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수소폭탄'은 내부용…중국, 수습 국면"

[정세현의 정세토크] "광복 70주년, 남북 뭐했나"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에서 공연 예정이었던 북한 모란봉악단이 전격 공연을 취소했다. 이에 지난 10월 류윈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북한을 방문한 이후 풀리는 듯 했던 북-중 관계가 다시 악화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중국은 될 수 있으면 수습하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진단했다. 실제 중국 관영매체인 <환구시보>는 14일 사설에서 "모란봉악단의 전격적인 철수가 중-조 관계에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부정적 영향이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이 괘씸하다는 생각에 중국이 북한에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기 시작하면 북한은 더 이상한 짓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국제사회로부터 북한이 더 고립되고 중국의 입지가 어려워지면서 북-중 관계가 나빠지는데, 이건 미국이 좋아할 시나리오"라며 "북한이 내년 당 대회를 잘 치르고 동시에 사고를 치지 않도록 관리하는 차원으로 접어든 것 같다"고 진단했다.

한편 모란봉악단이 평양으로 돌아가던 날, 제1차 남북 당국회담의 결렬 소식이 들려왔다. 상봉 정례화를 비롯해 이산가족과 관련된 근본 문제 해결을 강조한 남한과 금강산 관광 재개가 우선돼야 한다는 북한의 입장이 충돌하면서, 다음 날짜도 잡지 못하고 회담이 마무리된 것이다.

이에 대해 정세현 전 장관은 "이산가족 상봉, 서신 교환, 생사확인만 해도 금강산 관광과 무게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박근혜 정부는 여기에 DMZ세계생태평화공원 문제와 개성공단 3통(통행·통신·통관) 문제, 드레스덴 선언 이후 박 대통령이 강조하고 있는 환경·민생·문화의 3대 통로 등을 모두 펼쳐 놓았다"며 "금강산 관광 하나만 들고나온 북쪽과는 상당히 달랐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랬는데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요구하는 금강산 관광 재개는 여러 가지 조건을 걸면서 사실상 안된다는 입장이었고, 그러면서도 북한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의제는 받으라고 요구했다"며 "회담도 일종의 협상이라면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것만 받으라고 하니 회담이 잘 될 리가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번 회담 결렬로 한동안 남북관계의 모멘텀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과 관련해 정 전 장관은 "북한은 내년에 있을 당 대회를 맞아 인민들에게 술에 고기를 나눠주기 위해서라도 남한과 관계를 좋게 가져가고 싶어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한이 북한의 관계 개선 움직임을 수용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전망이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북한의 유화적인 태도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지 않다. 일단 3~4월은 한미 연합 훈련이 있고 내년 4월에는 총선이 있다. 총선을 앞두고 남북관계가 좋아질 것 같은 희망을 주는 것은 곧 야당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한 정부가 움직이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인터뷰는 15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지난 10월 9일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류윈산(劉雲山)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과 중국 관계가 풀리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한때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방중이 내년에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왔는데요. 하지만 지난 12일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모란봉악단 공연이 전격 취소되면서 북-중 관계 복원이 다시 요원해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옵니다.

정세현 : 류윈산 상무위원 방북이 북-중 관계를 원활하게 풀어나가는 신호탄으로 해석됐습니다. 여기에 이번에 모란봉악단이 중국에서 공연을 진행하면서, 예전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이 이른바 '핑퐁외교'를 통해 관계를 풀어나갔던 것처럼, 북한과 중국도 '음악외교'로 관계를 복원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결국 모란봉악단 공연은 취소됐습니다.

이렇게 된 주요한 원인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수소폭탄' 발언에 원인이 있었다고 봅니다. 공연 이틀 전인 10일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김 제1위원장이 평천혁명사적지 시찰에 나선 자리에서 "우리 수령님(김일성 주석)께서 이곳에서 울리신 역사의 총성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 조국은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굳건히 지킬 자위의 핵탄, 수소탄(수소폭탄)의 거대한 폭음을 울릴 수 있는 강대한 핵보유국으로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는데 이게 발단이 된 겁니다.

여기서 중국이 김 제1위원장의 수소폭탄 발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이 지나간다면,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북핵 보유가 국제적 우려 사항인 마당에, 중국이 수소폭탄 개발까지 용인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미국과 중국 간에 힘겨루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거기서 중국이 가만히 있으면 미국에 칼자루를 쥐여주는 형국이 돼버립니다.

