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문 대통령이 5월 31일 미국 민주당의 딕 더빈 원내총무를 면담한 자리에서 한 발언은 이러한 전략적 모호성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소개한 문 대통령의 사드 발언은 아래와 같다.
"사드는 북핵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결정한 것이며, 저는 이것이 전임 정부의 결정이지만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해서 결코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민주적·절차적 정당성이 강력히 요구되고 있다.
우선 환경영향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국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지난 정부의 결정에서는 이 두 가지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는 이 절차적 정당성을 밟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미국이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제 사드와 관련한 나의 조치는 전적으로 국내적 조치이며, 기존의 결정을 바꾸려거나, 미국에 다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또, 지난 정부는 발표 직전까지 사드 배치를 우리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고, 배치 결정 직전까지도 '미국으로부터 요청이 없었으며, 협의도 없었고, 따라서 당연히 결정된 바도 없다'는 입장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드가 배치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 국민은 과연 사드가 북 미사일에 대해 효용성은 있는 것인지, 효용성이 있다면 비용분담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사드에 반대하는 중국과 러시아와의 외교 문제는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에 대해 정부로부터 충분히 설명 듣기를 원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문 대통령의 발언은 사드 배치를 추진하되 환경영향평가와 국회 논의 등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국이 양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사드 배치 추진을 전제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크나큰 우려와 실망을 자아내게 한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절차적 문제는 사드 문제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절차적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되어도 사드가 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거의 그대로 남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드의 북핵 방어의 효율성과 북핵 문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 한국의 미국 주도의 미사일 방어체제(MD)로의 편입 및 한미일 삼각동맹으로의 연결 가능성,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우려 자극 및 한중·한러 관계에 미치는 영향, 중국의 사드 보복 장기화 가능성, 한반도 및 동북아의 군비경쟁과 신냉전 격화 우려 등이 포함된다.
대한민국 국익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러한 문제들은 사드 배치의 절차적 문제가 해소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사드 문제를 절차적 문제로만 환원해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는 문재인 정부 스스로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프레임에 너무 강하게 갇혀 있고, 이에 따라 사드 배치 결정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면 동맹이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동맹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국익의 수단이다. 또한 비정상적으로 결정되고 추진된 사드 문제를 재협의하지 못할 정도로 한미동맹이 허약하지도 일방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더구나 정부 스스로 "문재인 정부는 촛불 혁명의 산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촛불에 담긴 염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드 철회 내지 유보다. '전략적 모호성'에서마저 후퇴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가 심사숙고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결코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절차적 문제를 따지고 바로잡는 것과 함께 '한-미-중 대화를 통해 상호 만족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보자'며 미국 정부를 설득할 때이다.
때마침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방미길에 올랐다. 정상회담 일정과 의제 논의가 핵심 목적이다. 정 실장은 이 기회에 사드 문제에 대한 한국 국민과 정부의 우려를 솔직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미정상회담에선 '사드 배치 재확인'이 아니라 최소한 '시간을 갖고 검토하자'는 합의가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