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미국이 북한과 몰래 바람 피면 어쩔텐가?"

[정세현의 정세토크] 북미 평화 협정 논의, 남한은 낙동강 오리알?

북한의 '수소탄' 시험과 장거리 로켓인 '광명성 4호' 발사를 규탄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안 도출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제재가 예상되는 가운데, 북한에 이른바 '끝장 제재'를 부과해 핵과 미사일 개발을 막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구상이 나름 효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재가 나오게 된 과정을 보면 박근혜 정부의 '대북 압박 일변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과 중국의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안보리 제재에 합의하면서도 북한과 대화할 수 있다는 여지를 열여뒀다.

미-중 양국 외교장관은 23일(현지 시각) 회담을 가진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제재는 대화를 위한 수단이며, 비핵화를 위한 대화를 진행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에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북미 양국이 지난해 12월 평화협정 체결 문제로 접촉을 진행했다고 보도했고, 미국 역시 이를 시인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직후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를 배치하겠다고 공언했던 한미 양국의 움직임에도 제동이 걸렸다. 지난 23일 예정됐던 한미 공동 실무단 약정 체결이 미국 측의 요청으로 돌연 연기됐고, 급기야 25일(현지 시각) 미국 태평양사령관은 "한국과 미국이 사드 배치 문제를 협의하기로 합의한 것인지, 양국이 아직 사드를 배치하기로 합의하지는 않았다"며 미묘한 입장 변화를 보였다.

이에 북한에 대해 강한 압박 정책을 추진하며 미국만 바라보고 있던 박근혜 정부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박근혜 정부 내 관료들이 미국과 중국의 변화된 움직임을 미리미리 파악하고 대처해야 하는데 '임전무퇴'식으로 밀어붙이기만 했다"고 평가했다.

정 전 장관은 "한국은 미국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는 줄 알고 '강력한 대북 제재'를 해야 한다며 지붕 위에 올라가서 고함을 쳤는데, 오히려 미국은 지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치워 버리고 옆 사람인 북한과 대화하고 있었던 셈"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외교나 안보 영역에서 자기 중심성이 없으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막말로 미국은 언제든지 우리 몰래 바람을 피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면서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행보를 소개했다.

정 전 장관은 "베트남전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쥐도 새도 모르게 북베트남과 판을 다 짜놓고 남베트남 정부에게 평화 협정에 서명하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베트남 정부는 키신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미국이 협상하는 동안에도 북베트남에 대대적인 폭격을 해줬기 때문"이라며 "남베트남은 그게 '성동격서' 전략인지 전혀 몰랐다. 결국 이렇게 미국은 뒤로 혹은 물밑으로 움직일 수 있다. 이런걸 읽어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터뷰는 지난 25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 발사 이후에 한국이 미국을 등에 업고 이른바 '끝장 제재'를 추진하려고 했지만 분위기가 좀 바뀐 것 같습니다. 현지 시각으로 23일에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회담을 가지면서 제재는 대화를 위한 수단이고, 비핵화를 위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인데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비핵화가 북한의 비핵화인지 한반도의 비핵화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한-미-일의 양자 제재로 북한을 끝장내겠다는 계획이 미중 간 외교장관 회담을 거치면서 유엔 안보리 제재로 이동하고 있고, 대화를 하겠다는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세현 : 지난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에 한-미-일 3국은 유엔 차원의 대북 제재 결의안 도출을 위해 노력을 했는데, 지난 2월 7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때까지도 중국과 접점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핵실험과 로켓 발사가 한 달 간격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제재 내용을 강하게 해야 한다는 중압감도 한-미-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과거 대북 제재보다 훨씬 강력한 제재여야 한다는 한-미-일의 요구에 대해 처음부터 선을 그었습니다. "제재가 목적이어서는 안된다", "민생까지 괴롭히는 제재에는 동참할 수 없다"라고 밝혔죠.

