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수가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민주노총 산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상급단체를 두지 않는 독립 노조다. 2004년께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을 탈퇴했다. 보다 정확히는 민주노총으로부터 제명당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던 사내하청 노동자 박일수 씨의 죽음이 발단이 됐다.
"하청 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나의 신분에 한 점 부끄럼도 없다. 노동자 신분에 보람과 긍지,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이 사회에 또는 현대중공업 공장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현대판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기득권 가진 놈들의 배를 불려 주기 위해 제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박일수 씨 유서 중 일부
박일수 씨는 '한마음'이라는 사내하청협의회에서 활동했다. 이는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하던 곳이었다. 박 씨는 여기서 하청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동료 직원들의 연월차, 임금 체불 건을 맡아서 진정서를 제출하는 일을 했다.
그런 박 씨의 활동을 가만히 두고 볼 현대중공업이 아니었다. 현대중공업 원청은 하청을 통해 박일수 씨를 해고할 것을 종용했고, 그는 결국, 강제 휴직을 당했지만 이후에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 결과, 2003년 8월께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조합이 결성됐다.
하지만 박 씨는 여전히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조합이 결성됐지만 조직력은 미약했다. 공장으로 돌아가서, 현장에서 하청 노동자를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나는 조합원들 속에 함께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러나 2003년 12월 31일, 원청은 박일수 씨의 모든 전산 자료를 말소했다. 박일수 씨의 현장 출입을 원천 봉쇄한 셈이다. 강제 해고였다.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꿈이 완전히 좌절된 것이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현장으로 돌아가려는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갔다.
희망을 잃어버린 박일수 씨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어서도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였을까. 자신이 일하던 공장 안에서 분신을 선택했다.
현대중공업 노조, 영안실 침탈에 폭력까지...
박일수 씨의 죽음이 전해진 2월 14일, 민주노총 울산 지역 본부는 긴급 비상운영위원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현대중공업 노조가 참여한 가운데, 지역 본부 운영 위원들의 결정에 따라 '비정규직 차별 철폐, 노동 탄압 분쇄, 고 박일수 열사 분신투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회사와 협상하는 대표로는 이헌구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장, 김경석 금속연맹 울산본부장, 탁학수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 조성웅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위장을 선정했다.
이와 같은 결정이 있은 바로 다음날,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태도가 돌변했다. 2월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민주노총 울산 지역 본부 운영위로 구성된 분신대책위가 박일수의 분신을 이용해 조직 단위의 위상을 강화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며 공식적으로 분신대책위를 탈퇴했다. 게다가 자신들은 "분신대책위에 참여한 적이 없고, 박일수 동지는 도덕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열사로 규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대책위와 함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때부터 현대중공업 노조와 대책위 간의 갈등이 본격화됐다. 현대중공업 노조 대의원들은 2월 25일부터 박일수 씨 시신이 안치된 울산대병원 영안실을 침탈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3월 4일에는 200여 명이 몰려와서 대책위 지도부와 사수대, 그리고 하청 노조 조합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고인의 명복을 기리는 각종 현수막과 만장, 농성장으로 사용했던 천막까지 뜯어내고 물품 등을 강탈해 갔다.
결국, 2월 26일 민주노총 금속연맹 중앙위원회는 만장일치로 현대중공업 노조를 중징계하기로 결정했고, 그해 9월 15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현대중공업의 제명 건이 통과됐다. 전체 대의원 450여 명 가운데 264명이 참여, 232명(87.9%)이 제명에 찬성했다. 노조의 반조직적 행위, 열사 투쟁 정신 훼손, 영안실 난입, 그리고 회비 3억여 원 미납 등이 제명 사유였다.
'민주파' 집권 후, 하청 노조와 연대
당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을 장악한 집행부는 회사에 협력적인 '친기업' 성향을 지녔다. 그렇다 보니 사실상 하청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회사와 거의 흡사했다. 이러한 '친기업' 성향 집행부는 박일수 씨 사건 이후에도 무려 10년 가까이 노조 집행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는 법. 2013년 말, 회사에 비판적인 '민주파' 성향의 이들이 노조 집행부로 선출됐고 지금도 노조를 책임지고 있다.
