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 중국의 변방에서 혁명의 선봉으로

[김윤태의 중국은 하나?] 풍운의 역사 현장, 광둥

중국의 근현대사는 파란만장한 격동의 연속이었다. 세계의 중심으로 자임하던 중국이 신무기로 무장된 영국 군대에 무참히 패배하면서 중국의 근대사는 굴욕의 역사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아편 전쟁 이야기다.

아편 전쟁은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평가된다. 무역 역조로 많은 양의 은(銀)이 청나라로 빠져나가자 영국은 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했다. 결국 은은 다시 영국으로 흘러들어갔고, 청나라에서는 아편 중독자가 증가했으며, 재정은 파탄으로 치닫게 되었다. 아편금지령을 내렸지만 별 효과가 없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임칙서를 광저우(廣州)로 파견했다. 임칙서는 영국인 소유의 아편을 몰수 소각해 버렸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아편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영국군은 광저우에 도착해 임칙서가 이끄는 군대를 격퇴하고 샤먼(夏門)을 공격했으며 북쪽으로 저장(浙江), 딩하이(定海) 등을 함락해 버렸다. 청조는 난징(南京)까지 함락 당할 위기에 처하자 1842년에 불평등 조약인 '난징 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홍콩의 할양, 상하이, 광저우, 샤먼, 닝보, 푸저우 등 5대 항구의 개항, 영국인 거주의 허락, 관세 자주권 침탈 등이 포함된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이 굴욕적 역사가 벌어진 현장이 광둥(廣東)이다.

광둥(廣東), 굴욕의 현장에서 혁명의 요람으로

아편 전쟁 후에도 중국인들의 아편 사용은 끊이지 않았다. 늘어가는 아편 유입에 은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전쟁 비용과 배상금 지불을 위한 추가 세금이 더해지자 백성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한 농민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광둥 성(廣東省) 화현(花縣) 출신의 홍수전(洪秀全)이란 사람이 태평천국이라는 나라 이름을 내걸고 광서 성에서 봉기한 것이다. '만민의 평등'을 기치로 내건 태평천국은 빈곤과 차별에 시달려 온 하층 농민들에게 빠르게 확산되었다. 군사력이 부족했던 청조는 급기야 서구 열강의 지원을 등에 업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군사비가 지출되었고, 경작지는 더욱 황폐해졌으며 재정은 바닥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서구 열강의 간섭과 침략은 더욱 노골적이 되었다. 영국은 프랑스를 부추겨 다시금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베이징을 점령했다. 제2차 아편 전쟁이다. 이 전쟁의 결과로 또 하나의 불평등 조약인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고, 중국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이 되어버렸다. 제2차 아편 전쟁 역시 광저우에서 시작되었다. 광둥은 또 한 번 굴욕의 역사 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광둥은 근대 중국 혁명의 요람이다. '태평천국의 난'부터 '무술변법운동', '신해혁명'까지 중국의 근현대를 이끌어간 혁명적 변화는 빠짐없이 광둥과 연관되어 있다. 태평천국을 주창한 홍수전, 무술변법운동의 강유위(康有爲)가 모두 광둥에서 나고 자랐다. 신해혁명의 주역인 손문(孫文)을 비롯하여, 1920년대 중국 현대사를 풍미한 장개석(蔣介石), 모택동(毛澤東), 주은래(周恩來) 역시 광둥을 무대로 활약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그 뿌리는 다르지만, 청조 타도, 군벌 타도, 새로운 중국의 건설을 공동 목표로 한때 광둥 땅에서 힘을 합해 투쟁했다. 20세기 초 중국은 몇 번의 혁명적 변화를 경험해야 했고, 그 역사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광둥이 있었다.

1924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군벌 타도와 국민 혁명 완수를 위해 제1차 국공 합작을 성사시켰다. 군사 정치 인재를 양성해 혁명군의 골격으로 삼아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광둥 성의 광저우 근교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의 군사 지도자와 무수한 혁명가가 배출되었다.

황포군관학교는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초대 교장 장개석의 후원으로 의열단 간부를 비롯하여 200명이 넘는 한인 학생이 신식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에서 새로운 정치와 군사를 배웠다. 그밖에 광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둥 호법정부 당시 손문의 후원을 받아 국제 사회에서 최초로 한민족의 임시정부로 인정받았다. 1921년의 일이다. 광둥은 이렇게 한국 독립운동사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중국 혁명의 산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의 요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정치 혁명에서 경제 혁명의 선봉으로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광둥은 확실히 정치 혁명의 중심이었다. 태평천국의 난에서 시작하여 변법유신운동, 신해혁명까지 굵직한 혁명적 변화는 모두 광동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혁명은 광둥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그러나 1979년 개혁 개방 정책의 실시를 기점으로 광둥은 경제 혁명의 중심으로 그 성격을 탈바꿈했다. 개혁 개방 정책의 실시와 더불어 광둥은 경제 특구로 지정되었고, 불과 30년 만에 전 세계가 놀랄만한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총생산액, 외자 이용, 수출 총액, 지방세 수입 등 대부분의 경제 지표에서 수년간 지속적으로 전국 수위를 차지했다. 예전의 정치 혁명의 산실에서 이제는 명실공한 경제 혁명의 요람이 된 것이다.

최근 광둥은 주강 삼각주 지역의 블록 경제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인근 주요 도시의 인프라, 산업, 공공 서비스의 재배치를 통해 특화 산업과 특화 지역을 육성하고 산업 연관성이 높은 지역 간 통합을 유도하고 있다. 홍콩과 마카오를 포함한 주강 삼각주의 경제 통합은 능히 혁명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암울했던 굴욕의 역사 현장에서, 혁명적 변화의 중심으로, 다시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선 광둥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감상에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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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동덕여자대학교 중어중국학과에서 중국 사회를 강의하고 있다. 외교부 재외동포정책 실무위원이며, 동덕여대 한중미래연구소에서 수행하는 재중한인연구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다. 국립대만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중국 사회에 관한 다양한 이슈뿐만 아니라 조선족 및 재중 한국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재중 한국인 사회 조사 연구>, <臺灣社會學想像>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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