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승자는 트럼프도 힐러리도 아니다

[독서통]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2016년 11월 8일부터 본격적인 미국 대선이 시작됩니다. 공화당은 도널드 트럼프를, 민주당은 힐러리 클린턴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불안한 세계 경제, 극단으로 치닫는 테러, 확산하는 극우 세력, 대응이 시급한 기후 변화 등. 전 세계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에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가 바로 올해 대선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의 신냉전 구도가 한반도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를 잡을지도 이 대선 결과와 떼려야 뗄 수가 없고요.

<프레시안>과 <시사통>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독서통'은 25일 미국 대선을 둘러싼 이모저모를 살핀 안병진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미국학과) 겸 부총장의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메디치미디어 펴냄)를 주목했습니다. 안병진 교수는 이번 대선의 의미를 "건국 이후 첫 주류 교체와 미국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으로 규정합니다.

다음은 독서통 인터뷰의 주요 내용입니다.

▲ 안병진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 겸 부총장. ⓒ연합뉴스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김종배 : 이번 주 독서통, 어떤 책입니까?

강양구 :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는 책입니다.

김종배 : 미국 대선과 관련한 책이죠? 공화당 전당 대회(7월 18~21일)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됐습니다.

강양구 : 힐러리 클린턴도 민주당 전당 대회(7월 25~29일)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될 예정이고요.

김종배 :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 대선 본선 레이스가 시작되는데, 이에 맞춰 나온 책입니다. 저자가 어떤 분입니까?

강양구 : 미국 정치를 전공한 경희사이버대학교의 안병진 교수입니다. 현재는 부총장도 맡고 계시죠. 마침 트럼프 현상 또 샌더스 현상이 한창일 때 두 달간 미국을 여행하고도 오셨어요.

김종배 : 어서 오십시오.

안병진 : 네, 안녕하세요.

김종배 : 대선이 석 달 정도 남았죠? 이번에 쓰신 책을 보면, 여태까지 국내 언론이나 미국 정치 전문가가 초점을 맞추는 부분과는 결이 다릅니다. 그 대목을 읽어 보죠.

"이번 미국 대선을 기존 이념과 정당 그리고 정책의 대결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문명사적 대전환과 충돌이라는 프리즘으로 새롭게 바라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이번 대선을 힐러리 대 트럼프의 대결이 아니라 미국 건국 초기의 근대적인 문명의 틀과 주도 세력이 모두 바뀌는 대전환기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문제의식이다."

안병진 : 미국에 가서 트럼프 현상과 샌더스 현상을 직접 보면서 한 가지 새로운 의문이 들었어요. 이처럼 양극단의 스펙트럼에 위치한 두 후보가 잘 나가면 당연히 중간에 위치한 정치인은 부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두 후보와 비교하면 중도적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여전히 잘 나갑니다. 레임덕도 없어요.

이런 현상은 기존의 정치학 교과서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기존의 시각에 의존하면다면 잘못된 해석을 내리기 십상이죠. 그래서 지금의 미국 정치는 기존의 정치학 교과서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거대한 변화의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거대한 변화를 바라보고자 '문명'이라는 새로운 안경을 써보고자 했습니다.

강양구 :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극단주의자와 중도주의자가 동시에 각광을 받은 상호 배타적인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안병진 : 레임덕 없는 중도주의자 오바마와 극단주의자 트럼프와 샌더스의 인기는 얼핏 보면 달라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이 새로운 문명으로 이행하는 중이며, 이 이행기를 누가 주도할 것인지를 둘러싼 거대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시각으로 보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바마는 비록 중도주의자이지만, 바로 이런 거대한 싸움의 중요한 플레이어입니다.

정권 말임에도 강한 이유와 (트럼프와 샌더스의) 극단적 논리가 힘을 얻는 이유는 얼핏 보면 달라 보이죠. 하지만 미국이 새로운 문명으로 이행하는 중이며, 이 이행기를 누가 주도할 것이냐를 둔 거대한 싸움이 저변을 공유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상이 가능합니다. 오바마는 비록 중도주의자이지만, 미래의 흐름을 잘 포착해 이 물결에 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양구 : 어떤 세력과 어떤 세력이 싸우고 있습니까?

