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만의 '극장국가'들, 그리고 페르시아의 굴기

[유라시아 견문] 이스파한 - 페르시아와 유라시아

1. '세계의 절반'

천 년의 古都(고도)이다. 반(半)천 년으로 절반을 가른다. 셀주크 투르크의 수도가 된 이래 첫 번째 오백 년은 구시가에 흔적을 남겼다. 사파비드 제국의 수도가 된 이후 다음 오백 년은 신시가라고 불린다. 이스파한의 백미라면 아무래도 신시가 쪽일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 세계 문명의 절정을 구가했던 이슬람식 계획도시의 정수를 선보인다.

비단 사파비드의 제도(帝都)만으로 그치지도 않았다. 서아시아의 오스만 제국과 남아시아의 무굴 제국이 이스파한을 통하여 연결되었다. 이스탄불과 델리를 잇는 가교형 제국이 사파비드였던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허브이자, 굴지의 코스포폴리탄 도시였다고 하겠다. '세계의 절반'(이스파한 네스페 쟈한)이라는 수사 또한 조금도 어색하지가 않았다.


그 300년 전의 영화를 접하기 위해서는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300킬로미터를 더 가야 한다. 오늘날 이란의 한복판이다. 단박에 이란의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이란은 또 유라시아의 한가운데 자리한다. 그래서 천 년 간 동서남북의 교역로가 교차하는 곳이 이스파한이었다. 셀주크 시대에만 대상인들이 쉬어가던 객잔이 50개를 넘었다고 한다. 그들이 동서 문화의 교류를 자극하고, 남북 물자의 교역을 촉진했다. 13세기 유라시아의 대일통을 달성했던 몽골세계제국도 이스파한을 지나칠 리 없었다. 14세기의 이스파한을 기록한 이로는 당대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도 있다. 학술과 상업의 거점으로 이스파한을 묘사한다.

▲ 이스파한. ⓒ이병한

신시가의 핵심 지역인 이맘 모스크와 이맘 광장 일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1979년이다. 마침 이맘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으로 재이슬람화에 발동을 걸던 무렵이다. 자연스레 17세기 이스파한의 영광이 환기되었다. 시아파 이슬람의 수용으로 이란이 재도약했던 시기이다. 이맘 광장의 사방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대로 또한 그때 지어진 것이다. 도로의 시점과 종점에는 이슬람식 정원을 조성했다. 중간 중간은 모스크와 마드라사, 도서관으로 채웠다. 그 주요 장소들을 잇는 교각 또한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에 값한다. 자연스레 건축가와 세밀화가, 시인들이 커피를 즐기며 예술을 논하던 카페도 여럿이었다. 오스만 출신의 작가들과 무굴에서 여행 온 지식인들도 합류했다. 바로 이곳에서 이슬람 세계의 공론장이 형성되었다.


즉 '이스파한의 봄날'을 이란인들만 구가한 것이 아니다. 투르크인, 아랍인, 인도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등이 혼재하는 다문화 사회, 글로벌 시티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이 유명하다. 동서무역에 종사하는 발군의 중개상이었다. 지금도 그 후예들이 살아가는 거주지가 남아 있다. 그들이 주일마다 행차하는 교회도 여럿이다. 아르메니아 기독교와 페르시아 이슬람이 혼용되어 빚어낸 건축미학이 빛을 발한다. 근방으로는 조로아스터교도들과 유대교도들이 살아가는 마을도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 이스파한의 아르메니아 교회. ⓒ이병한

17세기 말 이스파한의 인구는 이미 50만을 넘었다고 한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기록으로 남긴 프랑스 상인도 있다. 162개의 모스크, 48개의 마드라사, 273개의 공중목욕탕이 번창하고 있었다고 한다. '세계의 절반'을 유럽에 처음 소개한 그 책이 프랑스에서 출판된 것이 1711년이다. 18세기 파리는 '페르시아의 진주' 이스파한을 동경해마지 않았다. 백여 년이 더 흘러 19세기 파리의 지식인과 예술가들도 살롱에서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면서 신문에 발표할 글을 쓰고 논쟁을 펼치는 '부르주아 공론장'이 출현한다. 이스파한의 '초기 근대'가 파리의 모더니티를 촉발시켰다.