결국 4차 핵실험이 두 달째로 접어드는 현시점에 비로소 접점을 만든 모양새는 됐습니다. 그런데 이게 중국이 양보했다거나, 한-미-일의 끈질긴 요구에 중국이 마지 못해 "그래 그럼 대충 끝내자" 하는 식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제재를 위한 제재가 아니라 문제를 풀기 위한 제재가 되어야 한다는, 그래서 대화 쪽으로 퇴로를 열어 놓아야 한다는 입장이 미-중 간의 '담판'을 통해 결론으로 도출된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지난 17일 왕이 외교부장이 비핵화와 평화 협정 체결의 병행 추진을 제안했고 미-중 외교 장관 회담이 열리는 와중에 한미 양국은 지난 23일 오전 11시에 사드 배치 관련 공동 실무단 구성을 위한 약정을 체결하려고 했지만, 이를 한 시간 앞두고 미국의 요청으로 연기됐습니다.

정부는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와 사드 배치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선을 긋고 있지만, 사실상 이는 연관돼있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미중 간 외교 장관 회담을 거치면서 양국이 담판을 지었고 사드 문제는 뒤로 밀린 셈인데, 한국 정부는 이러한 과정에서 완전히 제외됐던 것처럼 보입니다.

정세현 : 우선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12월 미-북 접촉을 즉시 알지 못했을 겁니다. 미국이 우리한테 알리지 않고 북한과 만났을 겁니다. 박근혜 정부는 한미 관계가 지금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기회가 될 때마다 자랑했는데, 대체 외교부는 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과 북한이 만났다면 유엔 대표부에서 만났을 텐데, 한국의 유엔대표부랑 주미 한국 대사관은 뭐한 겁니까? 한미 관계가 '최상'이라면 하다못해 미국 국무부 실무자들로부터 귀띔이라도 들었어야 했던 것 아닙니까?

이런 사안은 미리미리 파악하고 대처해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의 외교 안보팀은 '임전무퇴' 식으로 밀어붙이기만 했습니다. 한국은 미국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는 줄 알고 열심히 '강력한 대북 제재'를 해야 한다며 지붕위에 올라가서 고함을 쳤는데, 오히려 미국은 지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치워 버리고 옆 사람인 북한과 대화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난 1월 27일 케리 장관이 베이징(北京)에 갔을 때 왕이 부장과 했던 대화의 내용을 여기저기서 조합해보니, 이미 그 때 회담 내용이 이번 23일에 발표한 것과 상당히 유사했습니다. 이런 낌새를 박근혜 정부가 얼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걸 못했기 때문에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대북 제재의 최전선에 서버린 것입니다.

"지금 기미가 이상합니다. '강력한 대북 제재'에 너무 앞서 나가면 우리만 덩그러니 남을 것 같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움직임을 체크하고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통령에게 이야기해야 하는데 대체 관료들이 뭘하고 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사안에 있어서 한국이 고립됐다는 책임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린 겁니다.

▲ 존 케리(오른쪽) 미국 국무 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지난 23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국무부 청사에서 회담을 가진 후 기자회견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사드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갑자기 약정 체결을 연기하겠다는 미국의 통보를 받아들였고, 이미 예정됐던 날짜에서 이틀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영원할 것 같은 한미 동맹만 믿으면서 미국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가 중간에 뒤통수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일입니다.

지난해 말 미-북 간에 접촉이 있었다는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 이후 국무부의 존 커비 대변인은 북한이 먼저 평화 협정 논의를 제안했다면서 "우리는 제안을 신중히 검토(carefully considered)한 후 비핵화가 논의에 포함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고 말했습니다. 제안을 '신중히 검토'했다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요. 이건 미국이 북한과 접점을 만들 각오를 하고 접촉에 나섰다는 이야기입니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리수용 외무상의 유엔총회 연설부터 평화 협정 이야기를 계속 언급했습니다. 북한이 뉴욕 채널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메시지를 미국에 보냈을 텐데, 만약 미국이 이른바 '전략적 인내' 입장을 고수했다면 북한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입장을 고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만나서 북한의 이야기를 들은 겁니다. 이번 북-미 접촉이 이뤄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북한과 미국이 접점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제3자가 조정하면 양측이 다시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북한은 평화 협정 체결을 앞에 두고 비핵화 논의를 그다음에 하자고 했을 겁니다. 그동안 2005년 9.19 공동 성명, 2007년 2.13 합의 등 여러 합의가 있었지만, 비핵화를 위한 행동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마다 미국이 뭔가 트집을 잡아서 뒤집어 버렸던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 협정과 비핵화를 묶어서 한다고 해도 미국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북한입니다.