안병진 : 우선 미국 주류가 교체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보수적 백인 세력이 이 책에 사용된 표현을 그대로 쓰자면 진보적 백인-흑인-아시아계-히스패닉을 포괄하는 '무지개 연합'으로 교체되고 있습니다. 특히 히스패닉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미국을 백인 대 흑인 사회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미국 다인종 사회의 가장 중요한 세력은 히스패닉입니다.

둘째, 이번 대선은 미국 독립 혁명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미국 정신이 완전히 다른 흐름의 문명으로 변화하는 패러다임 이동의 장이기도 합니다. 셋째, 이런 미국의 변화는 세계적인 흐름과도 연결이 됩니다. 전 지구 차원에서 다문명이 공존하는 새로운 세계 정치가 등장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죠.

ⓒAP=연합뉴스

오바마는 왜 레임덕이 없는가

김종배 : 하나씩 얘기를 해보죠. 우선 무지개 연합의 약진을 이야기해 보죠. 이 무지개 연합이 미국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합니까?

안병진 : 선거 캠페인 차원에서 보면, 민주당이 더 이상 백인 중하층을 공략할 필요성이 없어요. 이 계층은 그냥 공화당에 줘도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민주당에 유리한 쪽으로 인구 구성이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2년부터 2016년 사이에 백인 유권자는 계속해서 줄어든 반면에 히스패닉은 그만큼 늘어나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기존의 지지층인 흑인에 더해서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히스패닉 등을 포함한 다인종 연합을 동원하는 데만 성공하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강양구 : 그러고 보니, 이번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와 샌더스의 운명을 가른 요인도 흑인과 히스패닉 연합군이었죠.

안병진 : 그렇습니다. 한국의 상당수 진보주의자가 버니 샌더스가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이기길 바랐죠. 하지만 저는 샌더스가 이기기 힘들 거라고 전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미국의 대선 후보, 특히 민주당의 대선 후보는 계급 변수로만 확정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계급만큼이나 인종 즉 이민 변수가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진보 세력에 비유해 봅시다. 샌더스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계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보 정당의 후보입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 진보 정당은 지역에 중요한 기반을 가지고 잇는 민주당 정치인을 압도하지 못했습니다. 한국 정치에서는 계급보다 지역이 훨씬 더 중요한 변수니까요.

지금 미국 정치를 가장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변수는 인종 즉 이민입니다. 반면에 샌더스의 강점은 계급입니다. 샌더스 현상이 힐러리를 압도할 정도로 거셌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미국 남부에서 흑인과 히스패닉을 동원해서 샌더스 바람을 막고자 했던 힐러리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죠.

김종배 : 오바마가 레임덕에 빠지지 않은 이유도 히스패닉을 중심으로 하는 다인종 무지개 연합의 지지 덕분입니까?

안병진 : 그런 점이 있습니다. 오바마 정부는 빅 데이터 분석에 따라서 히스패닉 같은 자신의 지지층에 정확하게 호소하는 맞춤형 정책을 계속해서 내놓고 있습니다. 전향적인 이민 정책도 그렇고 정권의 운명을 걸었던 (물론 엄청난 반대에 직면해 한계가 분명합니다만) 의료 보험 개혁도 그렇죠.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더 언급하죠. 오바마는 끊임없이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하는 퍼포먼스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해 왔어요. 오늘날 정치인은 위대한 배우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이미지 조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정치는 연기입니다. 이런 이벤트는 그 정치가에 대한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거나, 유권자가 바라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죠.

이 점에서 오바마는 탁월했습니다. 오바마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통가입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연기자입니다.

강양구 : 책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연설을 언급하셨는데요. 저도 그 뉴스를 보고서 오바마 같은 지도자를 가지고 있는 미국 국민이 정말로 부러웠었습니다.

"오바마 집권 2기 최고의 퍼포먼스는 단연 '어메이징 그레이서' 연설이다. 연이은 총기 사망 사건에 분노하고 좌절한 미국인들에게 오바마는 이성주의적 정책 설교 대신에 갈기갈기 찣긴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잠시 침묵의 순간에 이어 놀랍게도 그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추도식에 모인 이들이 함께 합창으로 공명했다. 이 장면은 그 어느 할리우드 영화보다 극적이다. (…)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는 오바마의 이 퍼포먼스는 권력 추구와 이성주의적 정책이라는 근대적 정치 패러다임의 시대가 가고 영혼을 위로하고 마음 속 깊이 교감하는 영성의 정치 시대를 열었다고 본다."

