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을 키운 지식인, 참혹한 교수형…

[장현근의 중국 사상 오디세이] 이론보다 실천을 강조한 이론가, 리따자오(李大釗)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중국인들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1976년 7월 28일 3시 42분이었다. 23초간 허베이(河北) 성 탕산(唐山)을 뒤흔든 대지진은 역사상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냈다. 공식적으로 24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7만 명 가까이 중상을 입었다. 나는 그 폐허 위에 지어진 지진박물관에 하염없이 앉아 죽은 자들의 호곡 소리를 들었다. 예보 하나 제대로 못한 정부였고, 사인방(四人幇)의 정쟁으로 구조도 원조도 제대로 이끌지 못한 중국공산당이었다. 그들이 신격화시킨 마오쩌둥(毛澤東)도 그 해 9월 9일에 죽었다. 누가 뭐래도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잘 지켜주는 나라가 좋은 나라다.

지진의 폐허를 딛고 탕산 시는 다시 일어섰다. 이제 인구 800만의 대규모 공업 도시가 되었다. 그 도시 한 가운데의 버스 정류장 옆에 조그만 공원이 하나 있다. 따자오(大釗) 공원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는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살다가 젊은 날 억울하게 죽은 초기 공산주의자 리따자오(李大釗)를 기념하는 공원이다. 그의 고향이 이 지역이다. 따자오 공원에는 돌로 만든 거대한 그의 두상이 있다. 안경을 낀 단정한 모습이 이론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로 불리기에 딱 어울린다. 그런데 그 옆에 새겨진 그의 다음 말은 지식인으로서 이론과 실천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만든다.


"우주가 무한하니 청춘이 무한하고 내 자신이 무한하다. 이 정신이 곧 죽은 자를 살리고 국가를 재건할 정신이다. 이 기백이 곧 비분강개하고 역발산기개세할 기백이다."

▲ 따자오 공원에 있는 리따자오의 글. ⓒ장현근

"이론보다 실천이다"

리따자오는 피가 더운 학자였다. 아편 전쟁 이래 서양 열강들에게 핍박을 당해 망해가는 조국, 낡고 병든 사회를 구원할 꿈도 희망도 없이 군벌들의 이해타산만 난무하는 세상, 어떻게 해야 불쌍한 중국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조계지 양인들의 집단 거주지 입구엔 "개와 중국인은 들어오지 못함"이란 방이 붙어져 있었다. 개만도 못한 중국인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젊은 교수는 나서봐야 쓸모없다는 은거자적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론에 매진하는 학자연하면서 손발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는 비겁한 핑계를 대지도 않았다.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신문화 운동에 온 몸을 던졌다. 나는 리따자오의 석상 앞을 쉬이 떠날 수 없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고 끝없이 말로만 뇌까렸던 것은 아닌지. 더러움을 피한다는 핑계로 더러움과 타협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돌아온 리다자오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천두슈(陳獨秀)와 연대하고 미국에서 돌아온 후스(胡適)와 논쟁했다. 그는 이론과 개량에 반대하고 실천과 혁명을 강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중국 공산주의의 선구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가 시종 민족주의 가치관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신중화민족주의'란 글에서 리따자오는 중국이 서양의 민주와 자유를 받아들여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변 국가나 국내 소수 민족들에 대해 가졌던 전통 시대의 잘못된 중화문화 우월주의를 극복하고 동서양의 정신을 잘 융합한 신중화 민족 소년이 되라고 한다. 마오쩌둥보다 네 살 위인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질곡의 중국 현대 정치사는 달라졌을까. 오직 하나의 가치만을 강요하며 지식을 우습게 여기는 반지성의 사회는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은 억압받은 민중의 고통을 가슴아파하는 인도주의적 지식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리다자오는 적극적으로 앞장 서서 강연하고 글을 쓰고 조직하고 선동했다. <신청년>이란 잡지에 발표한 '나의 마르크스주의관'이란 글은 당시 중국의 젊은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개인주의 경제학과 사회주의 경제학과 인도주의 경제학 세 부류가 있는데 인도주의는 사회 혁명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했다. 도서관장을 하면서 경제학을 가르쳤던 리따자오는 베이징 대학교에 '마르크스학설연구회'를 만들어 부지런히 공산주의 연구와 전파에 몰두했다. 계급 혁명을 꿈꾸어서라기보다 진정한 민족의 해방을 위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신문화 운동, 그리고 5.4 운동의 실패는 중국공산당을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남진북이(南陳北李), 즉 남쪽 상하이의 천두슈와 북쪽 베이징의 리다자오는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다. 그가 소련의 지시와 훈령을 어느 정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여하튼 그 이듬해 상해에서 쑨원(孫文)을 만났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을 추진하고 정치의 전면에 서서 중국의 해방과 민족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다졌다. 합작 후 손문이 직접 지명한 중국국민당의 5인 주석단 가운데 한 명이었다. "소련과 연대하고,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농민과 노동자를 돕는다"는 손문의 정책은 리따자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따자오 공원에 있는 리따자오의 석상. ⓒ장현근