이에 중국이 먼저 치고 나갔습니다. 중국 외교부 화춘잉(華春瑩) 대변인은 10일 정례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을 받았는데요. 그는 "우리는 현재 한반도의 정세가 매우 복잡하고 민감하며 취약하다고 판단한다"면서 "관련 당사국이 정세 완화에 도움이 되는 일을 더 많이 하길 희망한다"고 답했습니다. 북한의 수소폭탄 보유 발언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겁니다.

그런데 북한 최고지도자의 발언에 대해 중국 외교부가 공식적으로 비판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북한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이른바 '최고존엄'에 대한 비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외교부 대변인의 발언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의 뜻을 담은 것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만큼 무게감이 있는 발언이었다는 겁니다.

그런 데다가 중국의 정치국원급이 공연을 봐주는 식으로 이야기가 됐는데 급을 낮춘다고 하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더 기분이 나빴을 겁니다. 북한에서는 시진핑, 리커창(李克强) 정도는 공연에 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좀 터무니 없긴 하지만요. 그런데 이건 안되고 중국이 정치국원 정도의 인사가 가겠다고 하니, 북한이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는데 정치국원보다 더 낮은 '부부장'급의 인사가 나오겠다고 하니까 더 화가 난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시안 : 김 제1위원장의 수소폭탄 발언 자체도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북한에서 수소폭탄을 보유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경우에 국제정치적으로 어떤 파장이 생길지는 사실 뻔한 대목인데요.

정세현 : 국내 정치용으로 이야기했는데 국제적인 파장이 일어나 버린 겁니다. 북한이 당 대회를 앞두고 사상, 정치, 경제, 군사 강국을 표방하고 있는데, 강성대국이 됐다는 메시지를 주민들에게 보내기 위해서 수소폭탄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북한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불똥이 튀어버린 것이죠.

그렇지만 아무리 내부용이라고 할지라도 표현이나 수위 조절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텐데 모란봉악단이 들어간 당일 날 보도가 나온 것은 국제정치를 보는 북한의 감각에도 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중국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국제사회가 북핵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감각이 좀 떨어지는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 본인들이 국제사회로부터 얼마나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물론 자신들이 주권 국가니까 뭘 하든 상관 없다는 식의 생각도 반영된 것 같습니다.

▲ 지난 10일 중국 베이징에 도착한 모란봉악단. 이들의 공연은 당일인 12일 돌연 취소됐다. ⓒAP=연합뉴스

한편으로는 이번 모란봉악단 철수 조치가 김정은의 대외 이미지에 굉장히 나쁜 영향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충동적이고 불같은 사람이다', '역시 나이가 어려서 그렇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물론 직전 권력자가 세상을 뜨면 권력을 승계하는 것이 세습체제이다 보니 나이를 따지는 것이 큰 의미는 없습니다만, 북한의 세습체제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한 번 더 덧씌운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프레시안 : 북-중 관계를 정상화시키면서 경제 발전의 도움을 얻으려는 계획도 다소 차질을 빚을 것 같습니다.

정세현 : 이번에 잘됐으면 김정은의 방중도 가시권에 진입했을 겁니다. 당 대회 앞두고 중국에 한 번 다녀와야 큰 선물 보따리를 받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5월 초에 당 대회를 하기로 했으면 3~4월에 가닥이 나와야 하는데, 남북대화를 통해 그즈음에 필요한 선물을 확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3~4월 한미 연합 훈련이 예정돼 있으니까요. 그래서 북한 입장에서는 김정은이 그즈음에 중국에 가서 같이 한미 훈련도 비판하고 선물도 챙겨오는 시나리오를 생각했을 겁니다. 그 전 단계로 모란봉악단을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의 경제 사정이 나아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중국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옵니다. 유엔 대북 제재가 아직 살아있는 상황임에도 박봉주 내각이 들어선 이후에 내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것을 전부 끌어내서 쓰면서 다소 경제사정이 나아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그동안 사회주의 경영방식을 고수하는 동안에 내팽개쳤던 것들, 유용한 사용가치가 있는 자재 같은 것들, 어디에 있는지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고 창고에 묵혀뒀던 것들을 다 끌어내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것을 북한에서는 '내부예비'라고 합니다. 이걸 다 끌어내는 것과 동시에 경영방식에도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자율책임 경영제도 허용하고, 농가생산 분조 규모도 줄이고, 거기서 생산된 물품의 일정 부분만 국가에 내고 나머지는 개인적으로 처분하도록 하니까 생산 의욕도 높아지고 전체적으로 생산량이 커졌습니다. 장마당이 늘어나는 것도 이러한 생산량 증가의 결과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내부예비가 고갈되면 밖에서 물자나 투자가 들어와야 합니다. 북한이 밖에서 물자를 끌어당길 수 있는 곳은 남한 아니면 중국입니다. 그래서 지난해 신년사부터 북한이 남북대화를 언급한 겁니다. 외부로부터 물자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나름의 절박성이 반영된 것이죠. 그리고 동시에 중국하고도 잘해보려고 모란봉악단을 보낸 것이기도 하구요.

