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금권정치에 떨어진 '폭탄', 제러미 코빈

[주간 프레시안 뷰] "신자유주의, 대안은 있다"

1980년대 이후 미국과 함께 세계의 신자유주의를 이끌어왔던 영국 정계에 폭탄 하나가 떨어졌습니다. 노동당의 만년 비주류 의원 제러미 코빈이 영국 정당 사상 최대 지지를 받으면서 노동당 당권을 거머쥔 것입니다. 그의 당선은 그동안 노동당이 자본의 이익만을 대변해왔음을, 나아가 일반 대중의 민심과는 완전히 괴리돼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대 사건'입니다.

코빈의 승리는 올해 1월 그리스에서 '반(反)긴축'을 내건 시리자 정권이 탄생한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충격을 유럽 정치에 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30여 년 간 금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던 유럽 정치가 자본에 맞서 시민들의 삶을 되찾는데 나설 중대한 전환의 계기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출마조차 불투명했던 코빈, 막상 뚜껑 열어보니 압도적 승리

지난 12일 치러진 노동당 선거에서 코빈은 59.5%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수에 선출됐습니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당초 그는 후보 등록에 필요한 의원 35명의 추천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32명의 노동당 소속 의원 중 코빈을 지지한 의원은 15명에 불과했습니다. 당의 정치적 관용과 다양성을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의원 20명이 추천해 준 덕에 가까스로 당 대표 선거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코빈의 압도적 승리였습니다. 55만 명이 등록하고 44만 명이 투표한 이번 선거에서 59.5%의 지지를 받은 것입니다. 영국 정당 역사상 가장 압도적 승리라고 합니다. 이전 기록은 1994년 토니 블레어의 57%였습니다.

코빈의 압도적 승리에는 2014년 노동당의 당 대표 선거 개혁이 한몫을 했습니다. 3파운드를 내면 당 대표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을 준 것입니다. 2013년 출범한 반긴축민중회의 등 신흥 풀뿌리 진보운동 역량을 흡수하고, 노동당의 기존 지지 세력이었던 노조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약 20만 명이 이런 방식으로 참가했습니다. 또한 이번 투표자 중 70%는 2010년 이후 노동당에 가입한 사람들입니다. 결과는 청년 세대를 비롯해 새로운 노동당 지지층이 코빈에게 표를 몰아준 것입니다. 출마조차 어려웠던 그가 당원, 시민들의 지지로 압도적 승리를 거둔 이번 선거 결과는 노동당 주류의 패배, 일반 대중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당심과 민심이 완전히 괴리돼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승리의 더 큰 요인은 코빈이 30여 년의 의정 생활에서 반긴축, 그리고 미국의 군사주의에 대한 반대 등 민중적 정치 노선을 확고하게 지켜온 것입니다. 코빈은 잉글랜드 중부 윌트셔에서 엔지니어 아버지와 수학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메이카에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그후 런던에 돌아와 전국공무원노조와 직물노동조합에서 상근직, 런던 지방의원으로 일한 뒤 1983년 북런던에서 하원에 입성했습니다. 그 후 8선을 하며 32년 간 노동당 내의 대표적 반주류, 강경 좌파 의원으로 활약했습니다. 1979년 대처 보수당 정권 출범 이후 보수당을 닮아간 노동당의 주류 노선에 맞서 원내 투표에서 500차례나 당 노선에 반하는 투표를 했습니다. 자동차를 갖지 않았으며 도보나 자전거로 출근하는 등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합니다.
(☞관련 기사 : 당 노선 500차례 반대 '만년 아웃사이더'…영국 노동당 거머쥐다)

'긴축 반대, 전쟁 반대'

