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폭락 시대, 그는 어떻게 돈을 벌었나?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경성 최대 디벨로퍼, 건축왕 정세권의 시대

1936년 <매일신보>는 성공한 사업가들의 성공 사례를 시리즈('나는 어떠케 성공하얏나?')로 연재하였다. 그 중 다섯 번째 연재에 정세권의 인터뷰가 실렸다. 여기서 눈여겨야 할 부분이 있는데, 바로 제목이다.

'집값 폭락 시대의 무시무시한 그때를 말하는 건양사주-정세권'

연재 초기, 1920년대 이후 경성의 인구는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고 설명하였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인구라는 주택 수요가 증가하였기에 집값 역시 지속해서 상승해야 함이 마땅할지 모른다. 즉 1920년 이후 집값은 지속해서 인구 성장에 걸맞게 올라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기사는 '집값 폭락 시대의 무시무시한 그때'가 있었음을 전한다.

주택 시장에서는 가격이 끝없이 상승하거나 끝 모르게 떨어지는 상황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2000년대 중반, 집값은 끝없이 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하였다. 하지만 2008년 말 전 세계를 휩쓴 금융 위기의 순간, 집값은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일부 지방의 경우, 2012년 서울의 경우 2013년 말을 기점으로 반등하여 지금은 상승세로 접어들었다. 어느 국가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주택 시장은 사이클이 존재하는 시장이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상황이 100년 전 경성에서 벌어졌다.

▲ '나는 어떠케 성공하얏나(5)', <매일신보>, 1936년 5월 21일.
1936년, 기자와 정세권의 인터뷰내용이다.

정세권 : 저는 원래 고성의 한 부락에서 살았는데, 그 때부터 가옥에 대한 취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후 대정 8년(1919년) 상경하여 1년 동안 여러 가지 준비를 한 후, 그 이듬해 (1920년)부터 가옥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 후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자: 한 번도 손해를 아니 보셨다니, 대정 8년(1919년) 호경기 때 좋은 집 한 칸은 400원까지 올랐지만, 2년 후 대정 10년(1921년) 집값은 한참 폭락하여 180원까지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정세권: 아마 선생님 생각에는 이 물음에 대한 저의 대답이 아마 곤란하리라 여기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한 칸에 400원하던 주택 가격이 반값 이하로 폭락하여 장안의 집장사는 모두 손해를 보았으나, 저는 유독 절대로 한 푼도 손해 보지 않았습니다. (웃으면서)

(<매일신보>(1936년 5월 21일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나 (5)')

이 인터뷰에는 건양사가 빠르게 성공하였는지에 대한 힌트가 담겨 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합병한 후 조선 경제력을 장악하기 위해 회사령을 공표하였다가, 1919년 독립운동 이후 문화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1920년 3월 회사령을 폐지한다. 회사령은 회사 설립을 허가하는 제도이기에, 허가권자인 일제는 조선인 회사 설립을 불허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여러 지표는 조선인 회사들의 출현이 1910년대 매우 미약했을 보여준다. 하지만, 회사령 철폐로 회사 설립이 신고제로 바뀌면서 조선인 회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부동산개발업계에서도 당연히 회사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을 것이고, 건양사는 회사령 철폐(1920년 3월 폐지) 6 달 후인 1920년 9월 9일 설립되었다.

1920년까지의 호경기 동안, 건양사를 비롯한 다른 주택 건설 개발 회사들은 큰 사업 기회를 거머쥐었을 것이다. 경성으로 인구가 몰리는 호경기 시절, 주택 개발 회사들이 큰돈을 버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회사의 저력이 나타나는 상황은 불황에 직면했을 때이며, 어떤 전략을 세워 탈출하느냐가 관건이다.

2008년 이전, 부동산 호경기에 흥에 겨웠던 건설 회사들은 2009년 이후의 경기 장기 침체에 힘겨워하면서 건설경기 회복을 위한 대책을 무수히도 요구하였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 건설이라던 용산국제업무지구개발를 비롯하여 많은 대형 PF사업이 좌초했을 때, 건설 회사들은 불확실한 미래(불경기 혹은 경기 불황 등)에 대한 전략이 전무하였던 관계로 그들은 지속해서 특혜를 바랐다. 그리고 많은 건설 회사가 불황의 파고에 좌초하고 말았다.

1921년과 1922년의 경성 부동산 가격 대폭락은 살아남은 자에게는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경쟁자들이 시장에서 도태되었고, 살아남은 회사는 시장 지배자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시장 선도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세권의 건양사는 불황의 파고에서도 독특한 전략을 펼친다. 부실 자산의 즉각적 매도와 함께 시장 상황에 걸맞은 신규 개발 사업 진행과 이를 통하여 기존 부실을 축소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정세권의 증언이다.

"한 칸당 300~400원에 팔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칸당 250원가량의 밑천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를 180~190원에 팔면 손해가 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런 전략이 가능합니다.) 지은 집을 밑지고 판 대신에 뒤를 이어 즉시 한 칸에 170원에 집을 짓고 팔고, 10~20원쯤 남은 돈으로 은행 이자를 갚습니다."

