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 빠지면 내려와도 고생이니 운동 열심히해요

[조선계 블랙리스트를 아십니까 ⑥] 고공농성장 방문한 김진숙 지도위원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2명이 4월 11일 '블랙리스트' 폐지를 촉구하며 새벽 울산 동구 남목고개 고가도로 기둥에 올랐다. 이들은 앞서 9일 하청업체가 폐업되면서 해고됐다. 통상 하청업체가 폐업할 경우, 소속 하청 직원들은 다른 하청업체로 이직하는 식으로 고용이 승계된다. 하지만 이들 2명은 하청지회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고용이 승계되지 않았다. 일명 솎아내기를 당한 셈이다. <프레시안>에서는 현재 문제가 되는 조선계에 만연한 '블랙리스트'에 대해 살펴본다. 이 기획은 다음 스토리펀딩에서도 공동 연재된다.

(☞바로가기 : 스토리펀딩)

2011년 1월 6일. 새벽 3시. 한 여성노동자가 혼자 쇠사슬로 묶인 크레인 문손잡이를 절단기로 끊고 철재 사다리에 올랐다. 이미 오래 전 결심한 터였다. 부산 영도조선소에 위치한 85호 크레인이 그의 목적지. 한진중공업이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우리에게는 <소금꽃 나무>(후마니타스 펴냄)로 잘 알려진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의 이야기다.

그에게 85호 크레인은 사실 잊고 싶은 존재였으리라. 2003년 5월, 그의 동료인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 씨가 오른 곳이기도 하다. 김주익 씨는 회사의 대규모 구조조정과 손배가압류, 노조 간부 징계회부 등을 반대하며 홀로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가진 게 없는 자들이, 아무도 자기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을 때 선택하는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회사는 단 한 번도 교섭에 나오지 않았다. 막다른 길에 몰렸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크레인 난간에 스스로 목을 맸다.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가 하늘로 오른 지 129일 만인 2003년의 10월17일의 일이다.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

그가 남긴 유서의 마지막 구절이다.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을, 아니 지키지 말아야 할 약속을 그는 지키고야 말았다.

그곳에 김 지도위원이 또다시 올랐다. 김주익의 시대와 달랐으나 이유는 동일했다. 회사의 정리해고 중단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장장 309일 동안 그는 35미터 하늘 끝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 지난 29일 농성장을 방문한 김진숙 지도위원. ⓒ이한별

"150일 정도는 해야지 고공농성 했다 하죠"

그런 김진숙 지도위원 지난 29일 저녁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방문했다. 하청지회 노동자 두 명은 지난 4월 11일 '블랙리스트' 폐지를 촉구하며 새벽 울산 동구 남목고개 고가도로 기둥에 올랐다. 김 지도위원이 방문한 날은 이들이 하늘로 오른 지 50일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농성장을 방문한 김 지도위원은 하늘에 매달려 있는 두 노동자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선임자'로서 여러 조언(?)을 남겼다. 희망버스 없이 홀로 150일 동안 크레인을 지켜야 했던 일부터, 좁은 크레인에서 버티다보니 정작 자신의 근육이 다 빠져버려 고생했었다는 이야기까지...

농담 섞인 대화 속에는 염려와 배려가 묻어 있었다. 말이 조언이었지 힘을 북돋아주기 위한 격려였다.

"50일 정도 해서는 아직이죠. 150일 정도는 해야지 고공농성 했다고 하죠. 그때부터가 진짜죠."
"둘이 싸우진 않죠? 사이좋게 지내세요. 그래도 150일쯤 지나면 싸워요."
"근육이 빠지면 내려와서도 고생이니 거기서도 운동은 정말 열심히 하세요."

김 지도위원도 '희망버스'가 오기 전까지는 반년 넘게 홀로 크레인을 지켜야만 했다. 그 시간동안 무척 외롭고 힘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연대 오는 사람이 적다고 탓하지 말고 둘이 서로 힘주면서 이겨내세요. 많이 오면 힘나고 적게 오면 '우리를 잊었네‘ 하면서 마음 졸일 필요 없어요. 이런 것에 상관하지 말아요. 나도 150일이 지날 때까지 혼자였어요. 일희일비하지 말고 힘내서 싸워주길 바래요."

김 지도위원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는 조용히 농성장을 떠났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하얀 봉투가 놓여 있었다.

▲ 김 지도위원이 놓고 간 하얀 봉투. 여기에는 상당 금액이 들어 있었다. ⓒ이한별

"노동자들 고공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

김 지도위원은 지난 11일, '문 대통령에게 바란다'는 주제로 <한겨레>와 한 짤막 인터뷰에서 "노동자들은 굶지 않고, 죽지 않고, 고공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바랐다.

"노동자들이 일방적으로 정리해고 당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등 노동 현장에서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도 중요하다. 더는 노동자들이 높은 데 안 올라가도 되고, 단식한다고 굶지 않고, 자살하지 않는 그런 사회가 만들어져야 하지 않겠나."

노무현 정부 때의 김주익 씨도, 이명박 정부에서의 김진숙 지도위원도, 그리고 지금 고공농성 중인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도 모두 노동자가 노동자답게 사는 나라를 바라며 하늘로 올랐다. 이들이 바라는 노동자의 세상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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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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