9.19 공동 성명 5항을 보면 "6자는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것도 북한이 요구해서 집어넣은 겁니다. 결국 북한은 이번에도 미국의 요구를 먼저 들어주면 안되고, 동시에 할지언정 처음에는 미국의 행동을 먼저 보장받고 나가야 한다는 식으로 버텼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북한은 그렇다 치고 그동안 북한의 '선행동'을 강력하게 요구하던 미국이 평화 협정과 비핵화의 패키지로 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건 지난 2009년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발상이자 9.19 공동 성명에 있었던 1항과 4항을 업그레이드 한 셈입니다. 미국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17일 왕이 부장의 제안은 미-북 접촉 동향을 감지한 중국이 6자 회담 의장국으로써 이 문제를 치고 나가면서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한 발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왕이가 이야기한 것은 9.19 공동 성명에 이미 있는 것이고 힐러리 전 장관이 2009년에 제안했던 것을 재활용하는 수준이지만, 지금 이 시기에 이 안을 던진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후 23일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을 자신의 안대로 움직이도록 설득한 겁니다. 대신 중국은 미국이 그동안 노래를 불렀던 '강력한 대북 제재'의 모양은 갖춰주겠다고 약속했을 겁니다.

미국의 목표는 비핵화? 핵 동결!

프레시안 : 한국이 '주도하겠다'는 양자 제재에서 유엔 안보리에 의한 다자 제재와 협상 쪽으로 무게추가 옮겨지고 있는 상황인데, 한국의 언론들은 '북한의 비핵화'라는 말을 쓰고 왕이는 '한반도 비핵화'라고 표현했습니다. 지난 1월 케리와 왕이가 만났을 때는 '북핵 동결'이라고 했구요. 용어를 한 번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함께 중요한 지점은 앞으로 6자 회담이 열릴 수 있을지 여부인데요. 가능성이 있다면 회담은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요? 미국과 중국이 담판을 했다고 보이는데 한국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정세현 : 지난 연말에 미북 접촉 당시 미국이 썼던 용어는 북한 핵 '동결'이었습니다. 비핵화를 평화 협정의 테두리 속에서 다루되, 일차적으로 북한의 핵을 동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하기 이전에 핵 개발을 중단시키고, 그렇게 해서 평화 협정까지 가보자는 것이겠죠.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북한의 핵도 용납할 수 없지만, 주한 미군이 언제든지 끌고 들어올 수 있는 미국의 핵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주한 미군 핑계를 대고 미국이 한반도 해역 또는 영공에 핵무기를 전개하는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북한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중국과 같은 입장입니다. 북한은 1991년 미군의 전술핵이 한반도를 떠난 것을 두고, 자신들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남한 역시 고농축, 재처리 등 핵과 관련한 10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묶여버렸습니다. 이게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미국의 핵 전략 자산이 한반도에 드나들고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금지돼야 한다는 것이 북한 입장입니다.

남한은 한반도 비핵화를 거론할 때 북한의 비핵화만 이야기합니다. 중국이나 북한과 다른 입장인 겁니다. 그런데 이게 미국과도 차이가 좀 있습니다.