위의 상황을 재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시장이 호황이었기에 시장에서는 한 칸당 300~400원의 주택 수요가 존재했다. 가격을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할 수 있었기에 꽤 좋은 시설의 주택을 건설할 수 있었고 칸 당 250원의 비용이 들어갔다. 하지만, 갑자기 대폭락 상황이 닥쳐 어쩔 수 없이 주택 매매 가격이 칸당 180~190원이 된다면, 기존의 주택(시설이 좋은 주택)을 60~70원 손해를 감내하고서라도 즉각 매도한다. 21세기적 해석을 한다면, 증권 시장에서의 손절매이며, 부동산 부실자산(NPL : Non-Performing Loan)을 즉각적으로 처분하는 것과 같은 대담한 전략이다.

하지만, 부동산 개발 산업에서 NPL을 처분하고 어떤 사업도 하지 않는 것은 앉아서 끊임없이 손해만 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만약 시대적 흐름을 간파하는 통찰력(경성의 인구 폭증하기에 주택 수요는 지속된다. 현재의 흐름은 몇 년 후 분명히 바뀐다)이 있다면, 신규 개발 사업을 진행하여 회사 매출을 일으켜야 한다. 여기서 정세권의 전략이 빛나는 이유는 적정 주택을 적정 가격에 공급하면서 매출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집값이 비싸기에 여러 옵션을 집어넣은 좋은 질의 주택이 아니라, 수요자들에게만 필요한 적정한 기능이 있는 적정한 가격의 주택을 공급하는 것이다. 기존과 같이 칸당 250원의 상대적으로 좋은 질의 주택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평당 170원의 적정한 수준의 주택을 건설한다.

그리고 이를 6~12%의 마진을 붙여서 180~190원의 시장 가격에 판매한다. 그렇다면, 정세권의 건양사는 10~20원의 이익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기존 주택의 처분으로 인해 칸당 60~70원의 손해가 났을지라도 매출을 지속적으로 확대한다면 10~20원의 이익이 꾸준히 발생하기에 기존의 손해분을 메우는 것이 가능해진다. 더 나아가 그의 바람대로 시장이 과거의 가격으로 회복되어 칸당 400원이 된다면, 그는 10~20원의 이익이 아닌, 230원의 이익, 즉 원가 대비 130%의 이익을 건지게 된다.

디벨로퍼가 부동산 개발 사업을 수행하는 경우, 사업 비용의 전부를 자기 자본으로 충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 미국과 같이 부동산 개발업과 관련 금융업이 발달한 경우, 일반적으로 디벨로퍼는 전체의 20~30%정도를 자기 자본으로 충당한다. 물론 이 경우도 자기 자본 내에 외부 투자자 자금을 이용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따라서 부동산 개발 사업에서 디벨로퍼와 금융권 간 신뢰 관계는 사업 성공에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는 부동산 하락기에서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상승기에는 사업이 잘 되기에 은행 대출을 충분히 갚고도 남으나, 하락기에는 사업의 돈줄이 막히기 때문에 은행 대출을 갚을 여력이 없기 마련이다.

독특한 전략으로 건양사는 부동산 폭락기를 무사히 지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금융권과 강력한 관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렇게 몇 번 하는 동안에 일시 폭락하였던 집값이 다시 옛날 값대로 복구되었을 때, 170원에 지은 집을 복구된 시세 (칸당 400원)대로 팔아 그 전에 밑진 그만큼 복구하여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이익은 못 볼 수 있습니다만, 손해는 보지 않고 그 대신 해마다 거르지 않고 꾸준히 집을 지어온 관계로 은행으로부터 신용을 얻어 금융이 민활하여 조금도 거리낌 없이 무시무시한 그때를 아무 일 없이 넘어왔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그의 예상대로 곧바로 상승세로 돌아섰다. 그의 또 다른 증언이다.

"대정 8년(1919년) 당시에 농촌 인구가 도시에 집중됨으로 다량의 주택이 필요케 되었는데, 당시 주택 가격의 폭등은 형언할 수 없는 바가 있어서, 현재(1940년)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물자가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물자 구입이 가능하였으므로 2, 3년간은 주택 경기 활황을 보게 되었으나, 그 뒤 대정 11년(1922년) 경에 이르러 대폭락을 보게 되었다. 이래 한동안 주택 가격은 저위(저위, 낮은 상태)를 유지하였는데, 대정 12, 13년 (1923년, 1924년)이래 다시 점점 높은 상태가 되어 소화 5년(1930년)에 다시 상당히 고가에 이르게 됩니다."


(<매일신보>(1940년 1월 6일) '경기는 앞으로 어떠할까')

그의 전략(NPL 즉각 처분과 적정 가격의 적정 주택 대량 공급)과 함께 주택 시장이 다시 오를 것이라는 통찰력은 대폭락장에서 건양사를 굳건히 지켜냈다. 1923년 드디어 부동산 시장이 상승세로 돌아선 순간, 경성의 부동산 시장 내 다른 디벨로퍼들은 도태되어 있었고, 폭락장을 거치면서 금융권과 파트너십을 구축한 건양사는 시장의 선도적 위치에 올라선다. 경성 최대 디벨로퍼, 건축왕 정세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정세권의 건양사는 1929년 한 해 경성에서 지어진 한옥의 15~20%를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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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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