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횡무진 누비는 '아베 마리오'…박근혜는?

[현안진단] 동아시아 지각변동의 새 진원지, 일본의 '지구본 외교'

미중 관계에 쏠린 동북아 외교

우려했던 대로 한반도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결정으로 인해 미중간의 신냉전 기류가 예상보다 빨리 동북아시아를 감싸고 있다.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담에 앞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마주 앉아 보인 냉기류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자외교 줄타기를 전개해 온 박근혜 정부의 외교 전략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있다. 남중국해 문제, 인권 문제, 통상 문제 등 현안을 안고 있는 미중 간에 사드 배치를 계기로 갈등이 전면화될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남중국해와 '동북아 안보'에 대한 부동의 수호 의지를 강력히 피력하자, 시 주석은 사드 배치를 반대한다면서 '중국의 전략적 안보이익'이 훼손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이어서 '남중국해 영토 주권과 해양 권익'을 확고부동하게 수호하겠다고 하여 미국의 압력에 물러서지 않을 뜻을 강력히 표명했다.

다만 시 주석은 미중 간에 '신형대국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양국 관계에서 많은 성과를 낳았다고 하여 협력의 여지를 확인하려 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기후변화 등 덜 민감한 국제 현안을 다루는 데 공동의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미중 간에 쌓인 긴장의 정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아직은 가볍게 잽을 주고받은 선에서 끝난 것이다.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 이어 한반도로까지 전선이 확대된 상태에서 미중은 서로의 선제적 움직임을 견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리 없는 러일관계 회복의 시동

미중이 이렇게 힘겨루기를 하는데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사이 일본의 외교가 소리 없이 활발하다. 9월 2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오랜 현안인 북방(남쿠릴) '4개 섬' 문제를 논의했다.

회담 직후 아베 총리는 "교섭을 구체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 측의 확실한 반응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하여 구체적인 진전이 있었음을 밝혔다. 러일 양 정상은 11월 페루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담에서 한 번 더 만날 예정이며, 12월 15일에는 아베 총리의 정치적 고향인 야마구치현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정식 합의했다고 한다. 회담이 열리는 야마구치현 나가토시(長門市)에는 러일 전쟁 때 동해전투에서 전사한 러시아 함대 수병들의 묘가 있다고 하니 러시아와 무관한 동네가 아니다.

그러나 나가토시를 러일 정상회담의 무대로 설정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고려된 것은 이 지역이 아베가 정치가로서 뜻을 세운 정치적 고향이라는 점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이 지역이 하기시(萩市)에 바로 이웃한 곳이라는 점이 시사적이다. 하기시는 근대 일본의 지사들을 줄줄이 배출한 쇼카손숙(松下村塾)으로 유명하다.

이 지사들이란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침략의 주역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러일간의 교섭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갖고 일본 외교의 오랜 숙원인 '4개 섬' 영토 문제를 해결하고 러일 간에 평화조약을 맺는 수순으로 나가게 된다면, 아베는 전후 일본 최고의 재상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급격히 진행되는 러일 접근의 배경에는 극동 시베리아 개발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러시아에 일본이 적극 호응해 간 움직임이 보인다. 일본은 기존에 없던 발상에서 '새로운 접근'을 들고 영토 교섭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인데,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추진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러일관계 전반을 진전시켜가는 가운데 영토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겠다는 것을 기본전략으로 삼고 있다.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접근이다.

구체적으로는 에너지 및 극동 개발 등 8개 항목의 통 큰 경제협력 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러시아 경제 분야 협력 담당상'을 신설하여 이를 아베의 최측근인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상이 담당케 한다는 것이다. 러일 간의 경제 협력을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하겠다는 구상이다.

일본이 이러한 유연하면서도 통 큰 정책으로 '기존에 없던 발상'을 구체화하는 사이에, 한국은 러시아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대북 제재를 우선하여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형해화하면서 러시아 측의 불신을 사 왔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전제되어야 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대북 강경 압박 외교로 추진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설명 길에 나서며 기업인 100여 명을 데리고 선물 꾸러미를 준비해 간 박근혜 대통령의 방러가 뒷북치기처럼 보여 안타깝다.

한편 푸틴은 2002년과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純一郞) 총리의 방북, 북일 정상 회담의 숨은 조력자였다. 북일 관계 정상화를 통해 북한으로 흘러들어가는 일본의 자금은 러시아 극동 개발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푸틴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푸틴은 북일 관계 정상화라는 간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접 일본을 시베리아 개발의 큰 그림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 푸틴 또한 동아시아 전략을 밑그림으로 이 지역의 새판 짜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는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외교

그러나 사실 아베 외교의 주 무대는 일본 외교가 전통적으로 앞마당으로 삼아왔던 동남아시아다. 그 중에서도 필리핀과 베트남에서의 일본 외교가 화려하다. 아베는 총리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2013년 1월 베트남을 방문한 것으로 동남아 외교의 포문을 열었다. 여기에서 아베 총리는 응웬 총리와 일월우호년(국교 수립 40주년)을 선언했고, 2014년 3월에는 쯔엉 국가주석이 방일해서 양국관계를 '광범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발전시키는 데 합의했다.