미국은 핵 동결을 이야기합니다. 북한이 비핵화돼 버리면 한국의 무기 시장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설사 왕이가 비핵화와 평화 협정을 동시에 추진하자고 제안해서 실제 협상이 시작된다고 해도 미국은 핵 동결부터 시작하자고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바꾸는 선언을 할 수 있겠죠.

▲ 지난 25일(현지 시각) 미국 국무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참석한 버락 오바마(가운데)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이러면서 미국은 북한의 핵을 관리하려 할 것입니다. 북한의 핵이 없으면 남한이 무기를 사지 않습니다. 최대 무기 수입국인 한국이 날아가 버리는 것을 미국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무기 시장 유지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미국은 핵 동결 혹은 비확산 정도를 원할 겁니다. 물론 중국도 시작은 동결, 비확산 정도에서 마무리하자는 식으로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의 핵이 없어지는 것이 편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합의 가능한 목표는 아니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국을 제외한 미국, 중국, 북한이 타협할 가능성에 대해 항상 열어둬야 합니다. 이를 전제로 우리의 북핵 정책 목표를 수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비핵화 문제 관련해서 박근혜 대통령은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중국이 비핵화에 동의했으면서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며 따지는데, 사실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는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북한의 비핵화가 아니라 미국의 전술핵도 한반도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비핵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비핵화를 요구하지만 미국은 분명 비확산에서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북한 비핵화가 되면 미국의 핵우산도 접어야 하는데, 미국이 이런 선택을 쉽게 할 리가 없습니다. 또 북한의 비핵화만 요구하다 보면 중국의 협조를 얻어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대통령에게 이해시켜야 합니다. 한반도 비핵화를 하려면 반대급부가 나간다고 입력을 시켜줘야죠. 대통령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으면 외교부라도 나서서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화는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합니다. 빨리 이해시킬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덜 소외되고 그나마 망신을 덜 당할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에서 미국과 중국이 접점을 찾으면서 주한 미군의 한반도 내 사드 배치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는데요. 만약 6자 회담이 제대로 굴러간다면 사드 배치도 없던 일이 될까요?

정세현 : 미국이 동아시아 정책을 끌고 나가는 과정에서 사드 문제가 불거진 만큼, 일단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 때나 꺼낼 수 있는 카드로 활용하리라고 봅니다. 미국이 그나마 이렇게 해줘야 한국 정부도 덜 창피합니다. 만약에 미국이 주한 미군의 사드 배치는 완전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면 박근혜 정부가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바마 정부가 말년인 데다가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예상하기는 어렵지만, 정권이 바뀌더라도 동아시아에서의 미국 패권 유지는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여전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하려면 미국 대 중국의 지분이 '100대 0'은 아닌 것 같다는, 즉 중국에 일정 부분 지분을 나눠줘야 한다는 생각에 미국이 중국과 손을 잡고 일단 현재 상황을 넘기는데 속도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협상은 다음 정부에게 맡기는 것이죠.

사실 오바마 정부가 '북핵 동결' 정도만 만들어서 다음 정권에 넘겨주는 것만 해도 큰 업적입니다. 취임 초에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외상으로 노벨 평화상을 가져간 오바마 입장에서는, 비록 북한의 비핵화는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핵 활동을 중지시키는 성과는 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오바마 대통령이 이 정도도 하지 않고 임기를 마친다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의 능력을 키웠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북핵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아시아에서 중국에 밀렸다거나 '100대 0'을 고수하려다가 중국에 지분을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북핵 동결이라도 만들어 놓고 가야 합니다.

또 5년 동안 북핵 문제를 방기했다는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북핵 동결은 필요합니다. 케리 장관과 백악관에서 지난해 북핵 동결이라는 단어를 꺼냈다는 이야기는, 결국 이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전략 없이 움직인 박근혜 정부, 대가는?

프레시안 :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부터 2월 7일 사드 배치까지 이어진 박근혜 정부의 일련의 행보를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로 기존 입장과 180도 뒤집힌 행태를 보였습니다. 이렇게 된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요? 혹시 미국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것은 없었을까요?

