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6월 16일 "미국인 철수-북폭 준비!"

[정욱식 칼럼] 윌리엄 페리의 <핵 벼랑에서의 나의 여정>을 읽고

나는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한반도 핵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1945년부터 2015년까지 70년의 한반도 현대사를 핵 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하는 게 목표다. 그러던 참에 미국 국방장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가 회고록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북핵 문제와 관련된 부분을 중심으로 읽어봤다. 책 제목은 <핵 벼랑에서의 나의 여정(My Journey at the Nuclear Brink)>이다.

페리는 이 책에 1946년 일본 점령군의 일원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둘러본 소감에서부터 '핵무기 없는 세계' 운동에 선두에 선 최근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경험을 상세히 담아냈다. 이를 통해 각국 지도자에게는 핵의 위험에 대한 경종을, 젊은 세대에겐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정신으로 자신의 여정에 동참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북폭론의 선두에서

페리는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도 각별한 인물이다. 그가 1993년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부 부장관으로 발탁된 직후, 북한은 핵 확산 금지 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방장관으로 승진했을 때에는 "끔찍한 선택"에 직면했다. 그 선택은 "북한의 핵무장을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제2의 한국전쟁의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였다.

▲ 윌리엄 페리 전 장관 회고록 <핵 벼랑에서의 나의 여정(My Journey at the Nuclear Brink)>
양자택일의 압박 속에서 페리는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외과 수술적 선제 공격'을 입안했다. 북한이 5메가와트 원자로에서 사용후 연료봉을 인출해 재처리를 준비하는 시점을 '디데이(D-day)'로 잡았다. 영변 재처리 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은 방사능 물질을 유출시키지 않을 것이고, 크루즈 미사일로 원거리에서 공격하면 미군 피해도 거의 없을 것이라는 펜타곤의 시뮬레이션도 나와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북한이 주한 미군 기지를 포함한 남한에 대한 보복에 나선다면? 그건 전면전이었다. 전면전의 위험성이 펜타곤 회의 테이블에 오르자, "공격 계획은 테이블 끝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대북 제재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북한은 제재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와 관련해 페리는 "궁지에 몰린 북한이 절망 어린 행동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운명의 시계가 한반도 전쟁을 향해 째깍째깍 움직이고 있던 1994년 6월 16일 백악관, 페리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행동 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북한에 제재를 부과하고, 한국에서 미국인을 소개하며, 주한미군을 증강시킨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북한은 "제재는 곧 전쟁"이라는 입장이었고, 미국인 소개 계획도 김영삼 대통령에게 통보된 터였다.

문제는 '제재와 미군 증강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선택하느냐'였다. 두 가지 모두 북한의 공격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이와 관련해 페리는 "제재는 몇 주 미루고 미군 증강부터 나서야 한다"고 클린턴에게 권고했다고 한다. 미군 증강은 대북 억제를 강화하고, 억제 실패 시 북한을 격퇴하는 데 유용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클린턴이 이러한 증강 계획을 승인하기 직전, 전화벨이 울렸다. '개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고 있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전화를 받은 앤소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카터의 말을 전했다. "미국이 행동(제재와 미군 증강)을 유보하면 재처리 문제를 협상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제안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대해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이 모든 재처리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은 제재 및 미군 증강을 유보하고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역제안을 카터를 통해 전달했다. 결국 이 제안을 김일성이 수용하면서 위기는 수습되었다. 그리고 4개월 후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네바 합의를 둘러싸고 악평이 유행하고 있다. "악행에 대한 보상"에서부터 "북한의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페리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이 있었다. 당시 미국의 핵 전문가들은 2000년경에 다다르면 북한이 3개의 원자로를 통해 매년 50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말한 3개의 원자로란 제네바 합의를 통해 가동이 중단된 5메가와트와 건설 중단된 50메가와트 및 200메가와트 원자로를 의미한다.

평화 프로세스의 선두에서

1994년에 북폭론을 입안했던 페리는 4년 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컴백하게 된다. 1998년 8월 북한의 금창리 핵 시설 의혹 논란과 3단계 장거리 로켓 발사가 연이어 불거지면서 미국 의회는 행정부에게 대북 정책을 총체적으로 재검토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클린턴 대통령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페리에게 대북정책조정관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페리는 이를 수락했다.

당시 그의 업적은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이는 1998~99년 위기를 수습하고 2000년 한반도 정세의 황금기를 열었다는 '결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3~94년 위기 당시 대북 정책의 민감성과 포괄성을 포착한 페리는 부처 간 협력, 의회와의 관계, 한국 및 일본과의 공조, 중국 및 러시아와의 협의, 그리고 북한과의 직접 대화 등을 두루 염두에 두었다.

페리는 우선 1994년 당시 자신의 참모였던 애시턴 카터를 대북정책부조정관으로 영입했다. 또한 자신의 활동이 대북 정책의 주무 부서인 국무부와의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국무부 내 유능한 인물들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웬디 셔먼, 에반스 리비어, 필립 윤 등이 페리 팀에 합류했다. 뒤이어 제네바 합의를 맹렬히 비난했던 존 메케인 상원의원을 비롯한 의회 내 대북 강경파들을 일대일로 만나 설득에 주력했다. 페리는 이 일이 "가장 도전적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대북 정책 재조정을 위한 미국 국내적 기반 마련에 성과를 거둔 페리는 한국과 일본을 방문해 3자 공조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임동원 통일부 장관과 가토 료조 외무성 심의관이 페리와 파트너를 이뤄 페리 보고서 탄생에 기여하게 된다. 핵심적인 요지는 "새로운 전략과 전통적인 전략"을 함께 마련하되, 새로운 전략을 먼저 시도해본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새로운 전략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을 "포괄적인 관계 정상화 및 평화협정 체결과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전통적인 방식은 북한이 이 제안을 거부하면 대북 제재와 억제력을 강화해 북한의 양보를 강제한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북한이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페리 프로세스'는 본격화됐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그 빛이 바랬지만 말이다.

페리는 "이러한 공동의 접근은 정부가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좋은 모델"이라고 자평한다. 나는 이러한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대북 정책에는 세 개의 상대가 있다. 하나는 국내의 반대 세력이고, 또 하나는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국제 사회이며, 마지막은 북한이다. 페리는 국무부를 충분히 배려해 부처 간의 갈등을 사전에 방지했고, 공화당 의원들을 일대일로 만나 이해를 구하려고 했으며, 한국 및 일본과의 긴밀한 공조를 취했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이 충분히 고려할 법한 제안을 만들어 대북 협상에 임한 것이다. 이러한 정책 입안과 실천의 결과로 '페리 프로세스'라는 애칭이 나왔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이러한 시도는 찾아볼 수 없다. 한-미, 혹은 한-미-일 대북 정책 공조에서 '북한'은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세 나라 정부 모두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이용'하는데 관심이 더 많다. 한국은 국내 정치적으로, 미국은 아시아-재균형 전략을 정당화하는 데에, 일본은 군사적 우경화를 추진하는 데에 말이다.

페리가 오늘날에도 가장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원하는 북한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상대해야 한다". 대북 제재와 압박을 강화하면 북한이 굴복하거나 망할 것이라는 '막연한 바람(wishful thinking)'에서 깨어나 북한의 안보 우려 해소를 포함한 포괄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한-미-일이 대북 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능동적인 태도를 보여야 북핵 해결의 문도 열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16년 전에 나온 대북 정책 재검토의 결론인데 그 울림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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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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