프레시안 : 한편으로는 이번 수소폭탄 발언이 중국으로부터 핵 보유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정세현 : 물론 굳히기 전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될 수 있으면 수습하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중국의 관영 매체인 <환구시보>는 14일 사설에서 "모란봉악단의 전격적인 철수가 중-조 관계에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부정적 영향이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번 해프닝을 이쯤에서 매듭짓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겁니다.

북한이 괘씸하다는 생각에 중국이 북한에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기 시작하면 북한은 더 이상한 짓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국제사회로부터 북한이 더 고립될 수도 있죠. 이러면 중국의 입지가 어려워지고 북-중 관계가 나빠지는데, 이건 미국이 좋아할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중국은 조용히 덮으려는 겁니다. 북한이 내년 당 대회를 잘 치르고 동시에 사고를 치지 않도록 관리하는 차원으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다 꺼내놓은 남한 vs 금강산 관광만 강조한 북한

프레시안 : 한편 모란봉악단이 베이징에서 철수하던 12일, 제1차 남북당국회담이 차기 회담 일정도 잡지 못하고 사실상 결렬됐습니다. 이번 회담을 통해 박근혜 정부가 금강산 관광 재개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 것 같은데요.

정세현 : 회담 시작 전부터 성과를 내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왔죠. 지난 11월 26일 당국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에서 우리는 이산가족 이야기만 하고, 북한은 금강산 이야기만 하다가 접점을 못 찾아서 결국 남북 간 현안으로 당국회담 의제를 설정하고 만났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재개는 연계시킬 수 없다는 이야기를 회담 전부터 했습니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을 정부가 회담 전부터 스스로 만든 셈입니다.

▲ 지난 11일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에서 제1차 남북당국회담이 열렸다. 황부기(왼쪽 첫 번째) 남측 수석대표와 전종수(오른쪽 첫 번째) 북측 수석대표를 비롯한 대표단이 회담 시작 전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기자협회제공

속된 표현이지만 사실 '맨입'에 안되는 사업이 이산가족 상봉인데, 그래도 이산가족 상봉은 그나마 쉽습니다. 더 어려운 문제는 전면적 생사 확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6만여 명의 남한 이산가족 명단을 북측에 일괄적으로 전달하겠다면서 연내에 명단을 교환하자고 했는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 이산가족 상봉을 하면 한 번에 200명 정도를 추려서 북측에 보냅니다. 그러면 거기서 생사확인을 하고 만날 의향이 있는지를 확인해서 100명 정도를 추려냅니다. 이 기간이 한 달 정도 걸립니다. 200명 하는데 한 달이 걸렸는데, 300배인 6만 명에 대해 이 작업을 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단순하게 산술적으로만 생각해봐도 300개월, 25년입니다. 정부가 북한의 행정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제시한 겁니다.