그의 정치노선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긴축 반대, 전쟁 반대'입니다. 부자만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경제가 돼야 하고, 난민 위기 등 지구촌의 온갖 혼란을 초래한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시민을 위한 양적 완화'를 제창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막대한 통화 팽창이 은행 등 금융기관 구제에만 사용된 것을(2009년 한 해에만 영국 최상위 부자 1천명의 재산은 50%가 늘었다고 합니다) 비판하면서 주택, 에너지, 대중교통, 정보통신 등 시민의 삶의 개선을 위한 인프라 투자에 쓰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토에 대해서도 탈퇴를 시사할 만큼 비판적입니다. 1990년 탈냉전 이후 소련 봉쇄라는 애초의 목적에서 벗어나 미국이 벌여온 대외 군사 모험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2013년 8월 오바마가 주도한 시리아 공습에 반대했고(영국 의회의 반대로 시리아 공습은 무산됐죠), 이에 앞서 블레어의 이라크전쟁 참여에도 반대했습니다. 특히 이라크전쟁에 대해서는 유엔 승인이 없는 불법적 전쟁이었다며 블레어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블레어에 의해 삭제된 노동당 당헌 4조의 복원을 약속했습니다. 철도, 전기, 가스 등 주요 산업의 국유화 조항입니다.
(☞관련 기사 : NATO, refugees, Brexit: Newly-elected Labour leader Jeremy Corbyn in best RT interviews and more)

이번 선거가 끝난 후 코빈은 "국민들은 불의와 불평등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다"면서 "정치인 대부분과 언론은 젊은이들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현실정치에서 소외됐다. 이를 바꿔야만 한다. (신자유주의와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에 대한) 반격은 힘을 얻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우리는 불공평해서는 안 된다, 사회는 공정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은 변할 수 있고, 변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코빈의 정치 노선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제3의 길'을 내세우며 신노동당 시대를 연 블레어(1997~2007년 집권)의 정치 노선과 극단적으로 대비됩니다. 블레어의 노선은 한마디로 '친기업, 친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민영화와 탈규제를 밀어붙였고, 2003년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적극 지지해 '부시의 애완견'이란 별명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블레어의 뒤를 이은 고든 브라운 총리에(2007~2010년) 이르기까지 노동당은 13년 집권에 성공했지만, 시민들의 삶은 오히려 악화되기만 했습니다. 신노동당의 노선이 '짝퉁 노동당(사회민주주의의 포기)'이자 '아류 보수당'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 타리크 알리는 코빈의 대외정책에 주목합니다. 클레멘트 애틀리, 해롤드 윌슨 총리 등 2차 대전 후 영국의 복지국가 건설을 주도한 노동당 출신의 정치인들도 국내정책에서는 진보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외교안보 정책만큼은 미국을 추종한 반면, 코빈은 ‘반전 평화’라는 자주적 노선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죠.

(☞관련 기사 : Jeremy Corbyn: the Most Leftwing Leader Labor Has Ever Had)

코빈의 이번 승리는 신노동당의 종언을 의미합니다. 지난 20년간 영국 정치에서 초당적 합의를 이루었던 '친기업, 친미' 노선에 중대한 균열이 생긴 것입니다. 당연히 집권 보수당은 화들짝 놀란 모습입니다. 선거 직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트위터를 통해 "노동당은 이제 영국의 국가 안보, 경제 안보, 우리 가족들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됐다"고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종북몰이를 보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위기의식도 깔려 있습니다. 보수당의 한 장관은 "우리는 이제 전혀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코빈을 받아들여서도 안 되며, 그의 정책이 극단적이라고 비웃거나 보수당의 승리를 확신해서도 안 된다. 유권자들은 우리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관련 기사 : 'Threat to national security': Cameron leads Tory onslaught on Corbyn)

