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주인공이 잊히는 게 온당한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왜 정세권인가?

광복 70주년과 맞물려 영화 <암살>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한 역사적 평가가 미약했음에 대한 자성,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연유로 역사 앞에 드러날 수 없었던 인물에 대한 안타까움이 대중에서 회자되었다. 이의 연장선에서 아래의 질문을 해 본다.

조선물산장려회 재정을 절대적으로 후원하면서 조선물산장려회의 황금기를 열었고, 조선어학회 재정을 지원하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문을 당한 사람이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지는 게 온당한가.

조선물산장려회. 온 국민이 국사 시간에 최소한 이름은 들어본 단체다. 단어 뜻대로 좋은 조선 상품을 많이 생산하고 조선 상품을 많이 소비하여 조선 경제력을 키우자는 운동을 주도한 단체다. 기억력이 좋고 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만식 선생이 이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역사에서 잊혀진 '그'

조선어학회 그리고 조선어학회 사건은 어떤가. 역시 최소한 이름은 들어본 단체이고 사건이다. 조선어학회는 우리글과 말을 지키자는 학회로 어떤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활동을 위해 많은 자금이 들어갔을 것이다.

전국에 걸쳐 조직을 갖추고 운동을 하든가, 아니면 민족을 위한 비영리 사업을 한다면 누군가는 조직을 만들어서 이끌어야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상당한 자금을 후원해 사업이 진행되게 해야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좋은 캠페인이건 활동이건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자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에서 잊혀진 어느 '누군가'는 두 단체 재정의 상당 부분을 본인 회사를 통해 후원했으며, 본인 건물 1층에는 조선물산장려회 물건을 판매하는 상점을 개설했고, 별도 조직을 설립해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를 만들고 홍보했다.

'그'가 조선물산장려회 재정이사로 재직하면서 도움 준 시기는 조선물산장려회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그가 조선물산장려회를 나온 후,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은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조선어학회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조선어학회 건물을 본인 자비로 건설해 기증하고 지속해서 후원했다. 조선어학회는 말이 어학회지 어학회가 아니다. 1940년대 일제 폭압 속에서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 목숨을 걸고 한 독립운동 단체와 진배없다.

▲ 1949년 6월 12일에 찍은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동지회 기념 사진. 앞줄 좌측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윤국. ⓒ한글학회

우리 말 지키려던 '집장사'꾼?

그렇기에 주도적 인물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모진 고민에 시달렸고, 그 중 2명은 고문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그'도 조선어학회 사건 주도자로 함께 고문을 당했고, 이후 '그'의 재산 상당량(서울시 뚝섬 일대 대규모 토지)을 일제에 빼앗기면서 회사 자체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다.

그리고 그는 경성 전역(주로 종로 이북 조선인 거주지역)에 작은 한옥이 옹기종기 모인 한옥 집단 지구를 건설했다. 조선인을 위한 주택을 조선인 회사가 건설하여 조선인들이 살게 하였다. 즉, 한옥 공급을 통해서 주택 부분의 물산 장려 운동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조선인의 북촌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집장사'꾼으로 불리었고, 그의 한옥들은 20세기 후반까지 대중의 관심 대상 밖에 머물렀고 철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가 개발한 가회동 31번지는 전 국민 아니 세계인들이 서울에 오면 들리는 명소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를 모른다. 역사 앞에 들어날 수 없는 숨은 주인공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중요 민족 운동의 주요지도자를 모른다면, 이는 더 애처롭고 부끄러운 현실일지 모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디벨로퍼이자,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실질적 주인공, 조선어학회의 후원자 기농 정세권 선생이 바로 그다. 그에 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자.

▲ 정세권 선생이 개발한 가회동 31번지 한옥 집단 지구. ⓒ이주현


천재 소년, 19세에 면장이 되다

정세권은 1888년 4월 10일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잊는 가난한 가정이었다고 한다. 총 14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가장 못사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천재적인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정세권에 대한 기록 자체가 드물기에 가족들의 설명과 기록이 다소 엇갈리는 부분이 있기는 하나, 그가 서당에서 교육을 받았고, 매우 어린 나이에 장원을 하였으며, 진주사범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천재성이 발하는 예로써, 진주사범학교 3년 과정을 단 1년 안에 졸업한 것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첫째 따님 정정식 님(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의 증언이다.

