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 보수 후보들은 한국전쟁 이후 최악의 안보 위기가 다가왔다고 경쟁적으로 말한다. 이러한 진단에 동의 여부를 떠나 홍준표, 유승민 후보에게 묻고 싶다. 정권을 잡았던 10년 동안 무엇을 했냐고 말이다. 지난 10년간 안보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왔다면, 집권 세력으로서 일말의 반성이라도 보여야 한다. 그런데 그 책임을 김대중-노무현 정부에게 돌린다. 이들 정부가 "북한에 퍼준 돈이 핵과 미사일로 돌아왔다"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는다.
김대중-노무현 시기에 북한에 지원했던 식량이 핵과 미사일로 둔갑할 수는 없다. 오히려 '대한민국'이라고 적힌 수많은 포대가 북한 전역으로 퍼지면서 북한 주민들의 민심을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것만큼 중요한 통일의 토대도 없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말로는 북한 인권과 통일을 외치면서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고자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경협은 대북 지원이 아니라 상업적 거래에 해당한다. 우리는 노동자에 지불하는 임금을 '지원'이라고 하지 않는다. 관광지에서 쓰는 돈도 '지원'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남북경협에 지출한 비용을 '대북 지원'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제 이러한 '가명(假名)'을 '정명(正名)'으로 바꿔야 한다. 더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남북경협으로 쓰인 돈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로 전용되었다는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사용된 대북 비용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경수로 사업이었다. 총 사업비 약 50억 달러의 70%를 한국이 부담키로 김영삼 정부 때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수로는 북미 간의 제네바 합의가 파기되면서 완공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경수로 사업비의 상당 부분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를 대북 '지원'에 합산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전용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는 것이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후보는 '주적론'을 들고 나와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고 있다. 이 당은 "주적을 주적으로 부르지 못하는 후보는 안 된다"며, 반문(反文) 3자 연대를 추진키로 했다. 한 마디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안보는 적개심이 아니라 애국심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국민 스스로가 내 나라를 목숨 걸고 지킬 가치가 있다고 여길 때, 안보는 튼튼해질 수 있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시기에 맹위를 떨치고 있는 말이 '헬조선', '탈조선'이다. 많은 국민들이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라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하여 안보의 가장 소중한 토대를 무너뜨린 당사자는 이명박-박근혜 정권들이다. 수구 보수 진영이 끊임없이 북한을 호출해 상대편을 공격하는 색깔론과 종북몰이를 시도해도 먹혀들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수구 보수 진영의 '가짜 안보'의 백미는 자국군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2006년 9월 4일에 버웰 벨 주한미군 사령관이 도날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과 피터 페이스 합참의장에게 보낸 서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비밀 해제된 이 서한은 한국군 주도로 연합훈련을 실시하면서 "전쟁 수준의 환경에서 한국군의 지휘통제작전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었다.
"한국군은 오늘날에도 전쟁 수준의 환경에서 높은 수준의 전투 지휘 능력을 행사할 능력을 갖고 있다. (중략) 주어진 위협의 성격과 준비 수준을 감안할 때, 한국군은 지금 당장이라도 독자적으로 그들의 나라를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한국군의 능력은 미국이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벨의 후임자인 월터 샤프 주한미군 사령관도 2013년에 작성한 <전작권 전환 보고서>를 통해 마찬가지 평가를 내렸다. "한국군 지휘관들은 전문적이고 현대적이며 잘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군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한국 합참이 전시에도 한국 방어를 통제할 능력이 있다고 확신한다."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2013년 상반기에도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 채택→북한의 3차 핵실험→유엔 안보리의 추가 제재→북한의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미국의 전략무기 대거 투입'이 이어지면서 한반도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었다.
이처럼 주한미군 사령관들조차 한국군이 전시작전권을 행사할 충분한 역량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잠재력이 뛰어났던 한국군을 누가 무능하고도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군대로 전락시킨 것인가? 그건 바로 우리군의 능력을 못 믿겠다며 전작권 환수를 계속 연기하고 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명박-박근혜 정권들이다.
대선 후보들을 비롯한 수구 보수 진영은 입만 열면 '안보'를 말한다. 궤멸 위기에 처해, 그래서 '안보'를 동아줄로라도 삼고 싶은 심정이야 이해하겠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한다. 안보를 망친 당사자들이 안보를 선거용 무기로 삼는 행태를 이제는 중단하길 바란다.
수구 보수 진영이 이러한 최소한의 자각 능력마저 보여주지 않는다면 심판의 몫은 국민들에게 있다. 이번 대선이 '빈 수레가 요란했다'는 점을 깨닫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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