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외교? 여기저기 빚내는 '부채'외교!

[한반도 브리핑] 2015년 한반도 브리핑의 키워드는…

이맘때면 언론들이 앞다퉈 한 해를 대표하는 4자 성어부터, 10대 뉴스, 그리고 올해의 키워드들을 쏟아낸다. 요즘 급유행하는 빅 데이터도 한몫 거든다. 최근 다음소프트가 올해 사회관계서비스망(SNS)에 회자된 키워드를 빅 데이터로 분석한 후 가장 많이 언급되는 10개를 뽑았는데, '세월호'와 '메르스', '국정화'가 1위에서 3위를 차지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3가지가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에 일어났음에도 세월호의 비극이 1위를 차지한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겪고 있는 공적 존재로서의 국가 부재를 반영한다. 그리고 2위 '메르스'는 사건의 종류는 다르지만 세월호의 연장선상에서 국가권력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하반기 논란의 주인공인 '교과서 국정화'는 이러한 국가의 추락에 대한 반성과 변화가 아니라 비판의 목소리를 아예 억눌러버리겠다는 권위주의 정권의 오만이 정점을 찍은 것이다. 3개의 키워드로 구성하는 2015년 국내 정치에 관한 브리핑은 권력이 국가의 공공성을 망각하고 국민 위에 군림하며, 권력유지라는 목적에 눈이 멀어 좌우분열에 나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2015년 한반도 및 주변 국제정치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연초부터 분단 70년, 광복 70주년, 한-일 조약 50주년, 6.15 남북공동선언 15주년 등 하나 같이 막강했던 키워드 후보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긴장과 대결구도는 물론이고, 충돌의 위기 직전까지 이른 남북관계의 획기적 변화를 기대하던 바람은 아무리 대단한 기념비적 숫자에 매달린다고 해도 현실의 벽 앞에서 무력했다.

지난 8월 25일 남북 고위당국자 2+2회담에서 43시간의 마라톤협상 끝에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때늦은 감이 있었지만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오랜 만에 재개됐다. 하지만 이후 남북은 주도권 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하다 12월 11일~12일에 차관급 당국회담을 어렵게 이뤄냈다. 그러나 합의는 물론이고 다음 회담 일정도 잡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남북문제는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8.25 합의는 분명하게 보여줬다. 그동안 대화에 부정적이던 북한을 대화테이블로 나오게 만들고 또 합의까지 이끌어낸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7년 반 가운데 드물게 잘한 대북정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 남북 고위급접촉 공동 보도문 발표에 합의한 이후 접촉 장소였던 판문점 평화의 집 회담장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는 김관진(오른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북한 황병서 총정치국장 ⓒ통일부

그런데 '혹시나'에서 '역시나'의 패턴이 반복되었다. 양보와 타협으로만 진전을 기대할 수 있었음에도 남북의 기 싸움만 팽팽했다. 북한 측이 금강산 관광 재개를 다른 의제들에 대한 전제조건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정부의 설명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협상력의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8.25 합의에 이은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가 역시 동맹 간 진영대결에 함몰되어 가는 동북아에서 진영을 넘어가는 과감한 외교로 평가할만한 시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치밀한 계획 없이 급조된 방문임이 드러나면서 용두사미로 흘러버렸다. 8.25 남북합의의 모멘텀을 살려 대화 재개를 위한 양국의 협력 모색으로 가야했지만, 뜬금없는 '통일외교'가 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리고 연이은 방미에서도 통일외교의 세일즈는 이어졌다.

박 대통령의 통일 담론이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지만, 흡수통일론의 저의를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남북관계를 악화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그동안 북한붕괴에 대한 높은 기대와 흡수통일에 경도된 대통령이 3명 있었는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이 바로 그들이다.

드러내놓고 흡수통일을 말하던 두 전직 대통령에 비해 박 대통령의 경우는 속내야 어떠하든지 겉으로는 부인한다. 하지만 통일대박론 이후 전 국정원장 남재준과 통일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정종욱의 발언, 그리고 올해 7월 통일은 내년에라도 될 수 있다는 대통령 자신의 언급 등을 이어보면 의심은 깊어진다.

