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동 300번지 부순다고 사진 찍으라니…"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사라진 조선물산장려운동 총본산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총본산 낙원동 300번지에 대한 정세권 선생 가족들의 추억은 남다르다. 정세권 선생 가족들과 수차례에 걸쳐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가장 많이 그리고 생생히 들었던 부분은 낙원동 거주 시기의 기억이었다.

"1920년대 당시에는 계단이 있는 집이 귀해서 낙원동 300번지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와서 층층다리를 오르내렸다. 옥상에는 동생을 위해서 그네를 매었는데 아이들이 매일 모여들어 아버지가 시청에 이야기를 해서 파고다공원안에 어린이 놀이터가 만들어졌다.

4층 건물입구 정문에는 아버님 개인 건축회사인 '건양사' 간판과 '조선물산장려회'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 (중략) ~ 2층에는 조선물산장려회 회의실이 있었다. 월례 모임이 있는 날에는 콩나물 무 대파 양지 곱창 쇠고기 등을 넣고 국을 많이 끓이는 날이었고, 조선물산장려회 회원님들이 모이는 날이었다.

안재홍, 여운형, 김도연, 명세재 선생, 이극로 박사 등 어린 나이인데도 많이 들어서 귀에 익은 어르신네의 함자들이다."(<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대구 : 학사원 펴냄, 1998년), p 44-46)

"낙원동에 4층집을 지으셨죠. 벽돌로. 우리가 거기서 살 때, (아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련식 패치카를 개발하고 설치하셨어요. 벽돌이 전부 난로에요. 여름에는 안 땠지만, 겨울에는 거기에 감자와 고구마도 구워 먹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식 집에서 살았죠. 파고다공원 (현, 탑골공원) 북쪽 후문 왼편에 위치해서 파고다공원이 우리 집 마당같았어요."(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3.10.04)

꼭대기층이 비록 정세권 선생의 가정집이라 보여도, 사실 가정집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창고와 공장에 진배없었다.

"193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 수해가 발생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남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때 우리 아버님이 남도 사람들 무명을 다 사들였어요. 그걸 3층집에다 전부 갖다 놓으셔 가지고 우리 집에서 옷을 지었어요. 조선의 농촌에서 짠 무명과 삼베를 트럭으로 가지고 와서 그걸 밤새도록 우리가 자르고 꿰맨 후에 이틀인가 후에 남도로 다 보냈어요. 저도 국민학생이었는데 그 때 하도 바느질을 해서 여기가 이렇게 해졌어요."(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5.09.01)

▲ 조선물산장려회 총회 광경.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비록 정세권선생의 첫째 따님은 당시 초등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조선물산장려회와 관련된 활동인지를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경성제국대학(인근)에 염색공장이 있었어요. 거기에 다니시면서 염색을 배우셨어요. 그리고 옷에 염색을 해서 입히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동국민학교 다닐 적에 무명에다가 물감을 들여서 감색 외투를 입고 다녔어요. 그런데 학교에 그걸 입고 가면 아이들이 놀렸어요. (교동초등학교는 당시 부유층 귀족자제들이 다닌 학교였다) 그래도 우리 아버님이 하시는 거니까 정말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어요."(둘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3.10.04)

"우리 집에서는 일본 물건, 일본 옷은 쓰지도 입지도 못했다. 아버님도 우리 형제도 다 명주나 무실명주 무명베에 검정 혹은 회색, 녹색 등 물감들인 한복과 양복을 입고 자랐다. 그래서 우리 어머님 손은 언제나 물감으로 물들여진 얼룩덜룩한 손이었다. 모시에도 분홍 진분홍 옥색 물감이 들여졌고, 동생 옷은 명주에 주홍색 빨간색 등 물감이 드려진 옷이었다. 당시 종로에 있던 독일물감 파는 집에 가끔 심부름을 간 기억이 있다. ~ (중략) ~ 교동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오면 검정옷에 노란 소매를 달고 패랭모자를 쓴 분들이 광고를 돌렸다. 나는 그 뒤를 친구들과 함께 자주 따라 다녔는데, 광고지를 뿌리면 서로 많이 가지려고 한 기억이 있다. 하루는 (광고지를 뿌리는 분을) 뒤따라 가다보니 낙원동 300번지 우리가 사는 집으로 쑥 들어가기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광고지에는 '우리 살림 우리 것으로'라고 쓰여져 있었다."(<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대구 : 학사원 펴냄, 1998년), p.48)

이어지는 당시 조선물산장려회 활동에 대한 가족들의 회고다.