정세현 : 위안부 합의의 경우 일본 총리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완전히 뒤바꿔버린 건데, 박 대통령이 본인이 어떤 말을 했는지 잊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내보내는 메시지가 상대방한테도 전달되기 때문에 사실 외교 문제에서 단어 하나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용어를 잘 선택해서 퇴로가 있는 단어를 써야 하거든요. 미국에서 박 대통령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작정하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닐 텐데, 박근혜 정부가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야기한 것은 이해하기 힘든 행태입니다.

전략적인 차원에서 보면 미국 입장에서는 한일 관계가 불편하면 안됩니다. 한미 관계를 잘 가져가려면 미국이 생각했을 때 한일 관계라는 '소의(小義)'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미국은 한-미-일 3각 동맹이라는 '대의(大義)'에 의해 빨리 해결하고 넘어가자고 했을 것이고 박근혜 정부는 그 말에 토를 달지 못하고 끌려다녔을 겁니다.

▲ 윤병세 외교장관(오른쪽)과 일본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이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협상 최종 타결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전두환 대통령 당시 아웅산에서 한국 외교관들이 희생당하는 테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북한에 대한 보복은 없었고, 이산가족 상봉까지 진행했습니다. 1988년에 개최될 서울 올림픽 때문이었습니다. 전략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맞춰서 일을 추진한 건데요. 박근혜 정부의 전략 목표는 대체 무엇이길래 이러한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북한 붕괴가 목표인 것처럼 보이는데, 전략 목표를 제대로 세운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듭니다.

정세현 : 미국은 중국 압박으로 전체 판을 짜고 있는데, 여기에 잘 편승하면 이번에 북한을 붕괴시켜서 자신의 임기 중에 통일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졌던 것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실 유엔 제재가 소위 '허당'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양자 제재가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미국이 확실하게 밀어준다면 사드 배치까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북한이 반발하면 미국이 대응해줄 테니 북한은 끝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렇다고 중국이 미국과 전쟁을 치를 수도 없고, 으르렁거리다가 결국 중국까지 경제 제재에 함께 들어가면 북한은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이런 환상에 빠져서 그동안 이렇게 세게 나간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미-북 간에 접촉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고 할지라도 '별거 있겠냐'며 그냥 지나가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휴민트'를 동원에서 정보 수집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었을 수도 있죠.

프레시안 : 중국의 한 전문가에 따르면, 북한이 핵 실험을 한 뒤에 외교관들이 아주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핵실험 설명을 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정세현 : 만약 북한의 핵실험이 자기들이 말하는 대로 '핵-경제 병진 노선' 추진의 일환이었다면 그렇게 설명하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즉,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미국이 자신들에 대한 적대시 정책만 거둬들인다면, 협상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북한은 "차후에 비핵화와 평화 협정 관련 협상을 할 때 카드를 갖기 위해 핵실험과 같은 것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보고 동북아 평화를 깬다는 이야기만 하지 말고, 다음 단계의 동북아 평화로 넘어가기 위한 일종의 디딤돌로 생각해 달라"라고 설명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북한은 중국에게 "미국이나 일본, 한국이 우리를 목 졸라 죽이자는 제안을 해도 동조하지 말아달라.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제재를 위한 제재는 안 된다든지, 민생을 어렵게 하는 제재는 할 수 없다는 입장 등을 계속 지켜만 준다면, 우리로서는 때를 기다릴 수 있다. 중국이 다리만 놓아준다면 당신들 체면도 세워줄 수 있다"라는 설명도 함께했겠죠.

그런데 남한은 전략 목표도 없고 전술적 목표도 없어 보입니다. 그저 미국에 협조하면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가진 겁니다. 우리도 꾸준히 입장을 설명하면서 북한이 사고를 치지 않도록 만들든지, 아니면 제재 결의안이 하루속히 결론 나도록 움직이든지 했어야 했는데, 기본적으로 해야 할 역할도 제대로 못 한 셈입니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는 북한만 때려잡으면 모든 일이 풀릴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국가 안보' 개념 자체가 잘못 정립돼있는 것 같습니다.

