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우리는 겉모습 그 이상을 봐야 한다. 본질은 한반도 문제의 핵심 당사자국인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변화에 있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는 실패했다"며, 원점에서부터 대북정책을 재검토하고 있다. "따뜻한 햄버거 협상"에서 "전투용 망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협상을 통해서든, 무력 사용을 통해서든 북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는 셈이다.
일단 주목할 점은 선제공격은 후순위로 미루고 협상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언론에선 트럼프 행정부가 대화를 배제하고 강경 일변도의 대북정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지만, 대화 가능성을 저울질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발사와 김정남 피살 사건에 따른 대북 강경 여론, 한국 정치의 과도기적 상황, 북한이 비핵화를 대화 의제로 동의할 것인가의 여부, 미중 정상회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그 시기를 검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한미동맹과 북한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있다고 여긴다. 북한의 연이은 핵과 미사일 도발은 한미 양국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의 구실을 제공하고 사드 배치 강행은 중국의 핵심이익을 훼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북한엔 강온책을 병행하면서 도발 자제 및 대화 복귀를 유도하고, 한미 양국엔 사드 배치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사드가 기어코 배치될 경우 중국의 한반도 정책도 근본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데에 있다. 즉, 한반도 안정과 평화 유지, 한반도 비핵화,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이라는 3원칙에 '전략적 균형 유지'가 추가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미동맹 대 중국의 대결 구도가 가시화될 뿐만 아니라 한미일 대 북중러 사이의 신냉전이 고착화될 위험마저 커지게 된다.
북한도 질적으로 바뀌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공언했던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이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핵과 미사일 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고 또 걱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경제건설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한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 시대 북한의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10%는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저명한 북한 인권 운동가는 "적어도 사회경제권의 관점에서 볼 때, 북한 상황은 크게 호전됐다"고 진단한다. 북한을 다녀온 해외 인사들의 전언도 이와 대동소이하다. 국내에선 '북한붕괴론'이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북한'은 이와는 상반된 길로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한국도 크게 바뀌고 있다. 박근혜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격변은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중대한 함의를 지닌다. 10년 가까이 협상을 기피하고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대북 제재와 고립에 몰두해온 정권이 물러나고 대화의 문을 열겠다는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진 것이다. 10년간 절망의 근거가 한국에 있었다면, 이제 희망의 근거를 한국에서 찾을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물론 차기 정부가 직면할 상황은 결코 녹록치 않다. 하지만 10년 만에 한국-미국-중국이 상호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대북 공조체계를 복원·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만은 분명하다. 세 나라가 상호 만족할 수 있는 합의는 '사드 배치를 일단 유보하고 북핵 해결 진전에 전념하자'는 것이 거의 유일한 상황이다. 각자가 불만을 가질 수는 있지만, 각자의 불만이 3자간 합의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외교의 본질이다.
이러한 합의에 도달한다면,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 북핵 대처를 최우선 과제로 삼은 트럼프 행정부는 재선을 의식해서라도 가시적인 결과를 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곤란한 처지에 몰린 중국은 사드 배치를 백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북핵 해결에 전례 없는 노력을 기울 것이다. 한국이 하기 여하에 따라 악화일로를 걸어온 북핵 사태의 반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가 꿈틀거리고 있는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얼마전에 "북한이 미국을 갖고 놀고 있다"고 한탄했다. 중국 내에서도 "한반도 정세 악화의 최대 수혜자는 북한과 일본"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은 주도권을 상실한 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퇴행적인 상황은 한국, 미국, 중국을 비롯한 6자회담 참가국들이 공동의 목표를 상실한 채, 서로 삿대질하는 사이로 변질된 것에서 비롯됐다. 하여 차기 한국 정부의 최대 과제는 조속히 공동의 목표를 다시 세우는 데에 있다. 이렇게 할 때만 북한이 어부지리를 누릴 수 있다는 걸 착각으로 만들면서 비핵화 협상의 문을 열 수 있다. 북한도 '자기만의 세계'에 탐닉할 것이 아니라 추가적인 도발을 자제하고 대화 분위기 조성에 힘써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3월 24일 자 <내일신문> 게재 원고를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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