귀퉁이에 심고 옮겨 다니면서도 심었어요. 산기슭 밭을 돌아다니다가 간첩으로 오인도 받았어요. 젊은 사람이 조그만 가방 메고 돌아댕기니 수상하다고 누가 신고를 한 거여요. 크게 챙피를 당한 일도 있어요. 한 시장에서 뻥튀기 기계 앞에 뻥튀기할라고 줄 선 그릇들이 있는디, 피마자밤콩이 눈에 번쩍 들어오드라고요. 예전에 허드렛날이라고 있었어요. 음력 2월 초하루로 농사 시작 전에 맘 편히 노는 날인데 일꾼들한테 큰 명절이었지요. 허드렛날이면 어머니가 피마자밤콩을 많이 볶아주셔서 우리는 주머니에 두둑 허니 넣고 연날리기하면서 하룻내 먹고 놀았어요. 어머니가 많이 해주시던 콩, 그렇게 찾던 콩을 거기서 본 거여요. 나도 모르게 손이 가서 두알을 집었어요. 시장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욕심이 생겼어요. '두 알로 발아를 못 시키면 또 몇십 년을 찾으러 댕겨야 하는데.' 그래서 다시 가서 두알을 더 집는데 누가 등을 '탁' 쳐요. 주인한테 걸렸지요. 사람들 앞에서 막 면박을 주고 챙피를 주드라고요. 젊은 사람이 뭐 하는 거냐고. 뭐 어쩌겄어요. 얼굴이 빨개져가지고 계속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만 했지요. 호주머니에 든 네 알 안 빼앗길라고 어찌어찌 모면하고 도망치듯이 버스 타고 돌아오는데, 그날 진짜 기분은 좋았어요. 어머니를 만난 것처럼 기쁘고, 하늘을 날 것만 같았어요. 그렇게 좋았어요. 그때 그 콩이 지금은 귀농한 사람들한테도 많이 퍼졌죠.

지금은 여기 장흥에 귀농한 농가들이 함께 '남도 토종종자 나눔회'라고해서 토종씨앗 나눔을 해요. 회칙도 없고 회비 같은 것도 없이 걍 같이 토종씨앗의 가치를 나누고 전할라고 만들었어요. '우리가 옛날에 먹던 귀하고 향수 어린, 바른 먹을거리를 지켜야겄구나' 그런 책임감, 의무감이 들고, 우리 씨앗은 한번 잃으면 찾을 수도 없고 돈 주고 살 수도 없는 귀한 먹을거리잖아요. 농부들의 마지막 자존심이고요. 귀농한 사람들이 토종에 관심이 많고 많이 도와주고 힘도 돼주고 그러죠. 일반 농민들은 정부에서 내주는 씨앗, 약으로 소독한 씨앗으로 농사를 지어요. 토종은 잘고 수확량이 적어서 돈이 안 된다고 안 심어요. 아무리 가치가 있는 것이어도 돈이 안 되믄 귀중허게 생각을 안 허죠. 바른 먹을거리 농사가 아니라 돈 농사가 되는 현실이 안타깝지요.