▲ 이스파한. ⓒ이병한

2. 페르시아어 : 천 년의 세계어

이스파한에서 어울렸던 친구들이 오스만 제국이나 무굴 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소식을 끊고 살지는 않았다. 제국 간에는 외교 문서를 교환했고, 민간에서는 손 편지를 주고받으며 시와 소설을 공유했다. 그 인적, 지적 교류를 매개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페르시아어였다. 상징적인 인물로 시라즈에서 활약한 14세기 이란의 시성, 하페즈를 꼽을 수 있다. 카슈미르의 여인들도, 사마르칸트의 아가씨들도 그의 시=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고 한다. 더 멀리로는 벵골의 왕국(오늘의 방글라데시)에서 초대를 받기도 했다.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모스크에서도 하페즈의 시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이 모든 일화들을 집대성한 작품이 바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이다. 더불어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항저우의 서호(西湖)에서 페르시아의 시를 읊고 있는 몽골 귀족의 자태를 접할 수 있다.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드넓은 강역에서 '페르시아어 문예 공화국'이 작동했던 것이다.


페르시아어는 아랍어와 불가분이다. 현재의 페르시아어와 고대의 페르시아어는 전혀 다르다. 이슬람의 전래 이래 아랍 문자를 차용하여 페르시아어를 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랍 문자를 장착한 신형 페르시아어 문예 활동은 10세기부터 활기를 띈다. 그래서 아랍어 기원의 어휘를 빼놓고는 페르시아 문학을 제대로 음미할 수도 없다. 페르시아 문학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시의 특징 자체가 아랍어의 영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장/단음의 음절에 따라 음율을 맞춤으로써 예술성을 획득한다. 이란의 민족 문학을 대표하는 장대한 서사시 <왕서>(샤나메) 또한 아랍 문자와의 조우로 꽃을 피운 유라시아 문화 교류의 소산이다.

서쪽의 아랍 문자와 결합함으로써 페르시아 문학이 만개했다면, 페르시아어를 유라시아 차원으로 확산시킨 것에는 동쪽에서 온 돌궐인, 투르크족의 기여가 다대했다. 셀주크 투르크부터 관료들의 행정 문서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투르크의 왕성한 정복 활동으로 페르시아어는 아나톨리아부터 아프가니스탄 및 북인도, 중앙아시아까지 널리 퍼져갔다. 북방에서 온 몽골인들의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겠다. 그들이 일군 몽골 세계 제국으로 페르시아어 세계는 서쪽의 아랍어 세계부터 동쪽의 한문 세계까지 더욱 촘촘하게 연결될 수 있었다.

이 또한 <동방견문록>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바, 마르크 폴로는 베이징의 노구교(盧溝橋)를 '프리 산긴'이라는 페르시아어로 표기하고 있다. 원뜻을 살려 한자로 옮기자면 석교(石橋)가 될 것이다.


즉 9세기부터 19세기까지 페르시아어는 유라시아를 종횡으로 엮고 묶는 세계어의 하나였다. 아나톨리아, 발칸반도, 코카서스, 이란 고원,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의 서부까지 페르시아어로 통하였다. 문법적 특수성도 한 몫 했지 싶다. 변화무쌍한 조어를 가능케 하는 복합동사의 기능이 빼어나다. 조어력이 탁월하기에 고도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어를 모어로 삼지 않는 이들도 혼(오)용하기 쉬웠던 것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어 문예공화국은 페르시아어가 독점하는 '國語'(국어)의 세계와는 전혀 성질을 달리했다. 페르시아어와 타언어의 역동적인 습합이야말로 페르시아어 세계의 특징이다. 구미(歐美, 유메리카)적 세계 체제의 점령 이전에 작동했던 구아(歐亞, 유라시아)적 세계 체제의 복합성을 재고하는 방편으로도 유력한 사례가 될 것이다.


