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 상인과 정치 얘기 하지 마세요!

[김윤태의 중국은 하나?] 사업의 달인들이 모여사는 곳, 광둥(廣東)

"북경에서 꽌시(關係) 자랑 말고, 상해에서 돈 자랑 말 것이며, 광동에서 사업 수완 자랑하지 말라."

이 말은 수도 북경(베이징)에는 관료 집단이 집중되어 있으니 소위 꽌시 하나 갖지 않은 사람 없고, 상해(상하이)는 중국의 대표적 금융 도시이니 돈 없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며, 중국 3대 상방(商幫) 중 하나가 있던 광동(광둥)에는 사업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광동 사람들의 핏속에 상인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상인은 천한 직업이 아니었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도 상인의 중요성을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춘추 시기 '장사의 성인'으로 인정받는 범려(范蠡) 역시 시장을 분석하여 장사를 한 재상 출신 상인이다. 장사를 뜻하는 단어인 '생의(生意)'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중국인은 장사를 삶으로 여겨 왔다. 돈을 절대 터부시하지 않는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격언은 중국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새해 벽두부터 '꽁시파차이(恭喜發財)'를 외치면서 돈 많이 벌기를 기원하니 말이다. 생활 속에서 돈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온다.

돈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보니 중국에는 다양한 상술이 발달했고, 큰 상인 집단이 형성되었다. 중국의 3대 상방으로 산서 지방의 진상(晉商), 안휘 지방의 휘상(徽商), 그리고 광동 지역의 조상(潮商)을 꼽는데, 그 중에서도 조상은 어느 집단보다도 경제와 실리에 밝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들을 중국의 유태인으로 비유하였겠는가.

대외 무역의 거점, 양행(洋行)의 탄생

광동의 지형은 산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보고 있다. 자연스럽게 시야는 늘 바다를 향했다. 광동 상인들은 바닷길을 통해 중국 각지는 물론 세계를 무대로 활약했다. 그 세력은 진상이나 휘상에 미치지 못했지만 해외 무역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송나라 때에도 광동은 만국의 상인들이 끊임없이 왕래하는 대외 무역항이었고, 명청 시대 해금 정책(海禁政策, 바다로 나가 국외와 통교를 금지하는 정책)으로 잠시 위기를 맞긴 했으나 청대에 해외 무역으로 화려하게 그 명성을 되찾았다.

16세기를 전후해서 유럽은 중상주의 광풍에 휩쓸렸고, 새로운 영토와 거대한 상업 이익을 위해 전 세계를 무대로 탐험과 무역을 시작했다. 은둔의 나라 중국 또한 장기간 침체에 빠져 있던 연해 지역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300년간 실시해 오던 해금 정책을 폐지하고 바닷길을 열어 외부와 통상을 시작했다. 바다가 열리자 광동 상인들은 오랫동안 참아왔던 꿈을 펼치기 위해 앞을 다투어 바다로 나갔고, 동서양의 무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오랜 봉쇄 정책으로 조정에는 전문적으로 대외 무역을 담당할 기구가 없어 효과적인 관리와 안정된 거래, 세수 확보에 문제가 생겼다. 따라서 광동 상인 중 재력이 탄탄한 상인을 골라 외국 상인과 거래할 수 있는 독점권을 주고 동시에 세관을 대신하여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는 관리 방안을 마련했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대외 무역 담당 상점이 양행(洋行)이다.

초기 광동에는 이러한 대외 무역 담당 양행이 열세 곳이나 생겨나 이를 '13행'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대외 무역을 독점하면서 거대한 상방을 형성하자 소금 장사로 성장한 진상과 휘상에 이어 중국의 '3대 상방'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외국 상인들이 중국의 차, 비단, 도자기를 구매하거나 자신들의 상품을 중국에 수출할 경우 예외 없이 해상 무역을 독점한 13행을 거쳐야 했다. 자연스럽게 이때부터 광동은 황제의 남쪽 보물 창고가 되었고, 광동 상인은 해외 무역을 주도하며 거대 상단으로 성장했다.

동서양이 융합된 하이브리드형 비즈니스 문화

동양의 유교 문화에는 고통과 어려움을 견뎌내는 각고(刻苦)의 정신이 있다. 또 서방의 상인들은 경쟁에 익숙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개척 정신이 강하다. 동서양이 격돌하는 역사 현장에 있었던 광동 상인들은 동서양의 두 가지 특질을 몸으로 체득했다. 동서양의 상술이 이들의 몸에 하이브리드 형으로 엮여있다.

광동 상인들은 경쟁에 익숙하지만 소모적 경쟁은 피한다. 기회가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경쟁에서 이겨야만 얻을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가지를 가지고 처절한 경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광동 상인들의 사고방식 속에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따라서 작은 것을 가지고 남과 경쟁해서 얻으려고 하기 보다는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서로 협력해서 다 같이 더불어 돈을 벌고자 노력한다. 파이를 키우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광동 상인들은 각고의 정신과 개척 정신이 강하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한 지형의 영향도 있거니와 일찍부터 바닷길이 열려 있어, 이들은 자유와 개방을 신봉하고 시야는 늘 바다를 향했다. 과거 국제 무역의 대동맥이었던 해상 실크로드의 관문이 바로 광동이었음이 이를 증명한다. 또 이들은 각고의 정신과 개척 정신을 바탕으로 동남아 등지로 진출했다. 근대 들어 진상과 휘상은 몰락의 길을 걸었으나, 광동 상인들은 해외 진출을 바탕으로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리자청(李嘉誠), 천삐천(陳弼臣)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광동 상인들은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도 장사를 중시했다. 똑똑한 자식을 학자나 관리로 만들기 보다는 장사를 시켰다. 중학교를 졸업했을 만한 어린 아이들이 손에 장부를 들고 수금에 나서는 모습을 광동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1980년대 초 시장 경제 도입의 시험을 광동에서 하기로 결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광동 사람들의 실용주의적 전통이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는데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리 지상주의자인 광동 상인들

광동 상인의 사업 수완이 뛰어나다는 것은 천하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광동 상인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다. 광동 상인 가운데 간교하지 않은 상인이 없으니 광동 상인과 거래를 할 때에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광동 상인들이 정과 의리보다는 이익을 더욱 중시하는데서 연유한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는 것을 꺼리고, 비밀 유지를 비즈니스의 생명으로 생각한다. 흥정을 거래의 필수 과정으로 생각하고 흥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사업을 못하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서로 교제를 하는데 있어서도 인생과 철학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사업 이야기를 많이 한다. 정치적 화제 또한 찬밥이다. 정치적 화제는 잘못 거론하면 거래를 망칠 수도 있다. 실리와는 동떨어진 허황된 이야기라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광동 상인과의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 화제보다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진지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실용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광동 상인들은 1978년 개혁 개방이 시작되면서 다시 한 번 과거의 찬란했던 명성을 회복했다. 경제특구 선전(深圳)은 인구 3만의 작은 도시에서 30년 만에 일약 1400만 인구의 대도시로 급성장했다. 주하이(珠海), 동관(東筦), 중산(中山) 등은 물류는 물론 최첨단 정보 기술(IT) 분야에서도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섰다. 광동 상인의 DNA가 어김없이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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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

동덕여자대학교 중어중국학과에서 중국 사회를 강의하고 있다. 외교부 재외동포정책 실무위원이며, 동덕여대 한중미래연구소에서 수행하는 재중한인연구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다. 국립대만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중국 사회에 관한 다양한 이슈뿐만 아니라 조선족 및 재중 한국인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 왔다. <재중 한국인 사회 조사 연구>, <臺灣社會學想像>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 연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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