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 '자폭 테러'…분당으로 가나?

[전망] '열린새누리당'으로 전락…보수 분화의 지각변동

파국만 남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거부함으로써 새누리당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새누리당은 '협치'를 통해 박 대통령이 원하는 법안을 처리하고자 했으나, 박 대통령 스스로 거부하면서 사실상 물건너 간 것처럼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혁신위원장을 인준하는 상임전국위원회는 "친박의 자폭 테러"로 무산됐다. 비박계 혁신위원장은 곧바로 사퇴했다. 과장을 조금 섞으면 친박계의 '친위 쿠데타'가 발생한 셈이다.

박 대통령과 친박계 의원들이 급속도로 결집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특히 상임전국위 무산은 당헌 당규상으로 사실상 유일한 대표나 다름없는 정진석 원내대표에 대한 불신임으로까지 읽힌다. 매우 심각한 일이다.

향후 관리형 비상대책위원회와 과거 '김문수 혁신위'와 같은 존재감 없는 혁신위원회가 구성되면 곧바로 전당대회 정국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날 상임전국위를 무산시킨 친박계의 기세로 봐서는 전당대회에 사활을 걸 것으로 보인다.

리더십에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된 정진석 원내대표의 힘은 급속도로 빠지게 돼 있다. 사사건건 당 대표의 결재를 받아야 하고, 청와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물론 변수는 있다. 비박계 집단 탈당이나 박 대통령 탈당 요구 등으로 새누리당이 조기에 분열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국은 혼돈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교체하고, 당이 비상대책위원 명단을 발표했던 지난 15일까지만 해도, 당청이 모종의 시그널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협치를 거부하고, 마치 짜여진 듯 곧바로 친박계 의원들이 비대위 인선을 "쿠데타"에까지 비유하며 정 원내대표를 비토하자, 상황은 명확해졌다.

친박계의 목표는 박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계파의 생존이다. 대권을 빼앗기더라도, 야당으로서 계파의 틀을 유지하고 있으면 안위가 보장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여기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영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친박계 홍문종 의원 등은 반기문 영입론을 적극 띄우고 있다. 차세대 인물까지 갖추겠다는 것이다.

계파 갈등으로 총선에서 패배한 후 계파 갈등이 더욱 심화되는 모습은, 어디에선가 많이 봤던 익숙한 모습이다. 꼭 10년 전인 2006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열린우리당을 떠올릴 수 있다. 대선 주자였던 정동영 당시 의장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김무성 대표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극심한 인물난에 시달리던 열린우리당은 상처받은 친노 주류에 대항해 비노의 분화를 경험했다. 구심점이 없었던 비노는 다양한 계파를 형성했고, 당은 비상체제를 만들다 부수기를 반복했다. 대선을 앞두고는 집단 탈당을 감행, 아예 당을 깨 버렸다.

친박계의 노골적인 보이콧으로 상임전국위가 무산된 모습에서 열린우리당식 운명의 전조를 느낀다고 해도 과하지는 않은 것 같다.

새누리당이 이 최악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삼은 비박계가 전당대회에 친박 세력을 누를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인물을 출마시켜 당선시키는 방법이다. 둘째,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깨끗하게 분당으로 가는 길이다.

전자의 문제는 앞서 언급했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그나마 대내외적으로 인지도를 가진 인물은 유승민 전 원내대표나 김무성 전 대표 정도인데, 유 전 원내대표는 현재 탈당 후 복당이 어려운 상황이고 김 전 대표는 패장으로 이미 대표직을 내려놓은 상황이다.

후자의 문제는 내년 대선을 바라봤을 때 어느 계파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친박계는 소멸하기는커녕 대통령의 힘을 무기로 존재감을 확장하려 시도할 것이다. 만약 비박계가 새로운 보수 정당을 만들더라도, 친박계와 일부 극우 세력들의 힘 없이는 단독으로 대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정치 지형, 계파 갈등은 보수의 분화가 이뤄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구축해주고 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 정두언 의원 등이 언급하고 있는 '정계 개편'의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것이다. 특히 야당이 분열돼 있는 현 상황이 새누리당의 분화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야권은 이미 분화에 분화를 거듭해 왔다. 이들은 협상과 타협이 성공했던 경험과 실패했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고 실험해 왔다. 그 대가는 무기력한 야당의 모습, 패배에 익숙한 야당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나, 이는 민주주의가 성숙하면서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잡탕'식으로 극우까지 껴안았던 보수는 이제서야 분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정당 발전을 위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년 대선 일정과 관계 없이 새로운 보수 정당의 출연은 점점 가시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가 좋은 계기를 제공해 준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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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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