현재 페르시아어를 국어로 삼는 나라는 셋에 그친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타지키스탄이다. 19세기부터 퇴조가 두드러졌다. 역시 유럽의 식민주의 탓이다. 영국이 지배한 남아시아에서는 1835년부터 영어가 페르시아어를 대체한다. 러시아의 남하에 따라 발칸반도와 코카서스, 중앙아시아에서도 페르시아어의 위상은 추락했다. 19세기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으로 페르시아어 세계 또한 축소되어간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식민주의에 저항했던 민족주의의 약진을 꼽을 수 있겠다. 20세기 내내 일국가, 일민족, 일언어를 표준으로 삼는 근대화 모델이 확산되어갔다. 영국이나 프랑스, 러시아와 같은 식민 모국의 언어만큼이나 선조들이 천 년이나 사용했던 페르시아어 역시도 '외래어'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마치 조선의 한글 민족주의자들이 천 년의 한자 문명을 배타해갔던 것처럼, 페르시아어 역시도 배제되고 배척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페르시아어는 나라마다 그 이름마저 다르다. 이란에서는 이란어, 아프간에서는 다리어, 타지키스탄에서는 타지어라고 부른다. '세계의 절반'을 소통시켰던 '페르시아어 문예 공화국'이 사라진 자리, 공간적으로 분획되고 시간적으로 분절된 수십의 민족 문학들이, 국문학들이 들어섰다.


▲ 이스파한. ⓒ이병한

3. 이슬람세계의 華/夷(화/이)

이 도저한 '근대화'의 물결을 일거에 반전시킨 것이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다. 명시적으로는 미국을 적대했다. 그런데 정작 소련에 더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의도치 않은 聲西擊東(성서격동) 꼴이었다. 미국은 멀고, 소련은 가까웠다. 당시 이란은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중동의 최강국이었다. 소련이 품고 있던 구페르시아권 공화국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란 혁명이 일어났던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는 무리수를 두었던 까닭이다. 이란과 이웃한 아프간마저도 '이슬람화'된다면, 소련 내부의 '~스탄' 국가들마저 동요할지 몰랐다. 마치 미국이 동남아시아의 공산주의 도미노를 우려하여 베트남에 개입했던 것처럼, 소련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주의 도미노를 염려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한 것이다. 결국 제 발등을 찍고 말았다. 소련은 아프간에서부터 침몰되어갔고, 아프간에 이웃한 중앙아시아에는 재차 이슬람 국가들이 들어섰다. 즉 공산 독재 체제가 자유민주주의로 이행한 것(=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좌파 세속주의 국가에서 이슬람 국가로 반전한 것(=역사의 소생)이다.

▲ 이스파한. ⓒ이병한

이로써 중앙아시아와 남유럽에서도 이란의 입김이 드세졌다. 백년도 가지 못한 공산주의 이념이 사라진 공백을 천 년의 역사적, 문화적, 언어적, 종교적 공속감으로 메워간 것이다. 레닌의 동상을 철거한 자리에 모스크가 세워지고, 마르크스를 읽던 시간에 코란을 암송했다. 모스크바의 TV 방송보다는 테헤란의 라디오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그 반전하는 세계사의 현장을 누볐던 산증인도 우연찮게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운동하러 다니던 헬스장의 트레이너가 혁명방위대 출신이었다. 10대에 지원병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가, 20대에는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던) 보스니아와 (러시아의 일부인) 체첸에도 파병되었다고 한다. 탈이슬람화에서 재이슬람화로, 이란 혁명 수출의 선봉대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타지키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동향이 흥미롭다. 타지키스탄은 아프간과 더불어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나라이다. 그래서 '두 개의 몸, 하나의 영혼'이라는 말까지 있다. 이란과 국가로서는 분리되어 있으되, 정신만은 통한다는 뜻이다. 1930년대 소련 치하에서 도(주)입 되었던 키릴문자를 폐지하고 아랍문자를 되살림으로써 정통 페르시아어를 사용하자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아제르바이잔은 드물게 시아파가 다수인 국가이다. 1990년대 독립 당시 별개의 국가를 이룰 것인가, 이란의 아제르바이잔 주와 통합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논의했다고 한다. 탈소련의 방편으로 이란과의 통일을 궁리했던 것이다. 실제로 독립국가 아제르바이잔보다 이란의 아제르바이잔 주의 인구가 두 배는 더 많다. 현재 이란에 살고 있는 아제르 혈통만 2000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그 중에는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도 있다. 즉 8000만 이란인 가운데 페르시아어를 모어로 삼는 인구가 절반 밖에 되지 않는다. 여전히 제국의 속성을 속 깊이 간직한 복합국가라고 하겠다.


