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386 세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 곳곳에서 '올드 보이'가 귀환하면서부터다. 김기춘(77)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이병호(76) 국가정보원장, 이원종(74) 청와대 비서실장, 남재준(72) 전 국정원장 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그래서 한때 '신 386 세대'는 이들 올드 보이의 구태의연하고 낡은 국정 운영을 꼬집는 말로 쓰였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제1야당의 수장을 맡은 김종인(76)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신 386 세대의 대표 주자라 할 만하다. 여기에 여든 야든 어디서 대통령 후보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사실은 그래서 더 이상한) 반기문(72) 유엔(UN) 사무총장도 대선 행보를 염두에 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새롭게 신 386 세대의 일원이 되었다.
시쳇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나이 많음이 사회 활동의 결격 사유는 아니다. 이제 갓 60대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시야가 수십 년 전에 박힌 답답한 사람도 있고, 팔순을 바라보는 사람인데도 웬만한 젊은 사람 뺨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신 386 세대의 득세가 마뜩잖다. 이유는 이렇다.
누가 누구를 이끈단 말인가?
지난 2006년 9월 5일, 고(故) 리영희 한양대학교 명예교수가 지적 활동 마감을 공개 선언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7세. 지병으로 집필이 어렵긴 했으나,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한마디를 기사화할 매체가 줄을 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홀연히 지적 은퇴를 선언하고서, 2010년 세상을 뜰 때까지 가능하면 현실 문제에 대한 논평을 삼갔다.
그가 지적 은퇴를 선언하면서 했던 인터뷰는 신 386 세대가 경청할 만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개인에게는 무한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할 시기가 있는데 그 시간이 온 것 같다. (…) 내가 산 시대가 지금 시대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고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왔다. (…) 자기가 할 수 있는 한계를 깨달을 때 이성적 인간이라 할 수 있고, 마치 자기가 영원히 선두에 서서 깨우침을 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그렇다. 신 386 세대가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경력을 쌓기 시작한 1960~70년대와 지금은 시대 상황이 다르다. 시대 상황이 다른데 그걸 인정하지 않은 이가 권력을 쥐게 될 때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가장 최근의 일로는 인공지능이 뜬다며 수학교육과 교수를 비례대표 1번으로 공천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행보가 그렇다.
나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우스꽝스러운 행보를 보면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김선형·권진아 옮김, 책세상 펴냄)를 쓴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촌철살인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이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 존재한 기술은 정상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세상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다. 당신이 열다섯 살부터 서른다섯 살 사이에 등장한 기술은 새롭고 놀랍고 혁명적인 것이다. 당신이 서른다섯 살 이후에 등장한 모든 기술은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부담스러운) 것이다."
굳이 애덤스의 통찰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텔레비전이 한창 보급되기 전부터 성장기를 보내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 386 세대가 과연 디지털 시대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까? 예순다섯 살 이상을 새로운 의무 교육 대상으로 본 앨빈 토플러의 통찰대로라면, 이들 신 386 세대야말로 다시 교육을 받아야 할 세대인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이끈단 말인가?
'노욕'을 이기지 못한 몸부림
신 386 세대의 득세가 더욱더 문제인 것은 이들의 행보가 사회 이곳저곳에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노욕(老慾)'을 이기지 못한 몸부림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들 신 386 세대는 한국 현대사를 지나면서 단물만 쏙 빼먹은 이들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선배, 동기, 후배가 총칼에 쓰러질 때 대학이나 외국에서 침묵하며 경력을 쌓을 준비를 했던 이들이다. 베트남 전쟁터에서 또 독일의 탄광에서 동기, 후배가 피와 땀을 흘릴 때 양주와 와인을 홀짝였던 이들이다.
그렇게 이들 신 386 세대는 양지에서 군사 독재에 부역하고, 나중에 민주화 이후에는 그 경력으로 민주화 시대의 정치인을 홀려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온, 말 그대로 징글징글한 기회주의자다. 그리고 그 덕분에 그들은 수십억 원 이상의 자산도 축적하고, 사회 곳곳에 뻗어 있는 최상층의 인맥도 쌓고, 언제든 불러만 주면 한 자리를 맡을 수 있는 자신감도 축적했다.
그러니 이들은 그 기득권을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들이 팔순을 내다보는 지금, 권력을 다시 쥐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이것이야말로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이 <아버지의 나라 아들의 나라>(어크로스 펴냄)에서 설득력 있게 설명한 '제론토크라시(gerontocracy)의 시대' 즉 '고령자 지배 체제'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아닐까?
더구나 이렇게 신 386 세대, 즉 노인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정작 대다수 평범한 노인이 월 10만 원, 20만 원이 없어서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빈곤 상태로 빠져드는 역설은 어떤가? 젊어서 자신의 선배, 동기, 후배를 사지로 내몰았던 그들은 늙어서도 자신의 노욕만 챙기는 데 급급한 것인가.
노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총, 균, 쇠>(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문명의 붕괴>(강주헌 옮김, 김영사 펴냄) 등으로 유명한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한 강연에서 자신과 같은 노인이 지금 현재 이바지할 수 있는 일로 세 가지를 들었다. (그는 1937년생으로 올해로 만 79세다.) 이제 곧 은퇴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한 신 386 세대에게 그의 조언을 권한다.
첫째, 노인은 다음 세대 그러니까 손자, 손녀를 양육할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이아몬드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이 직장을 갖는 것이 필수가 된 이 시대에 다음 세대의 양육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책임지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보람찬 일이라고 강조한다. 어쩌면 종의 보존에 이바지하는 일이니 가장 훌륭한 일 일지 모른다.
둘째, 노인은 전쟁이나 경제 공황 등 앞으로 일어나서는 안 될, 하지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극단적인 일을 직접 경험한 세대다. 그들은 그런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를 후세대에 전할 의무가 있다. 신 386 세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해방 전후의 혼란, 한국 전쟁, 궁핍과 개발 그리고 군사 독재 등을 직접 겪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이 그런 극단적인 일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던 것은 다른 이들의 희생을 딛고 섰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역사 앞에 참회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가감 없이 후세대에 전하는 데 나서야 한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혜를 앞으로 올 위기에 어떻게 활용할지는 온전히 후세대의 몫이다.
셋째, 노인은 인간관계를 조율하거나, 봉사 활동을 하거나 혹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안에 접근하는 데는 유의미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니 팔순 가까운 나이에도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기 어려우면 당장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신음하는 소수자를 돕는 봉사 활동에 나서라. 평생 위에서 군림하기만 했으니, 세상을 뜨기 전에 밑에서 섬기는 경험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런 너는 그 나이가 되어서 뭘 하는지 보자고? 걱정하지 마라. 당신들 신 386 세대가 하도 설치는 통에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명줄이라도 붙들고 살지 걱정이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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