정세현 : 협의의 안보 개념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을 상대로 한 '피스 키핑(Peace Keeping)'이 안보의 전부인 줄 알고 있는데, 피스 키핑을 하면서도 여기에 들어가는 우리 국방비가 줄어들 수 있게 북한의 대남 위협을 감소시키는 이른바 '피스 메이킹(Peace Making)'을 하는 것이 진짜 안보입니다.

미국 백악관의 안보 보좌관은 전 세계에서 군사와 외교 균형을 잡으면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해 나가는 전략을 짜는 사람입니다. 안보라고 해서 전투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전투가 아니라 전쟁, 전술이 아니라 전략, 군사가 아니라 외교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박근혜 정부는 북한만 막으면 되고 미국만 등에 업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 겁니다.

외교나 안보 영역에서 자기 중심성이 없으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막말로 미국은 언제든지 우리 몰래 바람을 피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외교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나' 외에는 모두 '남'이라는 투철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자기 중심성의 바탕에서 냉철하게 국가이익을 판단해야죠. 미국이나, 중국, 일본 등 주변 강대국들은 모두 이런 원칙 아래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군부나 외교 관료는 대미 의존이 너무도 심각합니다.

베트남의 경우를 봅시다.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쥐도 새도 모르게 북베트남과 판을 다 짜놓고 남베트남 정부 보고 평화 협정에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베트남 정부는 키신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협상하는 동안에도 북베트남에 대대적인 폭격을 해줬기 때문입니다. 남베트남은 그게 '성동격서' 전략인지 전혀 몰랐던 것이죠.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협상을 끌고 가기 위해 한쪽에서 폭격을 벌인 겁니다. 결국 이렇게 미국은 뒤로 혹은 물밑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런 걸 읽어야 합니다.

프레시안 : 정부도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야당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면에서 대체 야당의 입장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정세현 : 지금 동북아 외교에서 박근혜 정부가 자기 역할도, 제대로 된 발언도 못하고 있듯이 남북 관계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험악해지고 있는데 야당은 전혀 감각이 없어 보입니다.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북 관계가 이렇게 돌아가는 와중에 통일부가 아무런 역할도 못하는 상황에서 명색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을 계승하겠다는 사람들이 개성공단 폐쇄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든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대화와 협상은 설 땅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데 대화와 협상은 대북 정책의 기본입니다. 더욱이 민주 정부 10년 동안 남북 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해결은 함께 한다는 것이 기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당에는 이러한 역사적 인식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에 대한 감각도 전혀 없어 보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이 '한반도 경제통일위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그런데 경제 통일의 출발점이 바로 개성공단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위원회에서 세미나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차라리 이럴거면 이름을 바꾸든지, 뭘 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데려다 놓고 경제 통일하자고 하면 이게 제대로 굴러가겠습니까?

김종인 대표가 북한 궤멸론에서 살짝 꼬리를 빼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던데, 북한이 핵을 가진 상황에서 햇볕 정책을 수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햇볕 정책 2.0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선도하겠다던 이른바 '끝장 제재'에 의한 북한 붕괴가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 현재 외교 안보라인은 교체돼야 합니다. 그리고 상황이 이 정도까지 됐으면 김종인 대표나 야당이 더 세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겁니다. 대통령을 이렇게 만든 사람을 데리고 어떻게 계속 일하겠느냐는 문제제기를 해야 합니다.

물론 김종인 대표가 경제를 전공했고 외교 안보 사안이 총선의 가장 큰 이슈는 아니지만, 더민주당이 수권 정당이 될 수 있을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외교 안보 문제입니다. 대선 때는 경제 못지않게 이 분야가 중요합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기선을 잡으려면 이때 세게 몰아쳐서 어떤 정책이 국가의 안보와 외교, 통일을 위해 올바른 방향인지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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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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