소련의 소멸로 이란의 영향력이 구페르시아권으로 확산되어간 반면에, 아랍 세계로의 진출에는 미국의 자충수가 한 몫 했다. 이라크부터 리비아까지 '민주주의'를 확산시킨답시고 기존 체제를 전복함으로써 이란식 이슬람 공화국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이다. 아프간에서는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고, 이라크에서는 후세인을 제거해줌으로써 이란의 안보 환경을 개선해준 효과 또한 톡톡했다. 손도 안 대고 코를 푼 셈이다. 21세기 중동의 지정학을 가늠해볼 수 있었던 시리아 내전에서도 반군을 지원했던 미국보다는 아사드 정권을 지원했던 이란 쪽으로 힘이 기울어지고 있다. 이란의 굴기가 확연하고 여실하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굴기를 제어하는 임무를 일본에게 부여한 것처럼, 중동에서는 사우디를 통하여 이란의 굴기를 저지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란 대 사우디의 대결로 중동 정세를 접근하는 보도가 흔하다. '시아파 대 수니파'라는 구도 역시 잇따른다. 적절한 독법이 아닌 것 같다. 내가 만난 이란인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열등감이 거의 없었다. 경쟁 의식조차 희박했다. 우월감이 월등했다. 사우디는 장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란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새파란 인공 국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고작 석유 하나로 웃자라서 미국의 군사력에 기대어 연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영토의 태반은 사막이요 자체적인 산업도 부재하니, 석유를 다 뽑아 쓰고 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테마파크'라며 낮추어 본다.


즉 이란은 2500년의 문명사에 터하고 있는 이슬람 세계의 '중화'이요, 사우디는 비록 메카와 메디나라는 성지를 보유하고 있을지언정 실상으로는 오랑캐이자 짝퉁에 가깝다는 식이다. 만리장성에 빗댈 수 있는 자연적 경계로는 페르시아 만이 있을 것이다. 바다 건너에는 이슬람을 왜곡시키고 있는 왕정국가들, 즉 바레인, 카타르, UAE 등등 인공국가들이 번성하고 있다. 이란이 보기에는 좀체 문명 의식이 부재한 '극장국가'들이다. 혹은 수장들과 왕족들이 통치하는 '가산국가'들이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는 체제경쟁을 할 깜냥이 못 된다. 민심도 반영하지 않고(민주주의 부재), 천심도 따르지 않으면서(이슬람의 곡해), 물신(석유와 자본)만 섬기는 '천민 이슬람주의'이기 때문이다. 확연하고도 투명한 화/이 구도였다.


중동의 장래에 대한 전망 역시도 호흡이 깊고 길었다. 사막 아래 석유에만 기대어 일시적으로 솟아난 나라들이 과연 22세기에도 지속될 것인가? 도리어 나에게 되물어 보는 식이었다. 곰곰 생각해보노라니 나로서도 몹시 회의적이다. 20세기와는 달리 21세기, 22세기에는 지하자원보다는 지상자원, 그 중에서도 전통과 역사라는 '재생 가능 자원'이 더욱 관건적일 것 같기 때문이다. 걸프 만의 '테마파크'들을 작위적으로 세웠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쇠락했고, 그들을 계승했던 미국조차도 갈수록 힘이 떨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페르시아의 후신 이란(과 오스만의 후예 터키)이 주도하는 새로운 '이슬람의 집'이 구축되어가면서 '중동'이라는 명칭 자체를 지워갈 공산이 크다고 하겠다.


