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 젊은이여, 차라리 꿈을 버려라!"

[프레시안 books] <희망 난민>

2008년 5월 14일. 114일 동안 이어질 세계일주 크루즈 단체 여행 '피스 보트'가 일본의 요코하마 항에서 출발했다. 대부분 20~30대 젊은이로 구성된 900명 이상의 인원은 1인당 최저요금 149만 엔(약 1500만 원)을 비영리 단체 '피스 보트'에 지불하고 세계일주에 합류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일본 시중의 크루즈 여행 경비에 비하면 매우 저렴한 가격이다.

2010년의 세계일주 경비는 99만 엔(약 1000만 원)이었다. 돈을 더 적게 내고 합류하는 방법도 있다. 피스 보트의 자원봉사자로 일하거나, 시중에 안내 포스터를 붙이면 일정액을 차감한다. 승선 요금이 99만 엔일 경우, 포스터 3000장을 붙이면 무료로 피스 보트에 승선할 수 있다. 이를 '젠쿠리(전부 클리어)'라고 한다. 매년 젠쿠리 승객이 일부 합류한다.

피스 보트는 이름 그대로 '평화의 배'다. 비영리 단체 피스 보트는 세계 평화를 기치로 내걸고 이 여행을 진행한다. 관광과 세계 평화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

현대 일본의 소외된 젊은이의 현실을 말하는 신간 <희망 난민>(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민음사 펴냄)은 이 괴상한 세계일주 여행을 정리하면서 격차 사회, 무업 사회 등의 용어로 대표되는 희망 없는 오늘날 일본인에게 단념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얼핏 발칙하다 못해, 아주 잘못된 내용의 책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언숙 옮김, 민음사 펴냄)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다. 이 책은 그가 2010년 쓴 데뷔작으로, 2009년 도쿄대학교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에 제출한 논문 <'승인 공동체'의 가능성과 한계 : 피스 보트에 승선한 젊은이를 사례로>를 수정해 완성됐다. 데뷔작이 오히려 한국에 늦게 알려진 셈이다.

저자는 2008년 진행된 피스 보트 프로그램에 직접 합류했다. 그리고 참가자 중 젊은이를 대상으로 샘플 조사를 실시해 이 책의 기초 자료를 준비했다.

▲ 오늘날 젊은이에게 한국은 거대한 난민 보트일 뿐일지도 모른다. 망망대해에서 "꿈을 가져라"는 말은,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는 이에게는 고문일지도 모른다. ⓒ프레시안(최형락)

피스 보트가 세계 평화를 지향함은 이미 소개됐다. 1983년 이 프로그램이 시작했을 때 주제는 더 급진적이고 명확했다. 당시 운동권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반전 평화의 배' 혹은 '반핵의 배'를 기치로 내걸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전쟁터를 돌아보고, 이오지마와 티니언 섬 사이 바다에 '핵폐기물 해양 투기 반대'를 위한 기념행사를 진행했으며, 일부 참가자는 괌의 미군 기지에 침입하기도 했다. 장소가 다를 뿐, 우리의 1980~90년대 학생운동과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피스 보트'라는 이름으로 대중화했다. 단순 세계일주를 해보고자 하는 사람, 자아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도 자유롭게 승선했다. 저자가 참관한 2008년의 여행도 그랬다.

출항 후, 배 위에서 반전의 자취가 남은 프로그램이 일부 진행됐다. '9조 댄스'가 대표적이다. 반 전쟁 국가 일본을 상징하는 평화헌법 9조를 수호하자는 의미를 춤으로 묘사하는 대회다. 딱 이 정도다. 승객 일부는 "세계 평화를 위해" 이 배에 탔다고 저자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는 미군의 주둔 문제, 핵문제 등에 무관심하다. "남들이 알려주는 건 원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대답할 뿐이다. 세계 평화라는 목적은 수면 아래로 조용히 가라앉은 셈이다.

