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피해는 자신의 자취집에서 일어났다. 당시 여학생은 논문 연구 주제를 정하면서 과중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지방 학생이라 가족과 떨어져 학교 인근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고, 남자 친구도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심신이 지쳐있을 무렵이었다.
그나마 의지가 되는 사람들은 같은 연구실에서 생활하는 동료 학생들이었다. 연구실에서 연구를 진행하다가 학생들끼리 늦은 저녁을 먹으러 나온 밤이었다. 이 사건 가해자인 남자 선배도 함께였다. 자연스럽게 술도 한 잔 하게 됐다. 가해자는 여학생을 데려다주겠다며 집 앞까지 따라나섰다.
집 앞에 이르자 가해자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했다. 화장실만 쓰겠다는 것을 거절하기 어려워 가해자가 집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막상 집 안에까지 들어왔는데 그냥 돌려보내기가 그랬단다. 냉장고의 맥주를 꺼내 한 잔씩 더 마시게 됐다. 그런데 가해자가 여학생에게 불현듯 키스를 했다.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됐다며, 여학생을 평소 눈여겨보았다고 귓가에 속삭였다. 여학생은 당황스러웠고, 무슨 상황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취기도 있다 보니 멍하니 키스까지는 거부하지 않은 채 응하게 됐다. 그러자 가해자가 갑자기 여학생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지 싶은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몸을 비틀고 양팔로 밀어내려 해보았지만, 제지되지 않았다. 그렇게 원치 않던 첫 번째 성폭행이 일어났다.
이런 일이 일어난 후 6개월 넘는 시간 동안 가해자는 연구실에서 사람들이 안볼 때면 여학생에게 스킨십을 여러 차례 이어갔다. 그렇지만 사귀자는 말을 하거나 밖에서 따로 보자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여학생은 자취방에서 생긴 일이 너무 당황스럽기도 한데다가 좁은 연구실 안에서의 관계가 나빠질까봐 걱정도 됐다.
그러다보니 불쾌감을 따로 표현하지도 못했다. 여학생은 오랜 시간 혼자 마음 앓이를 하다가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가해자는 '마음고생 하는 줄 몰랐다'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음의 병이 깊어진 여학생은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에 이런 사실을 가해자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녹취 파일과 함께 올렸다.
실명을 공개한 것은 아니지만 대학원 동료 학생 다수가 친구로 설정되어 있다 보니 가해자가 누구인지가 특정돼버렸다. 여성은 가해자가 자신과 진지하게 사귈 마음이 없었으면서 자신을 농락했다는 것에 분노했고, 자신이 그 순간에 진심으로 동의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일어나버린 일련의 일들이 끔찍했다. 여학생이 원했던 것은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였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가해자가 여학생을 대상으로 명예 훼손의 죄로 고소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해왔다.
여학생은 가해자를 맞고소하고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가해자가 성폭행을 부인했다. 가해자는 여학생을 간음한 행위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다만 그것은 소위 '썸'을 타는 관계에서 합의된 섹스였다고 주장했다. 만나보는 동안 여성에 대한 호감이 사라져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것이라고 했다.
강제로 성관계를 했다는 전후로도 여성이 자신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눠왔다며, 그간 여학생이 연구실에서의 무난한 생활을 위해 상냥하게 나눠온 문자 메시지나 카카오톡 문자 메세지 등이 그 증거로 제출됐다.
가해자는 여학생이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다 된 시점에서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자 그 원망을 엉뚱하게 자신에게 실으며 사과를 요구해왔고, 당혹스러웠지만 한 때 가까웠던 후배라 다독이는 차원에서 사과 표명을 해주었는데 SNS에 올려 자신을 성 범죄자로 호도했다고 비난했다.
가해자가 무엇이라고 변명하든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해를 하게 하거나 상대방의 불안한 마음을 이용해서 성적 만족을 추구한 것은 잘못이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여학생이 토로하는 가해자와 있었던 일들이나 사후에나마 여성이 느끼는 감정들을 살펴보면, 여성이 충분히 숙고해서 진심으로 동의한 성적 접촉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상식에 기초해 생각해볼 때 가해자도 그것을 몰랐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형법 실무에서 강간이나 강제 추행의 범죄를 성립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실무에서는 폭행 또는 협박을 요건으로 하고 있고, 이는 피해자의 명백한 거부 의사를 전제로 한다. 여학생은 자신이 성폭행 피해를 입었고 가해자가 사과하는 녹취록이 있으니 성폭행이 인정되는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이 실제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데도 SNS에 올린 사안으로 범죄가 되거나 배상 책임이 생기는지 궁금해 했다. 여학생에게 기소가 어려워 보이고, 녹취가 범죄 순간의 기록도 아닌데다가 사후에 대화한 녹취나 녹취록은 간접 증거라 가해자가 대화의 취지를 적극적으로 부인하면 그 자체로 성폭행 범죄 혐의를 입증하는 증명력을 갖기 어려움을 설명했다.
여학생은 당황과 절망으로 설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후 대화 녹취록 외에 다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양자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때에, 녹취에 범죄 행위를 추단할 수 있게 가해자가 구체적으로 행위를 진술하는 것이 아니면 종종 발생하는 상황이란 말도 덧붙였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성폭행 범죄 고소 건의 기소 여부보다 정보 통신망 상에서의 명예 훼손으로 피소되고 제소된 건은 인정될 것으로 보이니 지금은 역으로 그 해결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알려주었다.
여학생이 가해자를 강간 및 강제 추행으로 고소했던 사건은 결국 불기소로 끝났다. 이런저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여학생은 더 깊이 상처를 입었다. 여학생은 그럼 자기가 가해자가 주장하는 그런 여자가 되는 것이냐며 눈물을 흘렸다. 왜 도리어 피해를 말한 것이 범죄가 돼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울분을 터트렸다.
불기소가 된다고, 범죄가 아니라고 해서, 피해자가 이를 원했다거나 피해자가 피해를 유발한 것은 아니다. 다만 범죄 행위로서의 성폭행의 개념을 분명하게 알지 못함으로서,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성적 자기 결정권의 주체로서 이에 대한 의사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 피해자에게 그 순간의 가장 해롭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후의 녹취가 갖는 증명력을 너무 과신해서는 안 된다. 애써 하는 녹취라면 좀 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특히 고소 등 합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황에서 SNS 등에 우선 폭로를 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여러 가지 위험을 초래한다.
가해자의 명예가 실제 훼손이 되었는지 그것이 합당한 것이었는지 등의 여부를 떠나, 범죄로서 성립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책임이 따른다. 후속 조치로 피해 사실을 고소해 향후 기소가 되더라도, 가해자가 입은 피해가 가해자가 받아야 할 처벌의 양형에 반영되기도 한다.
당장의 망신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후 가해자가 받을 타격은 지속성이 떨어지고 피해자가 홀로 다시 겪을 고초는 지난하다. 발생한 일을 단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자가 더 이상의 피해로 고통 받지 않으면서 단죄하려면 과정에 대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피해자도 주변인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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