▲ 이스파한. ⓒ이병한

4. '유라시아의 절반' : 지중해에서 황하까지

견문 2년차의 막바지, 애용하는 지도도 진화한다. 요즘은 구글의 지구도(Earth Map)를 살펴보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평면 지도나 지구본에서는 감지하기 힘든 입체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란의 위치와 위상을 간취하기에 더없이 적합하다. 일단 이란은 높다. 영토의 대부분이 고원 지대이다. 특히 테헤란은 해발 1200미터의 고지에 자리한다. 내가 머물었던 5월과 6월에도 저 멀리로 만년설이 덮여 있는 아르보르즈 산맥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란은 또 크다. 중동에서 자웅을 다투는 터키와 이집트보다 훨씬 더 넓다. 유라시아 전도를 펼쳐놓고 이란을 유럽에 포개어보면 독일에서 그리스까지 아우른다. 평면 지도의 왜곡을 교정한 실제 크기로는 영국에서 그리스까지 육박할 것이다. 그 넓은 영토 아래 묻혀있는 지하 자원 또한 풍부하다.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세계 2, 3위를 다툰다. 인구대국, 영토대국에 자원대국이기도 한 것이다.


지리적 조건만큼이나, 역사적 위상 또한 돋보인다. 이란은 누천년 페르시아 문명을 선도해 온 전위국가였다. 지난 백 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51년 모사데크 수상의 지휘 아래 자원 국유화 운동을 개시한 것이 이란이다.

이집트의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했던 것도 이란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다. 1960년대 이후 중동 산유국들의 자원 민족주의의 원조였다. 선봉국가의 면모가 절정에 달한 것은 역시나 1979년 이슬람 혁명이다.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거대한 이슬람세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그 시공간적 중심성으로 미루어 보건데, 이란은 재차 세계사의 주축국가로 복귀할 공산이 크다고 하겠다. '세계의 절반'을 자부했던 이스파한과 '만국의 문'을 과시했던 페르세폴리스만큼이나, 유라시아 만국의 길이 테헤란으로 통하는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 이스파한. ⓒ이병한

물론 회의와 우려가 없지 않다. 특히 미국에서 트럼프가 집권하면서 오바마의 핵합의를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미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경고를 해 두었다. 혁명방위대를 앞에 둔 일장 연설에서 미국이 핵합의를 파기할 경우 즉각 반격을 가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은 것이다. 그 반격이 핵개발 재개를 뜻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러시아와 중국과의 협력 노선을 더욱 강화시킬 것임만은 분명하다. 중국의 일대일로에서도, 러시아의 유라시아경제연합에서도 이란의 잠재적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짱 또한 나름의 시장 분석에 바탕한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이 더 이상 이란산 자원의 으뜸 시장이 아니다. 첫째가 중국이요, 두 번째로는 인도가 등극했다. 인도는 이미 세계에서 석유를 세 번째로 많이 수입하는 산업국가로 변모했는바,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이란에서 수입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서방이 아니더라도 러시아(중앙아시아), 중국(동아시아), 인도(남아시아)를 축으로 삼는 유력한 대안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란의 '축의 이동'(pivot to Asia)은 지속될 것이다.

독자적인 유라시아 프로젝트도 가동되고 있다. '지중해에서 황하까지' 연결되는 신실크로드의 허브로 이란을 자리매김한다. 특히 소련 해체 이후 (재)등장한 남유럽과 중앙아시아를 발판으로 삼고 있다. 전자에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가 있고, 후자에는 카자흐스탄, 키리기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있다. 이들 8개국 공히 18세기까지 사파비드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곳이다.