마오쩌둥을 키운 사람

리따자오는 참으로 청렴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일에 교수 월급을 모두 내놓았다. 베이징 대학교 총장이 리다자오 가족들의 고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월급의 일부를 떼어 그의 부인인 자오런란(趙紉蘭)에게 따로 주었을 정도다. 그가 죽은 후 장례비가 없어 여기저기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간신히 장례를 치른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나는 따자오 공원 입구에서 산 군고구마 하나로 저녁을 때우면서 리다자오가 지은 몇 편의 시문을 읽었다. 루쉰(魯迅)은 그의 시들을 혁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이라고 칭송한 적이 있다.

리따자오가 베이징 대학교 도서관 주임일 때 마오쩌둥은 그의 밑에서 사서 노릇을 했다. 리따자오는 마오에게 사상적 영향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과 전략 전술의 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친 듯하다. 말끝마다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점이 그렇다. 특히 마오를 성공하게 만든 길, 즉 농민이 공산주의자가 되고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리따자오에게서 그 단초를 얻었을지 모른다. 리따자오는 마오를 키운 사람이었다. 나중에 마오는 중국인 전체의 정신과 삶까지 지배하려 든 신격화된 독재자가 되었다. 리따자오는 교수형을 당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최종적 승리를 예언했다. 그 승리는 독재가 아니라 민족의 해방이고 인도주의의 회복이고 진리를 향한 살아 있는 지식의 승리였으리라.

"지식은 인생을 광명과 진실의 경지로 이끄는 등불이다."


독재자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봉천군벌 장줘린(張作霖)은 지식인이 싫었다. 따지는 공산당이 싫었다. 특히 러시아 혁명을 찬양하고 소련공산당의 지휘를 받던 리따자오, 소련 대사관으로 피신한 리따자오를 매국노로 생각했다. 교수형은 리따자오 스스로 선택한 형벌이었다. 1919년 중국 북양(北洋) 정부는 대대로 내려오던 참수형을 금지하고 처음으로 이탈리아에서 교수형 틀을 수입했다. 목을 자르는 참수형이 인도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런데 무엇이든 처음이 그렇듯이 중국도 이 형틀을 도입하고는 집행 요령을 잘 몰랐다. 교수형 제도를 처음 만든 영국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수형자의 몸무게와 새끼줄의 굵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최대한 빠르게 안식에 들게 하는데, 중국은 도입 후 7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엉망이었다. 서른 여덟의 리따자오는 형틀에 세 번이나 오르내리며 목이 졸리는 참혹한 악몽 끝에 영면했다. 1927년 4월 28일 인도주의를 주장한 그는 참 비인도적으로 죽었다. 그 교수형틀은 중국역사박물관에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리따자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오늘이고 가장 잃기 쉬운 것도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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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근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길림 대학교 문학원 및 한단 대학교 등의 겸임교수이다. 중국문화대학에서 '상군서' 연구로 석사 학위를, '순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가 사상의 현대화, 자유-자본-민주에 대한 동양 사상적 대안 찾기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 사상의 뿌리>, <맹자 : 이익에 반대한 경세가>, <순자 : 예의로 세상을 바로잡는다>, <성왕 : 동양 리더십의 원형>, <중국의 정치 사상 : 관념의 변천사>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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