대신 승객은 배 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 여행에서는 특별히 정해진 프로그램을 찾기 어렵다. 자원봉사자들이 114일간 선내 소식지를 제작한다. 각자가 진행하고픈 프로그램, 예컨대 요가 강습, 빨리먹기 대회 등의 아이디어를 선내에 부착하고, 스태프는 이를 정리해 선내 프로그램으로 안내한다. 즉, 피스 보트는 완전히 독립된 공간에서, 일상과 완전히 유리된 기간 승객들이 자발적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에 누가 참가할까. 저자는 조사를 통해 젊은이 대부분이 불안한 고용 형태에 시달리거나, 일자리가 없거나, 설사 정규직원이라손 치더라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 놓여있었다는 점을 발견한다. 일자리를 과감히 때려치워도(한국도 마찬가지지만, 4개월간 휴가를 자유롭게 주는 회사가 일본에 넘쳐날 리 만무하다) '괜찮다'고 여길만한 집단이 주로 승선했다. 저자는 피스 보트가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에 지친 젊은이들을 위한 작은 휴식처'였다고 정리한다.

이제야 이 배의 실체가 보인다. 이 배는 희망을 잃어버린 현대 일본의 난민, 즉 니트족이나 프리터 정도로 요약되는 일본 젊은이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일상의 도피처다. 현대 일본에서 젊은이가 희망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일자리는 극히 한정되었으며, 그 한정된 일자리는 젊은이를 잔인하게 착취한다. 자발적 착취를 선택하기도 쉽잖다. 고교 졸업 정도의 학력으로 부모 세대 수준의 안정적 삶을 꾸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내 집이 생기므로) 부모에게 얹혀 사는 젊은이가 부모가 죽기만 바라는 사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저자는 피스 보트에서 무료하게 퍼질러지고, 조용히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꾸려가던 이들이 여행이 끝난 후에도 공동 생활 등의 새로운 커뮤니티를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피스 보트에서 일본 사회의 난민이 되어버린 현대 일본의 젊은이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강조한다.

단념해야 한다. 저자는 일본의 젊은이에게 희망을 버리라고 가르쳐야 한다고 주문한다. 왜냐하면, 일본에는 이미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은이에게 같은 처지의 이들끼리 공동체를 꾸리도록 가르치고 저임금의 생활에서 즐거움을 찾도록, 소득이 적은 이들끼리 공동 생활하며 서로를 보듬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희망 난민>이 있었기에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 나올 수 있었고, 젊은이에 대한 담론을 전복한 '사토리 세대(달관 세대)' 개념이 대중에 회자될 수 있었던 셈이다.

이 주장은 우리가 계속 되묻게 한다. 과연 그래도 되는가. 피난처에 안존한들,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실제 이 젊은 연구자의 책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큰 논란을 일으켰다. 저자 역시 책에서 단념의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단념을 가르치는 건,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들 뿐이라고 말이다. 젊은이들이 오아시스에 안주하는 이상, 사막을 녹화할 생각은 버리게 된다.

▲ <희망 난민>(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이런 논란에 관해 저자는 "(차근차근 꿈을 향해 전진할 수 있도록 구성원을 지원하는) 경력 사다리조차 충분히 갖추지 못한 사회에서 꿈을 좇으려면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나도 크다"며 "단념할 수 있었던 사람은 행복한 셈"이라고 반박한다. 대신 저자는 단념할 수 없는 사람이 계속 꿈을 좇아가면 된다고, 너무나 편리하게 결론짓는다. 저자의 이 말은 결국 사회 변혁은 엘리트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엘리트가 아닌 이상 세상을 달관하고 주어진 환경에 맞춰 사는 게 바람직하다는 해묵은 엘리트 이론으로 변주될 수밖에 없다는 위험을 지닌다.

매우 불편한 입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으나, 이 책의 비관적 현실 진단은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당장 이 배에 탔던 젊은이 중 적잖은 이가 비관적 삶의 탈출구로 해외 취업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오늘날 '헬조선'으로 변한 한국의 현실을 정확하게 투영한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정리했듯, 이미 한국의 젊은이가 처한 현실은 일본보다 더 비관적임이 온갖 통계 지표로 입증된다. 저자는 여전히 '할 수 있다'며 희망 고문을 이어가는 한국 사회가 일본보다 더 잔인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한국 사회 전체가 희망 난민 수용소 아니냐며 이 책을 읽은 한국의 독자가 분노할지, 울음을 터뜨릴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책의 결론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이 비판적인 현실 인식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오늘날 청춘의 현실을 명확히 인지해야 이를 극복할 현실적 대안을 찾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미 사막이 된지 오랜데 사막화 현상을 우려해 무슨 소용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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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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