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서두를수록 멀어진다

[백년포럼] 87년 민주화 세력의 실패와 새로운 정치의 모색 ②

다음은 오는 17일 열리는 세 번째 '백년포럼'에서 발표될 김상준 경희대 교수의 발제문 "공존 체제, '다른 백년'의 세계상: 87년 민주화 세력의 실패와 새로운 정치의 모색"이다. 김 교수는 냉전 종식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아니라 "16세기에 시작되어 점차 세계 전체로 퍼져나간 장기 유럽내전이 이윽고 종식된 것"으로 앞으로 "세계는 각 문명과 체제와 사상의 공존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냉전의 종식은 "자본주의-사회주의라는 개념 자체와 그 양자의 대립구도, 좌-우, 그와 연동된 진보-보수, 또 유럽내전의 글로벌한 결과물인 서구-비서구의 차별적·대립적 문명관, 이 모든 게 이제 시효만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세력은 분단체제와 냉전체제라는 시효가 지난 프레임에 갇힘으로써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열지 못했다.

그는 "'분단체제'란 '분단체제 극복'을 소리 높여 강조할수록 '분단체제'의 구속력이 강해지는 체제"라면서 "분단체제를 내려놓고 공존체제를 내세울 때, '다른 백년'의 프로그램이 열린다"고 말한다. "'분단체제' '분단체제 극복' 프레임, 즉 '냉전체제'와 '냉전체제 민주화 운동'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새로운 백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상준 교수의 발제문을 4회로 걸쳐 게재한다.

'백년포럼'은 17일 오후 7시30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리며, 조성주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소장이 토론자로 참여한다. 관심 있는 시민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4. 공존의 세 차원: 문명, 체제, 사상

공존체제란 단순히 남북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긴 유럽내전' 질곡이 풀렸을 때, 우선 자유로워지는 가장 큰 차원의 대립은 동/서 문명의 차등적 대립이다. 그 결과 동서 문명의 공존이 형성된다. 그 다음은 자본주의-사회주의, 좌-우, 진보-보수의 배타적 대립이 허물어지고 서로 뒤섞이는 체제와 사상의 공존이다. 남북의 공존은 이러한 복합적인 배경 위에 서 있다.

우선 남북공존은 이미 불가피한 현실이 되었다. '통일'은 좋지만, 지금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고, 서둘러 내세울수록 통일은 오히려 멀어진다. 서두를수록, 내세울수록 분단체제로서의 현실만, 마치 바늘로 꽉 찬 주머니를 꼭 쥐는 것과 같이, 더욱 튀어나와 찌른다. 반면 남북의 이 공존체제는 굳이 '극복'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닐 필요가 없다. 통일이 먼저인가, 공존이 먼저인가. 공존이 먼저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어느 쪽 어느 세력이든 '공존체제'에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공존체제가 확고하게 정착될수록 말만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통일이 아닌, 실제적 통일은 가까울 것이다.

이런 상황은 남북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적대하던 미국과 중국, 한국과 중국이 이미 공존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 미국과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공존은 이미 엄연한 국제적 현실이다. 공존을 통해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이 공영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공존이 길어질수록 우리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좋다. 인류 전체에게 좋다. 그 공존의 틀에 한국이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다면 세계인의 칭송을 받게 된다. 1987년 한국이 위대한 민주화를 통해 세계인의 칭송과 존경을 받았던 것처럼.

한국사(Korean history)에서 한국인이 지금만큼 세계로 뻗어간 경우로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장보고(787~841) 연간일 것이다. 나당일(羅唐日) 해상무역을 주도하여 중국 해안에는 신라방이 즐비했고 이는 서역을 잇는 육상실크로드로까지 뻗어갔다. 오늘은 어떤가. 이미 미국, 일본, 유럽에는 확고한 거점을 마련했다. 중국연해지역과 동남아, 중앙아시아의 몇 거점에 新 신라방 벨트가 형성되었던 것도 이미 십여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이 벨트가 내륙 깊은 곳으로, 인도, 러시아, 중앙아시아, 이슬람권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 현실 속에 냉전은 이미 없다. 자본주의-사회주의, 좌-우, 보수-진보, 동-서라는 대립이 무의미해졌다. 이미 세계 현실은 공존체제다. '냉전 프레임 안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따라잡지 못했던 엄연한 현실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세계상황은 낯설지 않다. 서구주도 세계체제가 성립하기 이전의 세계, 역사가들이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이후'라고 부르는 15~18세기의 세계가 그렇다. 이때 세계는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이슬람, 유럽이 동등한 위치에서 공존하며 활발하게 교류했다. 지금 세계 상황이 비슷하다. 21세기는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이후'의 세계다. 일극 이후 다극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21세기의 세계 상황에서는 자본주의-사회주의, 좌-우, 보수-진보, 동-서가 뒤섞이고 있다. '긴 유럽내전 이후'의 세계임을 말해준다. 순수한 자본주의도 순수한 사회주의도 없다.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 이미 사망했다. 여기서 인류의 경제체제는 ①호혜경제, ②재분배경제, ③시장경제의 배합에 의해 구성되어 왔다 했던 칼 폴라니의 혜안에 주목한다. 국가-사회주의는 ②가 괴물이 되어 ①,③을 삼키려했고, 신자유주의-자본주의는 ③이 괴물이 되어 ①,②를 삼키려했다. 둘 다 실패했다. 오늘날 어느 건강한 경제나 세 영역의 조화로운 공존과 균형을 지향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본주의 구분에서 유래한 좌/우, 진보/보수의 구분도 따라서 마찬가지가 되었다. 개념적 구분의 적실성·배타성을 잃은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주의가 배합과 조절, 균형의 문제가 된 것처럼, 보수-진보, 좌-우도 정치위상학의 배치와 균형의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기존의 서양/동양의 대립틀 역시 해체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이 대립틀 역시 '긴 유럽내전'의 산물이었다. 유럽내부의 내전이 유럽 밖 식민지 쟁탈전으로 확대되면서 서구(제국주의)/비서구(식민지)라는 차별적 대립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기존 서구(서양)/비서구(동양) 틀에서는 모든 문명적이고 진보적인 것은 서구에서 나오고, 비서구는 서구의 것을 받아들이는 정도만큼 문명적, 진보적으로 된다.