토종은 돈이 안 된다

'토종은 돈이 안 된다. 그러나 맛있다.' 사람들한테 나는 그렇게 말해요. 토종은 절대 돈은 안 된다고. 요새는 토종에 관심이 커져서 씨앗을 얻으러 많이들 와요. 처음엔 씨앗만 드렸는디 나중에 알아보니, 열 분 가운데 한 분이나 심고 안 심은 사람이 많드라고요. 씨앗에 욕심내는 사람들, 벼를 한 가마 주라는 사람도 있었는디, 그런 사람들은 실패를 해요. 돈이 될 줄 알고 했다가, 이런 것을 씨앗으로 줬냐고, 원망이 들어오드라고요. 이제는 씨앗을 쪼끔씩 줄라고 해요. 1년 해보고 다음에 해보라고. 우리 토종은 바른 먹을거리는 되지만 돈은 안 되니까. 씨앗은 1000배든 100배든 불어나니까. 씨앗은 몇 알만 갖고도 할 수 있거든요. 이제는 씨앗만 주지 말고 이야기를 많이 해줄라고 해요. 어떤 분들은 '안 심고 해를 넘겨서 버려 부렀어요'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 소리가 젤 속상해요. 나는 40년 동안 그 씨앗을 모태고 찾아다니고 애를 썼는디, 실망이 크죠. 씨앗은 자꾸 심어야 퍼지고 살아남을 건디. 씨앗은 살아 있는 생명체여요. 어디든지 심어서 번식시켜야 하지요. 이제는 나도 꾀가 생겨서 사람들을 봐가면서 줄라고 해요, 허허. 또 씨앗만 줘서는 제대로 안 심은께 먹는 법, 키우는 법, 저장법도 다 가르쳐주면서 줘야 돼요. 긍께 내가 할 일이 많고 바빠요. 가을에는 여그 방바닥이 꽉 차게 씨앗들을 벌려 놓고 추리고 정신이 없지요.

토종은 알이 잘아서 수확량이 적어요. 야물고 단단하니 맛은 좋지만요. 수확량만 많이 나오게 개량한 신품종이랑 대면 그렇지요. 한번은 도시에서 귀농하실 분들한테 농사 얘기 좀 해주라고 해서 차 갈아타면서 고생해서 갔는디, 사람들이 자꼬 그런 것만 물어요. '어떤 작물을 지으면 돈을 법니까? 귀농하면 뭔 혜택을 줍니까?' 그런 것만 물어서 나는 '그런 건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토종씨앗이니, 나는 그 얘기만 할란다'고 했죠. 그럼서 내가 그랬어요. '우리 토종은 돈이 안 된다. 하지만 맛이 좋고 몸에도 좋은 바른 먹을거리이니, 음식을 만들어서 가공을 하면 돈을 벌 것이다. 음식 솜씨가 어지간만 하면 재료가 좋으니 돈을 벌 것'이라고요. 상추도 그래요, 우리 토종 상추는 한입에 쏙 안 들어와요. 길고 커요. 근데 확실히 더 향도 좋고 하얀 액도 많이 나오고 맛이 있어요. 토종이 돈이 될라믄 시간이 많이 걸리겄지요. 시대가 바뀌어서 값어치가 평준화되면 될랑가요.

할머니 농심이라고

할머니 농심(農心)이라고, 그 얘기를 좀 할게요. 옛날에는 씨앗을 절대 사고팔지 않았어요. 종자는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할머니들한테 배웠어요. 마지막 남은 농심이지요. 언젠가 귀농인들이 씨앗 나눔을 하는디 모금함을 만들어 놓고 자룟값, 찻값이라도 모은다고 하길래 내가 그것을 없애 부렀어요. '씨앗은 파는 것이 아니'라고. 씨앗은 우리 자존심이고 돈 이상의 것이거든요. 돈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인데, 돈을 넣으면 돈하고 바꿔버린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젠가 장흥시장에서 한 할머니가 앉은뱅이강낭콩을 꼬투리째 갖고 나와 계셔요. 나한테 없는 종자길래 종자로 쓸라고 몇 꼬타리를 집어 들고 1000원을 드렸어요. 그랬더니 막 쫓아와요. 내가 뭘 잘못했는가 하고 돌아보니, 종자 할라믄 두 꼬타리는 너무 적다고 몇 꼬타리 더 주시면서 먹는 방법을 알려주시고, 돈은 절대 안 받는다고 땡겨부러요. 종자로 주는 것은 돈을 안 받는 거라고. '나눔'이란 걸 할머니한테 배웠어요. 나중에 나도 가만 생각하니까 돈 주고 산 적이 없드라고요, 발품을 들여서 구했지. 그런데 그 할머니는 시장에 팔러 나오셨길래 돈을 드렸던 거죠. 그 뒤로 나도 남에게 그렇게 했어요. 할머니한테 배운 대로. 토종종자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들이 심고 가꾸고 피땀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고, 마지막 남은 농심이고 자존심이다 그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다 씨앗의 주인이 되어 이웃과 나누어 심고 보존하고 후대에 잘 물려줘야 해요.