"2층 건물 내 전시장에는 명주 무명베 삼팔 묵실명주 삼베 모시 생모시 나당 등 조선 땅에서 나는 옷감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옷감 이외에도 각종 조선물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장구 꽹과리 조선종이 갓 참빗 담뱃대 대소쿠리 유기촛대 실패 반짇고리 앗자무늬가 있는 예쁜 상자 등.

아버지 회사 직원들은 이 옷감으로 춘추양복을 만들어 입었다. 이런 옷감들은 아버님이 직접 각지의 특산품 산지를 찾아다니시며 사들인 것이다. ‘평양에 다녀왔다. 전라도에 갔다왔다’ 이런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 당시 학생들 교복 옷감은 일본에서 가져오는 고꾸라지(小倉地)였는데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우리 살림 우리 것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학생들 교복을 국산으로 바꾸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무명베 교복을 배재 경신 대동 휘문 같은 사립학교에서 먼저 입기 시작했다."(<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대구 : 학사원 펴냄, 1998년), p.45)

1923년 시작한 조선물산장려회에 대한 전국적인 호응은 불과 반 년 밖에 가지 못하였다. 하지만, 1929년 정세권 선생의 등장과 함께 물산장려회는 다양한 사업들 - 기관지의 지속적인 발행, 조선물산장려회관의 건립, 조선물품의 전시와 판매, 기부 및 사회사업 -이 일어났다.

명제세 씨 등 사회명망가들로 인해 1923년부터 1929년까지 물산장려회의 명맥을 이어왔다고는 하나, 1929년 이후의 성과는 이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이 사업을 실질적으로 진행하였던 인물인 정세권에게서 기인한다. 1923년 초기 전국적으로 대단한 호응을 받았던들, 그 기세는 1년도 안되어 꺾였고, 1928년까지는 사업 자체를 진행할 여력도 안 된 조직이 정세권이 참여한 1929~1932년 사이 대단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정세권이 조선물상장려회를 실질적으로 탈퇴한 1933년 물산장려회는 다시 쇠락을 길에 빠져 1937년 해체된다.(<근대서지>(정용서 지음, 근대서지학회 펴냄, 2012년),, p.301)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나, 필자의 사견으로는 조선물산장려회의 부흥기는 정세권이 재정적 지원을 하고 실질적으로 이끈 시기와 일치하기에 조선물산장려회는 정세권 선생의 참여(건양사의 참여)가 없었다면 1923년 1년 짜리 운동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 조선물산장려회 광고.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만약 1929~1932년 사이의 성과들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조선물산장려운동에 대해 배웠을까? 가두행진을 하면서 우리 물건을 사자는 캠페인 활동의 의미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나, 실질적으로 생산을 독려하고 판매가 이루어지는 결과물이 없었다면 그 역사적 가치가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물산장려운동의 역사성에 미치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어쩌면 정세권 선생과 건양사의 역할이 없었다면, 물산장려운동은 현재와 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따라서 정세권 선생과 건양사의 역할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하며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필자의 주장에 비약이 있다고 치더라도, 최소한 부흥기를 이끈 정세권의 노력을 알려져야 하고 이는 유족들의 작은 바람이기도 하다.

"명제세 선생님이 조선물산장려회를 이끈 수고를 하신 거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작 (물산장려회의 성공) 이 낙원동 300번지 그 4층 건물이었다고 생각해요. 온 집안 식구가, 그 때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인데도 가서 가위질을 했어야 했어요. 그렇게까지 온 집안 식구가 다 솔선했어요."(째 따님 고 정정식 님 인터뷰, 2015.09.01)

낙원동 300번지는 파고다공원 건물 아케이드를 건설하면서 파고다 뒷 지역을 정비할 때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정세권 선생에 대한 기억이 없듯이, 헐리는 순간 누구도 낙원동 300번지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정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낙원동 300번지를 부술 예정이니, 관심이 있으면 미리 와서 사진을 찍으라고."(막내 따님 정남식 님 인터뷰, 2015.10.04)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총본산은 이렇게 그 누구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명동에서 낙원상가아파트를 볼 때, 탑골공원 후문 좌측에 1930년대 물산장려운동을 조선전국에 재점화시킨 총본산이 있었음을, 역사적 붉은 벽돌 건물이 우뚝 서 있었음을 기억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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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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