이들은 선출 이후 이전 '친기업' 집행부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대표적인 게 하청 노조와의 연대다. 노조 집행부는 위원장 취임식 때 하청 노조 위원장을 연사로 초청했다. 하청 노조 위원장은 해고자 신분이라 현대중공업 담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럼에도 원청 노조가 회사에 요구해 하청 노조 위원장이 공장 내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현대중공업 노조가 하청 노조와 함께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이후 하청 노동자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대규모 실태 조사를 진행했고 이를 토대로 원청 노조는 4대 요구안(토요일 8시간 유급화, 성과금 지급, 정규직과 동일한 장학금 지급, 협력사 직원 퇴사 시 출입증 말소 즉시 처리)을 만들었다. 회사와의 교섭에서 이를 자신들의 요구안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요구안을 관철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원청 노조가 하청 노동자와 관련된 요구를 하면 회사는 입을 닫았다.
"우리는 할 말 없다. 우리가 하청에 개입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회사는 하청 노동자 문제에는 단호한 선을 그었다.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하게 된다는 이유로 논의 자체를 거부했다. 그래도 노조는 요구를 계속했다. 여전히 회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2014년 2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합의도 하지 못했다. 결국 4대 요구안은 단 한 건도 관철되지 않았다.
이후 원청 노조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하청 노동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청 노동자끼리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간 자신들이 하청 노동자 이야기를 해봤자 아무 효력이 없었으니 당사자의 문제는 당사자가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
2014년 3월부터 원청 노조는 하청 노조 집단 가입 운동을 기획하고. 4월 한 달간 설명회를 비롯한 준비 과정을 거쳐 5월 초부터 열흘씩 대대적인 집단 가입 운동을 벌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집단 가입 운동에도 불구하고 조직율이 크게 높아지지는 않았다.
이를 두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좀 더 조직적으로, 그리고 촘촘한 계획과 실천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진정성이 없이 보여주기 식으로만 진행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발 더 나아가 '하청 노조 조직화'를 자기네 협상 카드로만 사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날선 비난도 제기됐다. 회사 압박용으로 하청 노조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
하청 노동자를 방패막이로 쓰는 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앞으로다. 현대중공업은 '경영상의 위기'를 이유로 하청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 현재 작업 중인 해양플랜트 물량이 줄어들면 더 많은 하청 노동자들이 해고될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하청 노조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하청 노조의 미약한 조직력으로는 이를 막을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조에서 이들을 도와줄까. 지금까지의 상황만 본다면 아니다. 2014년 12월말 4만1059명이던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는 2016년 3월말 3만3317명으로 줄었다. 7742명이 소리 소문 없이 잘려나갔다. 이후로는 통계에 잡히지 않지만 그에 준하는 수준의 하청 노동자가 공장 밖으로 쫓겨났다는 게 중론이다. 이 상황이 될 때까지 정규직 노조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박종식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위원이 발표한 '내부노동시장의 변화와 사내 하청 확산 메커니즘 : 조선 산업 사례를 중심으로(2013)'을 보면 사내 하청 업체의 노사관계는 원청 업체와 하청 업체,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가 참여하는 복합적 관계를 특징으로 한다. 실질적 권한을 지닌 원청이 사용자로서 의무를 인정하지 않고 교섭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단체교섭은 정규직 노조의 지원과 연대,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력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직 노조의 역할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하청 노동자는 1997년 IMF 이후부터 정규직 노동자의 방패막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IMF 시대에 전면적인 구조조정은 필연적이었다. 고용의 위기는 사업장 내부에서 원청-하청 경계를 따라 불균등하게 전가됐고 하청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은 뒤, 정규직 노동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한 해고의 경험은 경제위기 이후 경기 회복 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하청 노동의 확산을 '묵인'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는 지금의 구조조정 광풍에서도 유효하다. 선의를 가지고 하청 노조와 연대를 꾀했던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조도, 지금은 이들 하청 노동자를 일종의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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