이후 일본과 베트남 사이에서는 군사 분야를 포함한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작년 2015년 2월에는 베트남 해군사령관이 일본을 방문해서 해상막료장과 회담했으며, 5월에는 일본 해상막료장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이러한 협력의 이면에는 일본의 대규모 정부 개발 원조가 있다. 일본은 베트남의 최대 원조국인데, 특히 2011년 이후 연간 원조 공여액이 2000억 엔(한화 약 2조 1500억 원)을 넘는 규모이다.

대 필리핀 외교도 활발하다. 2013년 7월 아베 총리는 6년 반 만에 필리핀을 공식 방문해서, 대 필리핀 외교의 '4가지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 경제 개발 협력과 인적 교류에 더해 민다나오의 평화 구축 프로세스 지원과 해양 분야에서의 협력 등 정치 군사적 분야의 협력에서도 긴밀도를 높이고 있다.

이에 입각해서 2014년 9월에는 일본 육상자위대 막료장이 필리핀을 방문했으며, 10월에는 미국과 일본, 필리핀이 합동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작년 1월에는 일본과 필리핀의 방위상이 '일·비 방위협력교류에 대한 각서'에 조인하면서 군사 안보 분야의 양국 협력이 긴밀해지고 있다.

나아가 일본은 동남아시아를 둘러싼 호주 및 인도와의 관계를 크게 진전시키고 있다. 2013년 5월 일본-인도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안전보장협력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군사 분야를 포함한 협력 관계 구축에 합의했다. 2014년 7월 해상자위대가 시코쿠 남쪽 오키나와 동쪽 지역에서 열린 일-미-인도 합동훈련에 참가한 것은 이를 구체화한 것이었다. 2014년 9월에는 모디 수상이 일본을 방문해서 양국 관계가 '특별한 전략적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격상됐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6월 동중국해에서 미-일-인의 합동훈련이 실시되었다.

호주와의 관계는 더 알차다. 2014년 7월, 일호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21세기를 위한 특별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확인했고, 이에 입각해서 군사 교류를 확대해 오고 있다. 2014년 이후 미-일-호의 3국 합동훈련이 꾸준히 지속되어 왔으며, 2016년 4월에도 남중국해에서 미국, 호주의 해군과 일본 해상자위대가 합동 훈련을 실시한 바 있다.

이렇게 일본은 필리핀, 베트남, 인도, 호주 등과의 군사 교류, 합동 훈련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는 당연히 미일 동맹과 긴밀히 연계된 것들이다. 그러면서 미일과 이들 나라들 간 안보 협력 삼각형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다. 그 활동 해역 또한 종래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머물던 것이 인도양을 포괄하는 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리우에 나타난 '아베 마리오'의 의미

최근 전개되는 이 같은 외교를 일본은 스스로 '지구본을 부감하는 외교'라 부르고 있다. 2014년 외교청서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 문구는 아베의 외교가 전후 오랫 동안 '외교 음치'라 불리던 외교에서 탈피해서 일본 나름의 글로벌 전략을 추진할 것을 목표로 삼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2015년판 일본 외교청서에 따르면 아베는 2012년 12월 제 96대 총리로 취임한 이래, 2015년 1월 까지 2년 남짓한 기간에 54개국/지역을 방문해서 252회의 정상회담을 개최한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그리고 2016년 외교청서에는 그 숫자가 63개국/지역, 400회의 정상회담으로 늘어나 있다. 취임 후 초반의 2년 동안 세계를 누비고 다닌 것을 자산으로 이제 아베는 안방에서 '지구본 외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중국의 해양 진출에 미일 동맹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항하면서, '평화국가'로 영위해 온 일본의 문화적 자산을 정치적 자산으로 치환하여,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포장지에 쌓아 '지구본 외교'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 일본 외교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미국을 뒷배경으로 삼아 호가하려는 얕은 수의 외교가 아니다. 일본 도쿄의 도심 한복판에서 지구 반대편으로 터널을 뚫고 슈퍼 마리오 아닌 아베 마리오가 브라질 리우에 나타난 것은 지난 여름의 끝자락 리우 올림픽 폐막식에서의 깜짝쇼에서였다.

동아시아는 이제 미국의 재균형과 중국의 일대일로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시베리아/극동 개발전략과 일본의 '지구본 외교'가 각축하며 합종연횡하는 '대전략'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의 '대전략'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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