"1900년대, 일본 사람들이 방방곡곡에 사범학교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일본 교육을 시키려고 애를 썼는데, 아버님이 사범학교를 다녔어요. 남들이 3년을 다니는 과정을 1년 만에 졸업을 했어요. 그리고 18살에 면장이 되셨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버지를 천재라고 불렀어요."

그가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한글학회(조선어학회)에서 1965년 정세권 사후, 그를 기억하면서 쓴 조상문의 일부다.

"기농 선생! 선생은 원래 비범한 재질과 탁월한 실천력을 타고 났습니다. 열두 살에 진주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고, 진주사범학교에서 학년을 뛰고 또 뛰어 넘어서 1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만큼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천재였습니다. 열여덟 살에 기자능 참봉이 되고, 스물세 살에 면장에 피임된 것은 선생의 월등한 역량이 모든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었습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8살(1907년)의 어린 나이에 그는 참봉에 제수되었고, 19살(1908년)의 나이에 (하이면) 면장에 임명된다. 면장이 된 시점은 의견이 갈린다. 한글학회와 아드님 정용식 씨 증언 기록에 의하면 1910년 23세에 면장이 된 것으로 나오기도 하나, 따님 정몽화 씨 기록에 의하면, 1908년 참봉이 된 후, 1년 후 1909년에 면장에 임명된다고 한다.

당시 고성군 군수가 정세권을 눈여겨 본 후, 하이면 면장으로 임명하였다고 하며, 이로 인해 대대로 면장을 했던 최 씨 가문과 마찰이 생겼다.

거짓말 안하는 면장

그리고 1910년 한일 강제 합방으로 국가 통치 주체가 일제로 바뀌는 과정에 아래의 에피소드를 정몽화 씨는 전한다.

면장이 되신 지 2년 만인 1910년에 한일 합방이 되었다. 일본 헌병대장은 그 때 고성군 내 면장들을 모두 모아 놓고 "한일합방을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물었다. 모두 "좋다"라고 대답해서 풀려났는데, 아버님은 "좋지않다"라고 대답하니 감영에 가두어 놓았다. 동네 어른들이 매일 찾아와서 "좋다캐라, 좋다 캐라" 말하라고 감영 앞에서 야단이었다. 그 후 헌병대장이 또 왔다.


"한일 합방을 안 좋다고 했다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좋다는 말은 거짓이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시오. 당신 같으면 당신 나라가 남의 나라와 합방을 당했는데, 나라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다 할 것이요? 나는 거짓말은 안 하는 사람이오."

그랬더니,

"음, 거짓말 안하는 면장이군, 그렇다면 좋소. 나가시오."

그 다음부터는 거짓말 안하는 면장으로 통하게 되어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아 일하기가 아주 수월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하이면 면장으로서 주민 소득을 향상하고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방풍림 조성 사업을 펼치기도 하였고, '대동계'라는 저축계를 발족시켰다. 누에 치는 잠업조합연습소를 설립하고 목화를 대량 생산하기도 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전국 우수 면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여러 사업 중 그가 가장 역점을 두고 싶었던 사업은 주택 개량이었다. 그는 하이면에 있는 초가집들을 모두 기와집으로 바꾸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면장으로 재직한 지 몇 년 후 1912년, 24세 나이로 그는 면장직을 사임한다.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한 회의와 면장직을 독점하였던 다른 집안으로부터 테러를 당한 연유에서다. 이후 1919년 진주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고는 하나, 자세한 정황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1919년 기미년 독립운동 이후, 그는 드디어 큰 결심을 한다. 하이면을 떠나 경성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는 상경 후,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부동산 개발 회사 건양사를 설립해 그의 거대한 꿈 대규모 근대식 한옥 단지 개발을 하이면이 아닌 경성에서 시작한다. 삼청동, 가회동, 익선동, 봉익동, 혜화동, 성북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지에 한옥 집단 지구가 출현한 것이다.

1) <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2) 2014년 1월 15일, 정정식 님과 인터뷰.
3) 유제한, '기농 정세권 선생을 조상함', <한글학회>,1965년.
4) <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37쪽.
5) <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35쪽.
6) 김란기, '일제하 민족 건축 생산 업자에 관한 연구-개량 한옥 건설 업자 김종량과 정세권을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제9권 제2호, 1989년.
7) <구름따라 바람따라>(정몽화 지음, 학사원 펴냄, 1998년)
8) 2014년 1월 15일, 정정식 님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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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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