다음 3가지 측면을 고려하면 좀 더 분명해진다. 먼저 정부의 통일 담론에는 출구만 있고, 입구와 과정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흡수통일론에 대한 의심은 타당성을 갖게 된다. 통일을 달성하면 대박이고, 골치 아픈 핵 문제도 한꺼번에 해소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통일로 갈 것인가의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둘째 현재 동북아구도는 역내국들의 군비경쟁으로 인한 안보딜레마가 심화되고, 미-중 갈등과 미-일 동맹 강화 등 대결구도가 심화되는데, 이를 보다 협력적이고 평화적인 구도로 바꾸려는 노력 없이 순응하면서 통일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흡수통일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당사자인 북한을 배제한 채 주변국과만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통일론보다는 대북압박 공조를 통한 북한붕괴에 무게가 실린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통일을 정책 전면에 내세울수록 통일에 대한 진정성은 떨어졌는데, 박 대통령도 유사하다. 신뢰프로세스에 신뢰가 없고, 복지공약에서 복지가 사라졌던 것처럼 통일외교에 대북관계 개선노력은 없다. 독일통일의 최대공헌자이며 빌리 브란트정부의 '키신저'로 불렸던 에곤 바(Egon Bahr)는 통일의 가장 핵심적인 성공요인으로 동독을 자극할 수 있는 '통일'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았던 점을 꼽았다. 남북관계는 악화일로인데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이라고 떠벌리는 한국 정부가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이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정부가 통일대박론과 통일외교에 분주한 동안 우리 외교의 운신 폭은 좁아지고 있다. 동북아 전체 구도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주도적 구상이 부재한 채 기존 구도에 끌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익을 확보하기 보다는 외교를 할 때마다 상대에게 무엇인가 해줘야 하는 상황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미-중 사이에서도 겉모양은 균형외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쌍방에게 모두 빚을 지는, 이른바 '부채외교'를 하고 있는데, 연이은 방중과 방미가 그 전형을 보여주었다. 박근혜 정부는 중국방문 이후 이어진 방미에서 이를 지렛대로 사용하기보다는 중국경사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또한 통일외교를 위한 중국의 지지에 대한 일방적 확신은 북-중 관계의 개선 움직임 앞에서 엇박자를 냈다. 대일외교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그동안 단절외교를 고집했지만, 일본의 의미 있는 변화도 없는 상황에서 미국의 압력 때문에 빈손으로 사실상 빗장을 열어버렸다.

▲ 지난 9월 3일 오전 중국 베이징 톈안먼에서 열린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 왼쪽부터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AP=연합뉴스

2015년 동북아 국제정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사건은 미-일 동맹의 강화일 것이다. 지난 4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방미 기간 중에 양국은 안보가이드라인 개정을 확정했다. 국내 안보법 개정과 함께 일본은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개헌이라는 관문이 남아있지만 실질적으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원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의 근간으로 한-미-일 3각 군사 협력체제의 동시구축을 원했지만 한-일 관계 악화로 인해 계획을 조정했다. 즉 미-일 동맹을 선(先)강화한 다음 한국의 선택을 압박하는 전략으로 바꾼 것인데, 이는 관계악화의 원인 제공자인 일본의 변화가 아니라 한국의 변화를 압박한 것이다. 우리가 다시 빚진 위치에 서게 되었으며, 그 결과가 집단자위권 행사에 대한 일본의 한층 과감해진 행보로 나타났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남중국해에 대한 한국 역할을 압박하는 등 미-일 양국의 대(對)한국 외교가 거칠어졌다.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3자회담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한국의 저자세에 비해 일본은 매우 당당했으며, 한국이 위안부문제의 매듭만 풀면 모든 것을 풀어주겠다는 배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본이 난색을 표하는 이상한 구도로 흘러갔다.

2015년은 이렇듯 내치는 물론이고 외교도 난관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내년의 전망은 더 나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지 않으면 계속 끌려가며 '빚지는' 부채 외교를 할 수밖에 없다. 대북영향력이 부재한 가운데 미-중은 물론이고 일본과 러시아 모두 한국을 진정한 외교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판세를 뒤집어야 하고, 열쇠는 남북관계 개선이다. 한국의 영향력은 결국 대북영향력 여부에 달려있다. 이를 위해 북한의 전제조건과 협상태도에 좌우되지 말고, 과감하고 선제적인 제안으로 북한의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

한-미 관계 역사상 처음으로 지난 10월 16일 양국 정상이 '북한에 관한 공동성명'을 내고 북핵문제의 시급성을 공유하고 공동해결 의지를 천명했다. 문구대로 실천한다면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정책의 폐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성명은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진척사항이 없다. 현재로써는 교착상황을 주도적으로 타개할 국가는 한국 정부 뿐이다.

오바마의 남은 임기와 미국의 정치일정을 감안하면 별로 시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다. 북한이 미국에게 제안하고 있는 한미군사훈련과 핵실험의 상호중단을 평화협정의 입구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2012년 2.29 합의의 부활을 목표로 하되, 당시에는 북-미 회담이 주가 되고, 남북회담을 부가적인 회담으로 생각했던 것이라면, 이번에는 남북회담을 통해 북-미 회담을 중재하는 역할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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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

김준형 한동대학교 교수는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의회산하 평화재단 연구원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에서 정책평가위원회 외교안보분과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한미관계를 포함한 국제정치경제 등을 주 연구 분야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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