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직장인, 우울증이 없는 진짜 이유는?

[서리풀 연구通] 노동 조건과 우울증

지난 해 TV 드라마로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만화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대기업 계약직 직원으로 여러 불이익을 감수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회사와 동료로부터 인정도 받지만 결국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게 된다. 계약직 직원으로서 장그래가 감수해야만 했던 것은 회사의 직원에 대한 낮은 처우뿐만이 아니라 계약직이라는 신분에 수반된,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고 당사자들도 드러내 싶지 않은 편견과 차별이기도 했다.

올해 초 한 백화점의 주차 관리 아르바이트생 3명이 주차장에서 무릎 꿇고 고객으로부터 폭언을 듣는 동영상이 공개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보다 약 한 달 전에는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이 주연(?)을 맡은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의 공분을 사기도 하였다. 주인공 장그래의 미래는 드라마의 마지막 부분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아르바이트생 3명은 그 사건으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하고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공개된 장소에서 직장 상사에게 무릎을 꿇리고 수모를 당한 것도 모자라 외국의 공항에 혼자 내버려졌던 직원은 끝내 그 사건의 심각한 후유증으로 산업재해를 인정받았고 직장에는 복귀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열악한 노동 조건(예를 들어, 노력에 비해 임금이나 경력개발 기회, 자존감, 존중, 직업 안정성이 낮은 경우)은 노동자에게 사회적, 경제적 측면 외에 신체적, 정신적 건강 측면에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열악한 노동 조건이 지속적인 감정적 스트레스를 야기하고, 이러한 스트레스가 결국 심근 경색과 같은 신체 질환 발생 위험을 높이거나 우울증과 같은 정신 건강 문제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것은 이미 의학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열악한 노동 조건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는 모든 노동자에게서 동일한 것일까? 덴마크 국립직업환경연구센터의 레이네르 루그리에스(Reiner Rugulies)와 독일, 네덜란드 공동 연구진 등은 심리 사회적 직업 환경(psychosocial working environment)에 따른 건강 영향이 노동자의 직업 계층에 따라 다르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관련 자료 : Adverse psychosocial working conditions and risk of severe depressive symptoms. Do effects differ by occupational grade?)

덴마크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구축된 '덴마크 직업 환경 코호트 연구 자료'를 이용하여, 연구진은 조사 대상자의 '직업 계층'을 직종(job title), 직위(occupational position), 교육 수준에 따라 5개의 직업 계층(관리자, 중간 관리자, 기타 비육체 노동자, 숙련된 육체 노동자, 준숙련 또는 미숙련 육체 노동자)으로 분류하였고, 심리 사회적 노동 조건에 따른 이들의 심각한 우울증상 경험 여부를 비교하였다. 심리사회적 노동 조건은 노력-보상 불균형 지수(Effort-Reward Imbalance ratio)라는 것으로 측정되었는데, 값이 클수록 보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업무 부담을 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연구진들은 이 지수를 이용하여 직업 계층과 심리 사회적 노동 조건에 따라 전체 대상자들을 다음과 같은 네 개의 그룹의 분류하였다. 직업 계층이 높고 심리 사회적 노동 조건도 좋은 집단(A), 직업 계층은 높지만 심리 사회적 노동 조건이 나쁜 집단(B), 직업 계층이 낮고 심리 사회적 노동 조건은 좋은 집단(C), 직업 계층과 심리 사회적 노동 조건 모두 낮은 집단(D).

연구 결과, A에서 D집단으로 갈수록 심각한 우울증상의 발생 위험은 순차적으로 커졌는데, 가령 직업 계층이 높고 심리 사회적 노동 조건도 좋은 집단 A의 우울증 발생 위험이 1이라고 할 때, 직업 계층이 낮고, 노력-보상 불균형 정도가 가장 높은 집단(D)의 우울증상 발생 위험은 2.43배로 크게 높아졌다.

또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결과는 열악한 심리 사회적 노동 조건이 우울증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가 노동자의 직업 계층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직업 계층이 낮은 집단(C와 D)내에서의 우울증 위험률 차이(2.43/1.46)는 직업 계층이 높은 집단(A와 B) 내에서의 우울증 위험의 차이(1.26/1)보다 더 컸다.

아래 그림을 보면 직업 계층이 낮은 경우, 노력과 보상의 불균형에 따른 심리 사회적 스트레스가 우울증의 위험을 크게 증폭시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직업 계층이 낮은 집단이 열악한 심리 사회적 노동 조건에 따른 부정적인 건강 위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시사한다([그림 1]). 이러한 연구 결과는 성, 연령, 가족 형태, 조사 방법, 흡연, 음주, 여가 시간, 신체 활동, 주관적 건강 상태, 수면 장애 등 우울증상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을 동일하게 보정한 상태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 직업 계층 및 노력-보상 불균형 정도에 따른 심각한 우울증상 발생 위험. 레이네르 루그리에스의 2012년 연구 결과를 그림으로 재구성했다. ⓒ유원섭

연구자들은 이러한 결과에 대해 직업 계층이 높은 집단은 낮은 집단보다 자신의 업무에 대한 통제 권한이 더 많고, 또한 근무 시간 이외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는 등 위해한 심리 사회적 작업 환경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더 많은 자원과 기회를 통해 상쇄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열악한 노동 조건과 이로 인한 정신 건강의 문제는 한국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감정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폭력 등 열악한 노동 조건의 문제가 들춰지면서 이로 인한 우울증 또는 자살 충동 등의 건강 문제도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감정 노동자의 산업 재해 인정범위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한국 직장인의 전체 우울증 유병률은 7.4%로 유럽 평균 20%에 비해 크게 낮은 편이다. 왜 그런 것일까? 이에 대해 홍진표 등(2015)은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실제 우울증 유병률이 크게 낮다기보다는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인식 부족 또는 편견 등으로 인해 우울증을 경험하더라도 적절한 진단과 치료 등 필요한 도움을 못 받고 있을 가능성이 있고, 이 때문에 실제보다 우울증 유병률이 낮게 조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관련 자료 : 한국 직장인에서 우울증의 인식과 태도 조사 및 우울증이 근무에 미치는 영향)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의 우울증을 이미 경험하고 있는 경우라면 가능한 빨리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더 중요한 것은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에 훨씬 취약한, 낮은 직업 계층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우선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좋은 일자리,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은 개인의 건강은 물론 사회 전체 건강에도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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