트럼프의 반동 정치

김종배 : 트럼프는 반이민 구호로 백인 남성, 즉 다인종의 반대편을 결집했다고 봐야겠네요.

안병진 : 그렇습니다. 트럼프는 샌더스보다 지지 기반이 탄탄합니다. 트럼프는 미국 정치의 중요한 변수인 인종과 계급을 결합하는 뛰어난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반이민을 내세우면서 히스패닉의 약진에 반발하는 백인 중하층을 결집시켰습니다. 새롭게 떠오르는 다인종 연합을 공격함으로서 기존 주류의 결집을 꾀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트럼프 현상은 프랑스 대혁명 후의 '테르미도르 반동'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이는 반혁명입니다. 그런데 반혁명도 혁명입니다. 트럼프는 인종주의를 미국의 현실에 대해서 절망, 공포, 분노를 느끼는 중하층을 결집하는 에너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반동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급진적인 정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모든 걸 바쳐 미국을 위대한 국가로 만든 그들의 자녀들이 더는 아메리칸 드림을 갖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노후도 불안하기 짝이 없죠. 그렇다면, 이들은 누군가에게 그 분노를 쏟아내야 합니다. 미국판 노무현 시대인 클린턴 시대가 그들에게 뭘 안겨 주었습니까? 오히려 금융 자본주의에 순응해 버렸죠.

트럼프는 이렇게 외치죠. '오바마가 집권했는데 당신들이 더 잘 살게 되었나?' 실제로 오바마 때 오히려 미국 중하층의 삶은 더 팍팍해졌습니다. 바로 이 지점을 트럼프는 파고든 거죠.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아요. 영화 <국제 시장>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왜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근대화를 위해서 피눈물 흘리며 싸운 주인공이 노인이 되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뒷방 신세가 됩니다. 이 세대의 스산함과 박탈감이야말로 한국의 보수 혁명, 또 미국의 보수 혁명의 핵심입니다.

김종배 : 책에서 트럼프를 두고 '공화당의 이단아가 아닌, 공화당의 민낯'으로 평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공화당 주류는 왜 그렇게 트럼프를 역겨워하는 겁니까?

강양구 : 사실 트럼프가 무슨 '별종' 같아 보입니다만, 트럼프와 경쟁했던 테드 크루즈나 마르코 루비오 같은 경쟁자도 과거 공화당의 후보나 대통령과 비교하자면 극우적인 인물이죠.

안병진 : 제가 싫어하는 정치철학자 가운데 레오 스트라우스가 있어요. 미국 신보수주의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 학자입니다. 이 사람이 즐겨 쓰던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 위대한 엘리트는 우아하게 거짓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끼리 모여서 하는 얘기와, '우매한 민중' 앞에서 하는 이야기는 달라야 한다는 거죠.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국민을 '개돼지'로 취급한 공무원이 논란이 됐습니다만, 레오 스트라우스와 그를 추종하는 미국의 보수 엘리트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공화당 주류는 트럼프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는 수백만 원짜리 양복을 입고 수백만 달러 규모의 파티에서 고급 와인을 마시면서 민중을 개돼지라 멸시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민중이 알게 하면 안 됩니다. 그건 일종의 룰을 깨는 행위죠. 그런데 트럼프가 바로 자기의 민낯을 드러내는 게 불편한 겁니다.

한편으로는 트럼프의 주장이 공화당 주류의 이해에 반하기도 합니다. 공화당을 떠받치는 세 기둥 가운데 하나가 기업입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미국이 이민에 적대적인 국가가 되면 곤란합니다. 트럼프만 하더라도 기업가일 때는 이민에 적대적이지 않았어요. 기업 입장에서는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은 참으로 근시안적인 접근이죠. 자본의 이해에 반하니까요.

강양구 : 이민이 자유로워야 저렴한 노동력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고, 또 상품을 살 소비자도 늘어나죠.

안병진 : 트럼프와 반대되는 기업가가 바로 빌 게이츠죠. 저는 빌 게이츠를 좋아합니다만, 게이츠가 아프리카 같은 오지에 무상으로 컴퓨터를 지원하고 인터넷을 깔아주는 게 한편으로는 인도주의적인 기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영리한 기업가로서의 장기적은 투자라고도 볼 수 있어요.