현재 이란의 인구와 GDP가 이들 8개국을 합한 것에 버금갈 만큼 규모의 차이 또한 현저하다. 이란은 이미 2013년 체결된 이란-아르메니아 철도 건설을 통하여 흑해와 페르시아만을 잇는 최단기 노선을 구축했다. 아르메니아를 통하여 유럽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란-투르크메니스탄-카자흐스탄 삼국을 잇는 중앙아시아 철도가 완성된 것은 2014년이다. 이들 주변국과의 국경도시에는 자유무역지대도 만들어 국경무역을 촉진하고 있다.


이란의 실크로드와 중국의 일대일로가 포개어지고 있음을 실감하는 현장 또한 그리 멀지 않았다. 테헤란 대학교에 부속된 어학당에서 페르시아어를 배웠더랬다. 내가 속했던 중급-1 과정의 동급생 13명 가운데 7명이 중국인이었다. 중국에서 파견된 관료나 사업가의 부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란-중국 경제 합작을 위하여 테헤란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만 4천명이 넘는다고 했다. 이란 전체로는 1만 명을 헤아렸다. 페르시아세계와 중화세계가 공진화하고 있다.

천 년 전 '호인'(胡人)들의 춤과 노래 등 페르시아 문화가 대당제국으로 전파되어 '장안(長安)의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이백과 두보는 호희들의 미모를 칭송하는 시를 여러 수 남겼다. 새 천 년 테헤란에서는 중국(چین)에서 전파된 소림사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소림사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서예를 익히고 무술을 연마하는 이란 청년들이 적지 않다. <대장금>의 선풍적이었던 인기가 소림사로 옮아간 것 같다. 온라인에서도 중국풍은 드세다. 이란에서는 페이스북과 구글, 트위터 등이 차단되어 있다. 이란의 청춘들은 화웨이와 샤오미의 스마트 폰을 손에 쥐고 중국의 SNS를 통하여 문자를 주고받고, 사랑의 밀어를 나눈다. 덩달아 나까지도 테헤란 이후로는 위챗과 웨이보 앱을 장착해서 페르시아어와 아랍어, 중국어가 뒤죽박죽 혼종된 외계어로써 '디지털 실크로드'에 동참하고 있는 중이다.

▲ 테헤란의 소림사. ⓒ이병한

실제로 중국과 이란은 은근히 비슷한 구석이 많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문명 국가'로서 대국 의식이 뿌리가 깊다. 페르세폴리스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던 옛 페르시아인들 만큼이나, 오늘의 이란인들도 자신들이 이슬람세계의 중화이자 정수임을 자부해마지 않는다. 테헤란 대학의 남쪽으로 서점과 헌책방이 밀집해 있는 엔게라브 거리를 산책하노라면 길바닥에 퍼져 앉아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목도할 수 있다. 지난 백 년, 이 나라에서 발현되지 못한 잠재력이 무궁무진할 듯하다. 페르시아몽이 무럭무럭 뭉개 뭉개 피어오르는 '다른 백년'을 예감한다.


중국몽이 서구의 자유주의도, 동구의 사회주의도 아닌 독자적인 고전 문명에 바탕하고 있는 것처럼, 이란몽의 초석 또한 이슬람 문명이 아닐 수 없을 듯하다. '중국의 충격'만큼이나 '이란의 충격'에도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첩경은 역시나 이슬람 문명에 직핍해 들어가는 것이리라. 하지만 홀로 수행하기는 시간은 턱없이 모자라고, 능력은 더없이 부족했다. 앞서 가신 분, 먼저 사신 분들의 가르침이 절실했다. 파키스탄부터 이집트까지 이슬람 세계 곳곳에서 울라마(이슬람 율법학자)를 만나 말씀을 청해 들었던 까닭이다. 울라마는 움마(무슬림 공동체) 사이에서 '만 권의 서책을 독파한 사람들'로 존경받는 이들이다. 이제는 내가 '선생님'으로 모시는 그분들과의 대화를 다음 주에 공개하기로 한다.

▲ 이스파한. ⓒ이병한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