저는 그렇게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스무 가지 남짓한 토종씨앗이 토대가 돼서 지금은 백오십 가지 정도 씨앗을 심고 있어요. 벼가 한 30가지, 밭작물이 한 120가지 돼요. 여기 남도 지방 토종을 주로 지어요.

같은 씨앗이라도 여그서는 되는 작물이 강원도에서는 안 되고, 강원도에서 되는 작물이 여그서는 잘 안 되고 그래요.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것이죠. 농사는 식구들 먹을 것 짓고 논도 한 필지하고 주로 씨앗 보존하는 농사를 짓고요. 그래서 집사람한테 많이 얻어들어요. 수익 내는 일반 농사지어도 살기 힘든데, 150가지 씨앗농사한다고. 그래도 지금은 사람들이 씨앗에 관심 갖고 찾아오고 하니까 좀 이해를 해줘요.

자연을 닮은 농사가 답이다

'자연을 닮은 농사가 답이다.' 이제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자연이 요샛말로 제 멘토더라고요. 할머니들이 사이짓기, 돌려짓기를 하잖아요. 막 섞어 심지요. 제가 산에 가서 자연상태에서 땅 한 평 넓이를 재고 세어본 적이 있는데, 식물이 한 서른 종류가 사는 곳도 있어요. 봄에 일찍 나와서 가을에 일찍 휴면기에 들어간 것들, 넝쿨성, 키가 작은 작물, 이런 것들이 다 함께 살고 있어요. 다 자기 이유대로 공생하면서 건강하게 살고 있드라고요. '농법도 그렇게 하면 되는구나. 우리 토종농산물도 할머니들이 그래서 그렇게 심었구나. 좁은 농토지만 콩 심고 옥수수 심고 넝쿨콩 올라가고 밑에는 호박 심고 가지 심고. 아, 이것이 생태계였구나. 그래야 건강하지. 한 가지만 심으면 병에 걸리는구나. 할머니들 심은 방법이 맞구나.' 그런 거지요. 좁은 땅이지만 자라는 시기가 다 다르니 양분도 같이 안 빨아먹고, 뿌리를 파 보니까 뿌리가 깊이 뻗는 것, 얕게 뻗는 것이 있어요. 그러니 양분 빨아먹는 것이 다르겠구나. 할머니 농사법, 어머니 농사법이지요. 좁은 땅에서 사이에다 뭐 심고 다 크면 베어내고 다른 것 사이에 심고요. 예전에 제가 배나무 과수원을 해봤는데 병이 많이 심해요. 한 과수만 심으니 병이 심했어요. 다른 과수와 섞어 심으면 병이 덜 해요. 한 가지만 심으면 같은 시기에 같은 양분을 빨아묵어야한께 경쟁이 될 수밖에 없어요.

산에서 배울 것들이 너무 많드라고요. 인생도 그렇고 농법도 그렇고. 의문점이 생기면 저는 자연에서 답을 찾아요. 자연과 토종 농사에서 우리가 배울 것들이 너무나 많드라고요. 생명이 깃든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지금은 돈이 깃든 농사를 지어요. 지금 생각하면 저는 일찍 돈의 쓴맛을 알았기 때문에 돈 농사보다 가치 있는 농사를 해왔는지도 모르겄네요.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귀농통문

귀농통문은 1996년부터 발행되어 2017년 10월 현재 83호까지 발행된 전국귀농운동본부의 계간지입니다. 귀농과 생태적 삶을 위한 시대적 고민이 담긴 글, 귀농을 준비하고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농일기, 농사∙적정기술∙집짓기 등 농촌생활을 위해 익혀야 할 기술 등 귀농본부의 가치와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긴 따뜻한 글모음입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