강양구 : 시장을 넓히는 행위일 뿐이죠.

안병진 : 네, 로자 룩셈부르크가 얘기했듯이 자본주의는 시장이 더 확대되지 않으면 몰락합니다. 게이츠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현대 자본주의 연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반면 트럼프의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반이민적인 정책은 어떤 점에서는 자본주의의 이해에도 반하는 근시안적인 행동이죠.

미국의 비전, 제퍼슨 vs. 해밀턴

김종배 : 이번 미국 대선을 두고 미국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바뀌는 상징적인 장이라고도 지적했습니다. 책에서는 미국 건국 당시 토머스 제퍼슨의 민중적 농업 국가론과 알렉산더 해밀턴의 금융 자본적 기업 국가론의 경쟁에서 해밀턴이 승리했던 사례를 이야기했어요. 이와 같은 대결의 장을 다시 얘기하신 겁니까?

안병진 : 미국이 부시나 트럼프 같은 사람만의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도 미국에는 위대한 생태 문명을 꿈꾸는 훌륭한 활동가가 있습니다. 미국을 좀 더 폭넓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미국이 독립 혁명 당시에 위대한 잠재력을 가졌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하신대로 제퍼슨은 소농과 같은 풀뿌리에 기반을 둔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꿨습니다. 그러나 해밀턴이 주도한 기업 국가로 미국이 나아가면서 소농은 사라지고 몬산토(몬샌토) 같은 대기업이 유전자 변형 작물(GMO) 종자를 퍼뜨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괴물로 등장하게 되었죠.

저는 미국이 다시 위대한 국가가 되려면 해밀턴의 비전이 아니라 소농에 기반을 둔 생태적 국가, 즉 제퍼슨의 비전을 따르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미국에는 당시 제퍼슨이 상상하지 못한 정보 기술이 뒷받침하는 인프라가 마련됐습니다. 제퍼슨이 현대에 환생한다면 이런 IT에 기반을 둔 직접 민주주의 시스템을 꿈꿀 겁니다.

이 점에서 지금 미국은 전혀 새로운 문명으로 탈바꿈할 수 있느냐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번 대선이 이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AP=연합뉴스

힐러리의 변절은 누구 책임인가?

김종배 : 미국이 문명사적 전환기에 놓였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제 이해됩니다. 이제 힐러리 얘기를 해 보죠. 이와 같은 전환기에서 힐러리의 위치는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강양구 : 그간 진보적인 지식인 대부분은 힐러리를 주류 문법에 물든 오바마의 아류 정도로 봤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힐러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했더군요.

안병진 :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힐러리를 너무 이분법적으로 바라봅니다. 힐러리는 미국을 신진보의 시대로 끌고 가려는 꿈을 갖고 있는 정치인입니다.

금융 자본주의의 힘이 너무 강력하고, 레이건 이후 지속된 보수주의의 힘이 강하다 보니 힐러리는 '좀 더 진보적인 국가' '좀 더 중산층을 위한 미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집권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었죠. 힐러리는 상하원과 백악관을 장악해 오바마가 미처 이루지 못한 신진보의 시대를 굳게 다지려 합니다.

(샌더스를 지지하는) 미국의 리버럴 좌파가 힐러리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1990년대 클린턴 행정부에서 힐러리가 외롭게 진보 정치를 추구할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나요? 한때 힐러리는 남편이 재선을 앞두고 백인 중산층의 표를 위해 1995년에 추진한 복지 개혁이 흑인 저소득층 아이와 이민자를 거리로 내모는 처사라고 항의하기도 했죠.

그 때 과연 (지금 힐러리를 비판하는) 리버럴 좌파가 힐러리에게 힘을 실어줬나요? 힐러리를 클린턴 행정부와 동일시하고 선 긋기에 바빴죠. 힐러리의 보수화에는 일정 정도 (미국의 진보 진영을 포함한) 여러 세력의 책임이 있습니다. 물론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힐러리의 신진보주의 비전은 지나치게 기업 국가적입니다.

김종배 : 앞에서 얘기한 제퍼슨 비전의 소농과 같은 풀뿌리에 기반을 둔 생태 국가로 가느냐, 아니면 기업 국가로 가느냐의 구도에서 보자면 힐러리나 트럼프나 같다고 봐야 할까요?

안병진 : 그렇습니다.