▲ 제레미 코빈.ⓒAP=연합뉴스


갈 길은 멀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물론 코빈이 노동당 당권을 장악했다 해서 영국 정치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당은 지난 5월 총선에서 보수당에 과반 의석을 내주며 참패한 야당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선거 결과는 지난 20년 간의 신노동당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임투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당의 원내 의원 대다수는 코빈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코빈 앞에는 당내 기득권 세력의 반대를 돌파하고 일반 시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노동당을 변화시켜야 하는 힘겨운 과제가 놓여 있습니다. 다음 총선은 2020년입니다. 앞으로 5년 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설사 코빈이 당권을 확고히 다잡고 총선에서 승리한다 해도 지난 35년 간 신자유주의로 일관해온 영국 정치가 실질적으로 변화하려면 10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적 징조들도 있습니다. 코빈의 승리 이후 불과 사흘만에 노동당 당원이 3만 명이나 늘었다고 하는군요. 노동당이 참패한 5월 총선에서도 희망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선거를 통해 스코틀랜드에서 노동당이 전멸하고 스코틀랜드민족당(SNP)이 약진한 겁니다. 총선 이전 6석에서 58석으로 무려 52석이 늘어나면서 제3당으로 떠올랐습니다. 반면 총선 이전 제3당이었던 자유민주당은 56석에서 8석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SNP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앞세우는 민족주의 정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는 반긴축, 반신자유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노동당이 원래의 정체성을 찾을 경우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미약하기는 하지만 녹색당도 코빈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영국 웨스트체스터 대학교의 그래험 맥피 교수는 그리스의 시리자 집권보다도 이번 영국 노동당의 당권 교체가 유럽의 정치판도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는 유럽연합 GDP의 1.3%에 불과한 약소국가인 데다 시리자가 신생 정당인 반면, 영국은 미국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원조 국가이자 유럽 3위의 경제대국이며 노동당은 집권 경험이 풍부한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반긴축을 내세우며 집권한 시리자 정부가 지난 7월 국제채권단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프랑스 사회당 등 주요 국가 진보정당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정당 역시 영국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에 포획된 탓입니다. 따라서 영국 노동당의 변화는 독일, 프랑스 사회(민주)당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죠.
(☞관련 기사 : Jeremy Corbyn’s Victory Is a Political Bombshell for the UK)

유럽, 민주주의 복원으로 나아가나

지난 7월 국제채권단에 대한 시리자 정부의 굴복에 반대하며 그리스 재무장관을 사퇴한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유럽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복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올 연말까지 그리스, 포루투갈, 스페인 등 세 나라에서 유럽 민주주의의 앞날을 가름할 총선이 열립니다. 내년 4월에는 아일랜드 총선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2010년 유럽 재정위기의 타격을 가장 크게 받으면서 PIGS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던 나라들입니다. 스페인과 아일랜드의 경우 지난 5년간 땅값이 500%나 뛰었다고 하는군요. 그만큼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습니다.
(☞관련 기사 : Greek Lesson: We Need European Democratization)

오는 20일 그리스 총선은 채무 조정에 실패한 시리자 정부의 재신임을 묻기 위한 것입니다. 10월 4일에는 포루투갈, 12월 15일에는 스페인 총선이 열립니다. 현재로서는 승패를 전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치프라스 총리의 인기가 높긴 하지만 일부 의원의 이탈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없습니다. 포루투갈에서는 집권 사회민주당과 반긴축 야당 연합이 여론조사에서 막상막하로 나오고 있습니다. 한때 인기가 치솟았던 스페인의 반긴축연합 포데모스는 최근 지지도가 정체되긴 합니다만 지방선거에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 주요 도시의 시장을 석권한 저력을 갖고 있습니다. 스페인은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이은 유럽 5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점에서 만일 포데모스가 집권에 성공한다면 그 충격파는 상당할 것입니다.
(☞관련 기사 : These Four Elections Could Decide the Future of Europe)

한편 미국에서도 버니 샌더스의 상승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힐러리와의 지지도 격차가 50 대 10에서 40 대 30으로 좁혀졌습니다.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가 주도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커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그리고 2010년 유럽의 재정위기로 경제적으로는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의해 공고해진 기득권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 곧 정치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지금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1980년대 대처는 "대안은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고 선언했습니다. 신자유주의 외에 대안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시리자의 집권, 그리고 코빈의 승리 등은 "대안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시민들의 단합된 힘입니다. 그리하여 정치를 바꾸고 돈에 의한 인간과 사회의 지배를 끝장내는 것입니다.
(☞관련 기사 : Can Jeremy Corbyn Stem the Tide of Neoliberalism and Milita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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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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