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은 'DJ의 영혼'을 저버렸나?

[기자의 눈] 북한을 주적이라 규정하고 평양 대사를 꿈꾼다?

"두 분(김대중 대통령-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다시 한 번 악수를 하셨고 거침없는 김 위원장의 발언이 쏟아졌습니다. 그 때 본 김정일 위원장은 제가 평생을 알고 있던 김정일이 아니었습니다. 뿔도 없고 바보도, 탕아도 아니었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번에 수고하신 박지원 장관 선생이 어디 계시느냐'며 저에게 각별한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2000년 남북 최초의 정상회담을 준비한 주역 중 한 명인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가 지난 2008년 '서울대 6.15 연석회의' 특강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던 과정과 일화를 풀어내며 소개한이야기다. (☞관련기사 : "차라리 내가 김일성 참배하고 구속되겠다")

이로부터 9년이 흐른 2017년, 박지원 대표는 북한을 '주적'이라고 규정했다. 박 대표는 19일 기자들 앞에서 "엄연히 국방백서에는 주적이 북한으로 나와 있다"며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며 문재인 후보의 안보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날을 세웠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주적의 최고지도자가 자신에게 '각별한 호의를 베푸신' 셈이다. 별다른 대접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이름 한 번 불린 것을 이렇게까지 기억에 담아뒀다니. 가히 '친북'이고 '종북'이다.

박 대표는 주적이라 규정한 곳의 심장부인 평양에 가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지난 20일 YTN과 채널A 등에 출연해 "안철수 후보가 대통령이 돼서 남북관계가 개선된다면 초대 평양 대사나 한 번 해봤으면 하는 것이 내 꿈"이라고 말했다. 이 말대로면 안철수 후보는 주적과 정식 외교 관계를 체결해 대사를 파견하는 대통령이 된다. 논리적으로, 외교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일이다.

박 대표는 2010년 CBS 라디오에 출연해 "주적론 부활을 생각한다는 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무력통일, 즉 전쟁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고 밝힌 적도 있다. 그는 '주적'의 개념에 단지 군사적으로 대치 중인 적을 적이라고 부르는 것 이상의 가치 지향이 담겨 있다는 걸 잘 알고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시던 때부터 박 대표가 했던 그 숱한 말과 행동은 현재의 주적 논란에 관한 그의 태도에 논리적으로 부합할 수가 없다. 'DJ의 복심'이라던 박지원은 오로지 안철수 후보를 대통령 만들려고 '색깔론' 공격도 서슴지 않는 정치인이 된 것이다.

박지원, 이럴거면 김대중을 버려라

박지원 대표는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가 출간돼 논란이 일던 지난해 10월 18일,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행태를 문제삼자 "이런 식으로 계속 색깔론을 제기한다면 저도 다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의 정부(김대중 정부)' 당시 박근혜 야당 대표가 평양에 가서 김정일과 4시간 동안 나눈 대화 내용을 잘 알고 있다"며 "대북 특사를 요구했는지, 요구하지 않았는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방어막을 세게 쳤다.

평생을 색깔론에 시달렸던 DJ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했고, 자신 역시 수도 없이 색깔 공세에 노출됐던 박 대표이기에, 소속당을 뛰어넘어 부당한 이념 공세를 막아내는 데 팔을 걷었던 것이다.

지금 현재까지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로부터 '좌파 상왕'이라는 색깔 공세를 받는 그가, 방패를 버리고 돌연 칼을 뽑아 문재인 후보를 겨누는 모양새다. 이 역시 오로지 안철수 후보의 당선이라는 목적을 위해, 혹은 자신의 '좌파 상왕' 딱지를 떼기 위해서다.


정치인들에게는 '표'가 곧 '밥줄'이다.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말과 행동을 바꾸고, 정당을 바꾸고, 신념도 바꾸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도 대부분은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낸다. 과거를 반성하거나 신념의 변화를 해명하는 그 어떤 행동이라도 한다. 설령 그것이 가식이어도, 유권자들에게 표를 얻는 정치인에겐 명분이 곧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변심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박 대표가 휘두르는 색깔론 공세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배신이자 오랜 세월 쌓아올린 박지원 정치를 스스로 허무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생존하려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고 대외관계의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지금도 변함없는 이 원칙을 오래 전에 간파했던 정치인이 바로 김대중이었고 DJ의 오랜 여정에는 늘 박 대표가 곁에 있었다. 북한을 주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하라는 식의 사상 검증에 DJ가 무릎을 꿇었다면, 박 대표가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남북정상회담 성사는 커녕, 북한과 접촉도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이 될 사람이 북한을 '주적'이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적어도 박 대표에겐 할 수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DJ가 살아있다면, 권력을 얻으려 북한에 대한 혐오를 여과없이 부추기는 노회한 정객 박지원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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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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