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이 쏴 죽인 아이의 고무신…시신만 100여 구!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함평 ⑤

마지막 살육전, 불갑산 '대보름 작전'

불갑산은 당시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 산하 불갑지구 사령부(사령관 박정현)가 들어서 있었다. 불갑산 남서부줄기에 해당하는 모악산 용천사에 불갑지구당(위원장 김용우) 본부가 설치됐고, 무장 투쟁을 위한 훈련장도 마련됐다. 또 1951년 2월까지 <불갑산 빨치산>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할 만큼 세도 강했다. 이들은 함평, 영광, 장성, 무안, 목포 등 전남 서북권을 관할하며 군경과 끈질기게 대치했다.

당초 모악산으로 불린 불갑산은 백제 시대 불갑사가 들어서면서 그 지명을 얻게 됐다. 하지만 용천사 부근(함평)은 여전히 모악산으로 불리며 함평과 영광을 구분 짓는다. 불갑산은 기껏해야 높이가 516미터에 불과하다. 1000미터가 넘는 산들과 비교하면 크기나 위세가 초라하다. 그러나 '산들의 어머니'답게 월악산(해발 167미터), 군유산(해발 400미터), 장암산(해발 482미터) 등 주변의 낮은 산을 거느리며 함평과 영광의 경계에 우뚝 서있다.

여기에 여러 능선과 봉우리가 얽혀있어 골이 깊고 숲이 울창하며, 북으로는 노령산맥과 연결돼 있어 보급 투쟁이나 게릴라전이 용이했다. 이 지역 좌익들이 불갑산을 본거지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군인들은 불갑산 토벌 작전을 위해 마을을 소개하던 중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그리고 빨치산이 후퇴한 뒤 민간인만 남은 이곳 불갑산에서 마지막 살육전이 벌어진다.

▲ 용천사 계곡 입구 광암 저수지에서 바라본 모악산(불갑산) 모습. 한국 전쟁 당시 수많은 주민들이 군경의 총검을 피해 이곳 용천사 계곡으로 몰려들었다. 용천사(사진 가운데 하얀 지붕의 특설 무대 바로 위)가 나무숲에 가려진 채 얼핏 보이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 한국전쟁 당시 이곳 용천사에는 불갑지구당 본부가 있었고, 무장 투쟁을 위한 훈련장도 마련돼 있었다. 빨치산 토벌을 이유로 모두 불태워진 불사는 1990년대 들어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진행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커버리지(정찬대)

▲ 민간인 학살의 상흔인 '총알바위'(용천사 바로 위 산책로)가 당시 아픔을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이 놓고 간 간식이 눈에 띄었으며, 바위 곳곳에 난 총탄 자국(철모 옆)이 선명하다. ⓒ커버리지(정찬대)

1951년 2월 20일(음력 1월 15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정월대보름날이었다. 휘영청 밝은 달은 불갑산 구석구석을 비췄고, 용천사 뒤편 삼나무 숲은 달빛에 일렁였다. 마른 가지 아래로 수천 명의 주민들이 몸을 숨긴 채 우왕좌왕했다.

용천사 주변을 감싼 골짜기에는 군경의 총검을 피해 모여든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이곳에서 생활한 한 주민은 "사람들이 꽉 들어차 제대로 움직일 공간도 부족했다"고 말했다.


불갑산 '대보름 작전'은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를 중심으로 연대 중포중대, 대전차포중대, 수색소대 등이 참여했다. 여기에 지역 경찰 병력은 물론 청년방위대 등 우익 단체까지 동원됐다.


함평 해보·나산·신광면을 비롯해 영광 불갑·묘량면 등지에서 밀고 온 군경은 불갑산 한 덩어리를 두고 연대 작전을 폈다. 이들은 포위망을 좁혀가며 숨통을 조였고, 그렇게 반군의 근거지로 향했다. 하지만 '대보름 작전'이 있기 전 빨치산은 불갑산을 벗어나 장성의 태청산(해발 583미터)으로 후퇴했고, 일부는 나주 금성산(해발 450미터)으로 숨어들었다.

▲ 용천사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용천사 계곡 입구. 이곳에서 조금만 밑으로 내려가면 계곡의 초입인 광암 저수지가 나온다. ⓒ커버리지(정찬대)

▲ 용천사 뒤편 숲에서 바라본 용천사 모습. 대보름 작전 당시 이곳은 군경을 피해 도망 온 주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커버리지(정찬대)

연결된 능선 없이 봉우리만 덜렁 있는 태청산은 빨치산이 은거하기에 부적합한 곳이다. 그럼에도 태청산을 택한 것은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음을 말해준다. 결국 이들은 3월에 이뤄진 군경 합동 작전으로 전멸됐고, 금성산에 들어간 빨치산은 영산강을 건너 장흥군 유치면 국사봉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인민유격대 전남 제3지구인 유치지구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불갑산에서 군경을 기다린 건 비무장한 민간인이었다. 함평에서 만난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빨치산은 이미 도망갔고, 무기도 없는 일반인만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군경은 개의치 않았다. 이들 모두를 '빨갱이'로 간주하고 보이는 즉시 사살했다. 지금도 용천사 뒤편 산책로에는 그날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군인들은 해보면 광암리 가정마을 뒷산 부근에 조성된 방공호(길이 180미터)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그대로 난사하기도 했다. 당시 현장에서 살아난 문만섭(당시 17세) 씨는 이곳에 300여 명의 유해가 매장됐고, 가족 단위로 불갑산에 올라왔다가 총살당한 사람이 많다고 증언했다.

▲ 지난 2009년 불갑산 인근에 조성된 방공호(길이 180미터) 발굴 작업 결과 100여 구 이상의 유해가 발견됐고, 이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생활용품이 다량 발굴됐다. 사진은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어른과 어린아이의 고무신. ⓒ진실화해위원회

실제로 진실화해위가 지난 2009년 6월 이곳 방공호에서 민간인 유해 발굴을 위한 개토제를 실시한 결과 여성과 유아, 어린이 등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100여구 이상 발견됐고, 이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비녀와 구슬, 반지, 거울, 수저, 신발 등 240여점의 생활용품도 함께 나왔다. 또 M1과 카빈용 탄피와 탄두 등도 무더기로 발굴됐다.


불갑산 일대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1000여 명에서 최대 3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날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불갑산의 봉분은 굳게 닫혀있다. 60년 세월이 흐른 뒤 잠시나마 세상의 빛을 보는 듯 했지만, 또 다시 봉인된 채 기약이 없다. 그사이 불갑산 선불(仙佛)은 이곳 꽃무릇의 붉은 거름이 돼 삭아 없어지고 있다.

(전남 함평 ⑥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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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대

신념이 담긴 글은 울림을 주며, 울림은 다시 여론이 됩니다. 글을 쓰는 궁극적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연재 중이며, 오늘도 순응과 저항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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