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에 태어난 가오 씨는 올해 갓 마흔이 됐다. 서른 중반에 짝을 만나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둔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가오 씨는 사는 게 심란하기 그지없다. 경제 성장률 8%를 유지하자며 목소리 높여 '바오바(保八)'를 외치던 공산당과 정부가 진작부터 낮춰 잡기 시작한 기준은 슬금슬금 '바오치(保七)'에서 '바오리우(保六)', '바오우(保五)'까지 내려앉았다. 이제는 정부도 민망한지 '바오'라는 구호를 더 내세우지도 못하는 처지가 된 것 같다.
둔화된 경제 성장률이야 자신이 어찌해 볼 도리 없는 일이라고는 하나, 그 여파는 사뭇 크게 다가오고 있다. 게다가 가오 씨가 부양해야 할 가족만 해도 적지 않은 수다. 아내와 아들딸은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 장인과 장모, 여든이 넘으셨는데도 아직 정정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처 할아버지와 할머니, 처 외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가오 씨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한 달 주말을 넷으로 나눠 순서대로 양쪽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는 일만도 고된 노동이 됐을 지경이다.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가오 씨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는 작은 황제(小皇帝) 소리 들어가며 금이야 옥이야 떠받치며 자랐는데….'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가오 씨는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게 다 그 잘난 가족 계획 정책 때문이야!' 가오 씨는 한숨을 쉬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물론 10년 뒤의 가상 상황이다. 중국 공산당이 최근 '한 자녀 정책'을 폐지했다. 지난 10월 말 열린 공산당 18차 5중전회에서는 1980년 이래 35년간 지속돼 왔던 국가 정책 방향을 뒤집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족(漢族)에 한해 한 자녀만으로 억제하던 방침을 바꿔 이제는 두 자녀까지 허용하겠다며 인구 억제 정책을 완화한 것이다.
'계획생육(計劃生育)'이라고 부르는 중국의 인구 억제 정책은 헌법에도 관련 조항이 있을 만큼 중대한 국책이었다. 중국 헌법 제25조는 "국가는 '계획생육'을 추진하여 인구 증가와 경제 사회 발전 계획의 상호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명시했고, 제49조에는 "부부 쌍방은 '계획생육'을 실행할 의무를 지닌다"고 했으며, 제89조에는 국무원의 업무 영역을 규정하면서 교육과 과학, 문화, 위생, 스포츠와 더불어 '계획생육'을 열거할 정도였다.
1949년 수립된 사회주의 중국 정부는 처음에는 출산 장려 정책을 폈다. 전쟁 직후 노동력 수요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당시 마오쩌둥은 "중국의 많은 인구는 대단히 좋은 일"이라며 출산을 장려했다.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중국 정부는 인구 증가가 경제 발전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출산 제한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인구 밀집 지역의 출산을 통제하면서 '만혼'을 장려했다. 1970년부터는 이른바 "늦게(晩), 드물게(稀), 적게(少)"라는 기본 방침을 결정했다. '늦게'란 만혼을 가리키는 말로 남자는 25살에, 여자는 23살 이후에 결혼하라는 지침이었다. '드물게'는 둘째 아이를 최소한 4년 주기로 낳으라는 의미였고, '적게'는 두 아이만 낳으라는 뜻이었다.
1980년, 공산당 중앙은 '한 자녀 정책'을 표방했다. 물론 이 정책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징조들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1984년에 이미 농촌 지역의 두 자녀를 제한적으로 허용했고, 한족이 아닌 경우 역시 두 자녀를 낳을 수 있었으며, 최근에는 베이징에서 독자 부부가 두 자녀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등 점진적으로 규제를 풀어왔던 것이다.
인구가 특정 기준을 돌파할 때마다 '11억 인구의 날'(1989년 4월 14일), '12억 인구의 날'(1995년 2월 15일), '13억 인구의 날'(2005년 1월 6일) 등을 지정하면서 경각심을 일깨워왔던 중국 당국의 정책 변화는 인구 둔화에 따른 사회 경제적 문제를 예방하자는 뜻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중국인이 살아갈 땅이 단지 중국 내부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둔 조치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면 "더 많이 바깥으로 내보내자"는 전략이다.
가오 씨처럼 '계획생육' 직후에 태어나 10년 뒤 사회의 동량이 돼야 할 중국인들은 역사적 '천연기념물'이 될 것 같다. '소황제'라는 칭호와 더불어 부모와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 등 모두 6명의 '시종'을 부리며 떵떵거렸던 10대의 삶, '바링허우(八零後)'라는 새로운 칭호를 부여받고 풍요로운 물질과 자유로운 정신을 구가했던 20대의 삶은 30대와 40대에 이르면서 점점 피폐해질 것이다. 최소한 네 명의 양가 어르신과 두 명의 자녀를 부양해야 하는 책무가 떠안겨질 테니 말이다. 집값과 사교육비가 들지 않았던 부모 세대, 개성과 쾌락을 좇는 '지우링허우(九零後)' 세대 중간에 끼어버린 처지 돼버린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 자녀' 세대로 기록될 이들의 삶이 10년 뒤 새로운 사회 문제로 부상할지 모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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