이런 생각은 일반인들에게는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지만(생각이라기보다는 생각하기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미 한참 전에 깨진 허구다. 이를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 서구중심주의라고 부른다. 수준 높은 학자들일수록 분명하게 부정한다. 서구 식민화 이전의 비서구 세계의 높은 문명 수준과 역동적 역사가 밝혀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오히려 서구학계에서 더욱 선명하다. 과거의 서구우월주의를 턱없는 오만으로 생각하여 부끄러워하고, 자신들의 선조들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일들을 반성한다. 그들이 침략했고 식민화했던 나라와 지역에 높은 수준의 문명과 역동적 역사가 있었음을 앞장서 밝혀낸다. 대충 하는 게 아니라, 철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해, 그리고 그 결과를 대중화하면서 확실하게 한다. 지금 일본과 일본이 모범으로 삼았던 서구국가들의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물론 일본에도 과거 식민지 침략을 반성하는 양심적인 학자, 정치인, 시민들이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공존체제'란 세 차원을 가진 넓고 깊은 개념이다. 우선 동서 문명의 공존이고, 여러 체제와 사상의 공존이다. 이를 한반도 상황에서 구체화하면 우선 남과 북의 공존이 있고, 이는 미국 중국의 공존과 함께 가며, 그 외곽에는 동서문명의 공존이 있다. 세 개의 동심원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 폴라니적 경제관 : 세 경제의 연관과 중간경제


현실경제는 시장경제와 국가경제(=국가주도 재분배경제), 그리고 그 사이의 중간경제로 구성된다. 다양한 민간 복지경제, 지역통화 시스템, 생산-소비 협동조합들, 대안무역(fair trade) 네트워크, 지역복지-사회기여 활동을 하는 노동조합과 종교조직, 이를 지원하는 각종 재단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연대경제, 자원경제(voluntary economy), 협동경제, 제3섹터 경제, 비영리 경제, 내포 경제(inclusive economy)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중간경제 영역은 시장논리가 강화되고 있는 최근 오히려 성장하고 있는 추세다(Salaman, Sokolowski, and List 2003; 장원봉 2006; 드푸르니 2007; Noya and Clarence 2007).

우리가 이 영역을 묶어 '중간경제'(middle economy)라고 명명하는 까닭을 밝혀둘 필요가 있겠다. 먼저 그러한 여러 명칭들이 표현하는 다양한 측면을 포괄해 줄 개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 개념은 시장경제-국가경제와의 차별성을 분명히 표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중간경제'라는 용어는 이러한 목적에 모두 부합한다. 우선 포괄범위에서 시장경제-국가경제는 거대경제(super economy)다. 기본적으로 일국을 포괄하고, 지구화된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제국적이다. 반면 중간경제는 국지적이고 중간적이다. 존재양식에서 시장경제-국가경제가 균일적, 집중적인 반면, 중간경제는 다원적, 분산적이다. 운영원리상 시장경제-국가경제는 수직적-하향적이고, 중간경제는 수평적-상향적이다. 무엇보다 시장경제-국가경제는 기존경제이지만, 중간경제는 대안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미래형 경제다. 이렇듯 중간경제에서 ‘중간’이란 절충이 아니라 적극적-대안적 함의를 갖는다.

중간경제의 네트워크들은 너무 커도, 너무 작아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너무 작으면 '미지의 타자에 의해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원리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너무 커지면 시장-국가형의 거대경제 논리(효율지상주의+관료제)에 위협받게 된다. 물론 중간경제의 여러 단위 경제들 간의 연결망은 독립성, 자율성의 강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연결망은 국가적일뿐 아니라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활발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연결은 약한 연결(weak ties)이 될 것이고, 각 단위 중간경제의 자생성과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또한 중간경제는 슈마허가 말하는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에 친화적인 경제다(Schumacher 1973). 거대경제는 고에너지소비-노동절감적 거대기술에 의존하지만 중간경제는 환경친화적 저에너지소비-고용유발적 중간기술이 잘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다.

우리는 이러한 중간경제 논리의 고유한-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흔히 시장경제나 국가경제의 논리와 뒤섞여 선명하게 잘 드러나지 않는-특징이 경제 행위의 동기가 자신의 필요와 함께 타자의 필요를 향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타자라 했을 때, 이미 기존의 이해관계의 망에 촘촘히 묶여있는 기지(旣知)의 타자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범위 밖에 소외되어 있거나 불이익을 받고 있는 미지(未知)의 타자가 우선적으로 고려될 것이라는 점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근본적인 특징에서 연대성, 민주성, 자율성, 비영리성과 같은 중간경제의 또 다른 특징이 따라 나온다.

중간경제는 국가경제와 시장경제 사이에 존재하면서 한편으로 양 경제를 보완하고 다른 한편으로 견제한다. 경제적 정의와 친환경적 생활경제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이에 부합하는 국가정책과 기업 활동을 지지하고, 여기에 반(反)하는 국가정책과 기업 활동을 비판․시정하려 한다. 아울러 목표를 공유하는 여타 운동들과 연대해 간다. (<미지의 민주주의(증보판)>, 184-185, 인용 문맥에 따라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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