김종배 : 그렇다면, 이번 미국 대선이 인물을 통해서는 문명사적 전환으로 이어지진 않으리라고 볼 수 있겠네요?

안병진 : 여기서 주의할 게 있습니다. 방금 제가 '그렇습니다' 하고 표현한 건, 50년 또 100년의 큰 흐름으로 세상을 보는 분의 관점에서 대답한 겁니다. 이분들의 시각에서는 힐러리가 되든, 트럼프가 되든 큰 차이가 없습니다. 실제로 샌더스 진영 일부에서 이런 주장이 나오죠.

그러나 샌더스가 "트럼프를 막기 위해 우리는 힐러리를 지지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힐러리와 트럼프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비록 기업 국가적이지만, 힐러리는 미국을 좀 더 진보한 국가로 이끌고자 하는 비전을 갖고 있죠. 오바마가 집권 후에 많은 지지자를 실망시켰지만, 그의 성과 역시 무시 못합니다.

예를 들어, 집권 초기에 기후 변화 이슈에 미온적이었던 오바마 대통령의 주도로 지난해 12월 열린 파리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이 되었죠. 힐러리는 앞으로 오바마가 길을 닦은 '파리 협정'을 준수하면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겠죠. 트럼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역사의 진전입니다.

힐러리는 협약 사항을 앞으로도 준수해 나갈 겁니다. 반면에 트럼프는 당선되면 기후변화협약 탈퇴를 하겠다고 공언했죠. 이런 점에서 보자면 힐러리와 트럼프 사이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문제는, 힐러리가 좀 더 전향적으로 변화하도록 미국의 시민이 아래에서부터 압박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힐러리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입니다.

미국-페이스북-구글의 '제국'이 등장했다

김종배 : 앞에서 미국의 주류가 백인에서 무지개 연합으로 바뀌는 것이 미국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변화를 가져오리라고 전망했습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안병진 : 2000년에 나온 <제국>(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이학사 펴냄)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죠.

이 책의 핵심 주장이 흥미롭습니다. 세계가 더는 전통적인 의미의 제국주의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강력한 힘을 가진 국민 국가, 유엔(UN)과 비정부기구(NGO), 초국적 기업이 느슨하게 네트워크를 구축해 세계를 통치하는 시대로 이행한다는 것이죠. 전 세계인은 통치 받는 줄도 모르면서 통치 받는 시대가 되고요.

그런데 이 책이 나오자마자 저자인 네그리와 하트가 당황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조지 W. 부시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죠. 부시는 소프트 파워로 제국을 운영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난폭하게 패권을 휘둘렀죠. 자신이 얘기한 '제국' 권력의 상징으로 미국의 빌 클린턴을 꼽았던 두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었죠.

저는 그 때는 이들의 논의에 문제 제기를 했었어요. 빌 클린턴은 미국 예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통치하던 미국 역시 본질적으로는 그 전의 레이건-부시의 공화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를 이은 부시도 마찬가지였고요. 저는 오바마야말로 네그리와 하트가 주장한 새로운 '제국'의 수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바마는 부시뿐만 아니라 민주당 클린턴과도 아주 다른 인물입니다. 새천년 세대를 대변하는 리버럴입니다. 오바마는 미국을 예외로 두지 않고, 세계 제국 안에서 미국의 자리를 만드는 걸 추구해 왔어요. 당하는 국가 입장에서는 부시보다 오바마가 훨씬 더 무서운 사람입니다. 지금 이란과 쿠바를 보면 알 수 있죠? 두 나라 모두 미국식 자본주의가 물밀 듯 들어가겠죠.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을 진정 무너뜨리려면 (싸움을 걸 게 아니라) 돈으로 매수하면 됩니다. 개성 공단을 북한 전역에 30개 정도 만들면 되죠. 물론 오바마는 유독 북한에 대해서는 세계 제국적 접근을 하지 않습니다만…. 거기에는 동아시아의 독특한 지정학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얘기는 이번 주제가 아니니까요.

강양구 : <제국>을 보면 통치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안병진 교수께서 이 책에서 제국의 통치 파트너로 페이스북, 구글과 같은 초국적 기업을 거론하셨죠.

안병진 : <제국>에서 네그리와 하트가 뛰어났던 점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새로운 제국의 중요한 파트너로 초국적 기업을 제시한 건 중요한 통찰입니다.