이산가족 상봉이나 서신 교환은 생사 확인에 비해 그나마 북한의 부담이 조금 덜한, 현실성이 있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금강산 관광을 풀어주면 북쪽에서도 이 정도는 호응해줄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서신 교환하면 북쪽은 편지를 검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위 간접 침략이나 체제 비판 같은 것들이 편지 속에 있는지 검토하겠죠. 이렇게 되면 별도의 행정 소요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산가족 상봉, 서신 교환, 생사확인만 해도 금강산 관광과 무게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박근혜 정부는 여기에 DMZ세계생태평화공원 문제와 개성공단 3통(통행·통신·통관) 문제, 드레스덴 선언 이후 박 대통령이 강조하고 있는 환경·민생·문화의 3대 통로 등을 모두 펼쳐 놓았습니다. 금강산 관광 하나만 들고나온 북쪽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그랬는데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요구하는 금강산 관광 재개는 여러 가지 조건을 걸면서 사실상 안된다는 입장이었고, 그러면서도 북한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의제는 받으라고 요구했습니다. 회담도 일종의 협상이라면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것만 받으라고 하니 회담이 잘 될 리가 있겠습니까?

프레시안 : 그런데 북한도 협상에 뜻이 없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옵니다. 박근혜 정부가 금강산 관광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관광 재개를 합의서에 명시하자고 한 것을 보면 애초에 합의를 이룰 생각이 없었다는 건데요.

정세현 : 북측은 남측이 금강산 관광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보여주면 이산가족 상봉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과 같은 동시 이행을 생각한 겁니다. 남한에서 제의한 금강산 관광 관련 실무회담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적십자 회담을 병행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차관급에서 이 정도는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회담은 결렬됐습니다. 청와대가 금강산 관광과 이산가족 상봉을 연계하지 말라는 지침을 강하게 내렸다면 사실상 회담 수석대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거의 없었을 겁니다. 협상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가 금강산 관광을 할 수 없다고 저렇게 강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뭔가요?

정세현 : 금강산 관광은 현금이 오가는 사업입니다. 이에 금강산 관광은 곧 북한으로 들어가는 '달러박스'라는 인식이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이산가족 상봉은 인도적인 사업인데 이것과 관광을 맞바꾸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하는 이른바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는 대통령의 철학의 문제라고 봅니다. 남북관계를 협상을 해야 하는 관계로 보지 않고 나는 선이고 북한은 악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자는 대로 저쪽이 따라올 때까지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하니, 협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마지막 날인 지난 10월 26일, 버스를 타고 다니는 남한 가족들을 향해 인사하는 북한 가족들 ⓒ프레시안(이재호)

1998년 4월 이른바 '비료회담'이라고 불리는 남북 차관급 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렸습니다. 이 회담에서 제가 받은 지침은 명확했습니다. 비료를 주는 대신에 이산가족 상봉 약속을 받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김영삼 정부 말년부터 비료를 달라고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정권 말이다 보니 결정을 못하고 선거로 넘어가게 된 것이죠. 김대중 정부 집권 이후가 되니까 북한에서 남북회담을 하자고 띄웠고, 우리가 호응하면서 회담이 성사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명확한 지침이 있었는데도 회담의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비료는 받아가고 싶은데 이산가족 상봉 사업에 대해 굉장히 겁을 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체제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업이 이산가족 상봉이었던 것입니다. 비록 1997년 남한이 국제금융기구(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사태에 이르긴 했지만, 그래도 북한보다는 월등했습니다.

당시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인도적 사안이 아닌, 정치적 사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왜 정치적인 사업이냐고 물어보니, 남한 정권은 국민들한테 점수 따려고 이산가족 상봉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의도가 정치적이라는 겁니다. 다소 해괴한 논리입니다.

어쨌든 이 회담은 결렬됐습니다. 그런데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상봉이 활성화되면서 왜 북한이 상봉에 소극적으로 나오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북쪽 동생이 남쪽 형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고, 건강도 훨씬 나빠 보이는 데다가 이쪽에서는 북쪽 가족들에게 달러를 쥐어주는데 북쪽에서는 나라에서 받은 훈장을 들고 사진이나 찍자고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거라도 들고 가서 지지 않으려는 심리가 발동한 셈인데, 이렇게 남북이 가시적인 비교가 되는 공간이 이산가족 상봉 현장이었던 겁니다.

북한으로서는 정말 보기 싫은, 불편한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맨입에 받으라고 하니, 북한이 이걸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들이 못사는 모습을 드러내는 최소한의 대가는 줘야 할 것 아닙니까.

더군다나 이산가족 면회소는 금강산에 있습니다. 어차피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를 하면 그 면회소를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럴 바에는 기왕에 면회소 문도 열고 금강산 문도 열면서 북한에 떡고물이 떨어질 수 있게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서로가 원하는 바를 부드럽고 합리적으로 취할 수 있는데도, 금강산 관광으로 들어가는 현금으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인과관계가 정확히 성립도 안되는 논리의 포로가 돼서 두 사안을 연계시키지 말라고 하니, 협상이 될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남한은 '이산가족 플러스 알파' 수준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박근혜 대통령이 관심있어 하는 사안을 죄다 꺼내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일단 한 가지만 예로 들면 DMZ 세계생태평화공원은 군사 지역이라서 군사회담부터 해야 합니다. 미국과 사전 협조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걸 차관급 회담에서 논의하자고 하니, 뭘 어떻게 합의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프레시안 : 일단 남북 당국회담이 기약이 없이 끝났으니, 당분간은 남북관계의 모멘텀을 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정세현 : 내년 1월 1일에 발표할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신년사에서 유화적 메시지가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36년 만에 열릴 예정인 당 대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남한과 좀 잘해보고 싶을 겁니다. 당 대회를 경직된 남북관계 또는 군사적 충돌 가능성까지 높아지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치르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돈도 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민들한테 당 대회 즈음해서 선물이라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 대회 기념으로 인민들에게 술에 고기를 나눠주기 위해서라도 북한은 남한과 관계를 좋게 가져가고 싶어 할 겁니다.

일단 3~4월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기 때문에 북한은 1~2월 중에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겁니다. 금강산 관광을 5월 안에 재개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유화적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이러한 북한의 유화적인 태도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일단 앞서 말씀드렸듯이 3~4월은 훈련인 데다가 내년 4월에는 총선이 있습니다. 총선을 앞두고 남북대화를 하면서 남북관계가 좋아질 것 같은 희망을 주는 것은 곧 야당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한 정부가 움직이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 당국회담 전후로 보여준 청와대의 입장을 보더라도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는 형태의 협상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광복 70주년, 남북 지도자들은 뭐했나

프레시안 : 광복 70주년이었던 2015년도 이제 채 보름도 남지 않았습니다. 남북 지도자들의 지난 3~4년 간 행보를 평가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정세현 : 일단 2012년 집권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경우 내부 예비를 활용하면서 이전보다 경제사정이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이게 한계가 뻔히 보이기 때문에 남쪽에도 유화조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쪽이 북쪽이 원하는 대로 유화적인 자세로 화답해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관이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 박근혜(왼쪽)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청와대(왼쪽)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오른쪽)

물론 그렇다고 김정은 위원장의 대남관이 긍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북측이 유화적인 조치를 취하는 이유는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일 지향적이나 평화 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생존 때문에 남한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겁니다. 금강산관광 재개를 통해 5.24조치 해제까지 생각하는 겁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북한이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도 남북관계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박근혜 정부는 경제적인 이유로 북한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조언조차 듣지 않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서도 남북관계를 풀어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이야기했을까 싶습니다.

정세현 : 전경련이 생각해도 우리 경제의 블루 오션은 북한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대통령의 대북관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경제를 위해서라도 북한과 관계를 풀어나간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3년과 김정은 제1위원장의 4년을 비교해보면 북한은 자기들 필요 때문에 남한과 관계를 이렇게 끌고 가면 안된다고 보는 겁니다. 박근혜 정부는 지금까지 민주정부가 했던 방식이 아닌 자신의 방식으로 남북관계를 풀어갈 것이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레시안 :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든, 남한이 주변 강대국에 비해 입지가 상당히 약한 국가인데,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결국 중국-미국 대결 프레임에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정세현 : 그런 상황까지 고려하려면 국제정치적인 감각이 있어야 하는데 별로 그런 감각은 없어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남북관계 개선은 경제적 이유에서도 필요하지만, 대(對)일본, 미국, 중국 관계에서 우리의 입지를 키우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또 핵 문제 역시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조건에서만 6자회담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사안부터 남북이 협력해 나간다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이야기하고 핵 문제를 사실상 조건화하고 있는 박 대통령의 행보가 안타깝습니다. 올해 박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예를 들면 비핵화, 이게 전제조건은 아니지만 (북핵) 해결 안 되는데 평화통일 이야기할 수 없다"면서 북핵 문제를 또다시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이런 식이면 2016년에도 남북관계와 북핵 문제는 답보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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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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