최근 1~2년 사이 우리는 초국적 기업 제국의 무서움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추세가 20~30년 이어진다면, 페이스북과 구글은 국민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힘도 가지게 될 겁니다. 이제 기업은 이처럼 국가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회장이 상징적이죠.

강양구 : 예전에는 국가 단위에서나 가능했던 우주 개발을 기업이 하고 있죠.

안병진 : 네. 헤게모니가 기업으로 넘어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죠. 지구적 헤게모니가 국가에서 기업으로 넘어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일론 머스크의 우주 개발입니다. 옛날에는 국가의 수장이었던 존 F. 케네디가 우주로의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기업이 우주로의 꿈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기업에 지배된다? 제대로 투쟁하지 않는다면 <메이즈 러너>, <헝거 게임>과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 영화가 그리는 슬픈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그랜 토리노>(2008년)는 이행기 미국의 고민을 담은 수작이다. ⓒwarnerbros.com

"힐러리가 유리하지만…"

김종배 : 이제 단순한 질문을 하나 드려 보죠. 누가 이길까요?

안병진 : 오만한 얘기이긴 합니다만, 지금만 보면 선거인단 구성이나 미국 리버럴의 뛰어난 캠페인 능력, 최근 미국의 기류 등을 고려할 때 힐러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단, 결정론적으로 '힐러리가 이긴다'고 말하는 건 위험합니다. 기존 20년간 민주당이 이긴 지역에서 결과가 뒤집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김종배 : 트럼프가 공화당 경선도 통과하지 못하리라고 예상했다가 큰 코 다친 사람이 많은데, 요새 미국에서는 대선 결과 전망을 잘 하지 않죠?

안병진 : 네. 족집게로 유명했던 네이트 실버와 같은 사람은 공개적으로 사과했죠. 트럼프 현상이 이 정도로 거셀 줄은 몰랐다고 말이죠. 그리고 대선 결과 예측을 극도로 조심하는 편이죠.

강양구 : 책에서 아주 많은 영화를 들면서 미국 정치를 설명하셨어요. 특히 이행기 미국의 고민을 집약한 영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그랜 토리노>(2008년)를 꼽았습니다. 좋은 영화죠. 이 책을 읽고서 <그랜 토리노>도 같이 한 번 보면서 생각을 가다듬으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안병진 : 아주 좋은 영화입니다.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눈으로 미국인의 무의식을 보여주죠. <그랜 토리노>와 함께 저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영화도 현대 미국을 설명하는 걸작으로 봅니다. 이 영화를 보시면, 오늘의 미국을 완벽하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강양구 : 책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배트맨에 비유하셨죠. (웃음)

"2017~18년에 심각한 위기가 온다"

김종배 : 세계사적 전환기의 요구가 미국 대선에도 투영되는데, 이런 조류가 한국 대선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안병진 : 감히 저는 미국처럼 흔들리진 않으리라고 봅니다. 미국의 새천년 세대가 가진 어마어마한 인구학적 파워, 정치적 파워는 놀랍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미국처럼 역동적 인구 구조의 나라가 아니라서 새천년 세대가 정치적 파워를 갖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586 세대가 미국처럼 훌륭히 새천년 세대를 지원하지도 않습니다.

거기다 미국의 대선 후보는 빅 데이터 분석력과 시대정신을 포착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힐러리 보세요. 최저 임금 시간당 15달러라는, 불가능해 보였던 샌더스의 강령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대선 후보는 아직도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답답한 일이죠.

▲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안병진 지음, 메디치 펴냄). ⓒ메디치
하지만 한국도 지금 거대한 전환기에 놓였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미국보다 가파른 전환기에 놓여있는지도 모릅니다. 수십 년 간 지켜온 천민자본주의의 틀이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여러 지식인이 디스토피아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죠. 2017~18년에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미국과 같이 큰 흔들림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지난 총선이 보여줬죠. 은수미 전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정치 무관심층으로 여겨진) 새천년 세대들이 국회방송으로 지켜봤습니다. 20대가 밤 새서 국회방송을 시청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습니까?

제가 이 책 서문에 옛날 민주화 세대의 표현을 썼습니다. '혁명이 예고되고 있다.'

강양구 : 이 책을 읽으시면 3개월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실 겁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김종배 : 안병진 교수와 함께 미국 대선 구도를 진단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병진 :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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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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