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 향한 비난의 반은 '자폐' 민주노총에…"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87년 노동체제'의 진짜 문제

"임금 피크제요? 그거 자본가의 주머니에 돈 넣어주려는 거죠."

임금 피크제를 추진하는 정부 방침을 설명하니 스웨덴 노조 간부가 한 말이다. 스웨덴은 정년이 65세다. 스웨덴에서 대체로 임금은 정년에 가까울수록 올라간다. 청년 고용 창출을 위해서라는 정부 논리를 말하자 그런 사례는 없다는 투로 "No, No" 하면서 고개를 흔든다.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고용의 룰을 정한 취업 규칙을 사용자 마음대로 바꿀 수 있도록 한다는 설명을 더하자 "한국은 OECD 국가 맞냐"는 반응이다.

이런 문제들을 사회적 대화랍시고 노사정위원회에서 다룬다니, 그렇게 할 일 없냐는 눈치다. 기업 단위의 개별 노사가 자율로 정할 일에 중앙의 노사정이 끼어서 뭘 어쩐다고. 비정규직의 고용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비정규직 사용 연한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린다니 기가 찬 표정이다. 1년으로 줄여도 모자를 판에 4년으로 늘린다?

자본의 힘을 강화하고 노동의 힘을 빼려

사회적 합의라는 미명 하에 최근 노사정위원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노동 관련법을 개악하기 위한 전초 단계다. 노동자 임금을 깎고, 노동 조건을 악화시키며, 노동 강도를 높이고, 단체 교섭을 약화시키고, 고용 불안을 가중시킬 것이다.

결국 자본가의 힘을 강화하고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통해 사업장 안팎에서 노동자에 대한 폭력·착취·차별을 강화함으로써 작금의 경제 위기를 탈피하려는 자본의 전략인 것이다.

자본의 이런 전략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 체제에 고유한 특징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노동자를 억압하고 차별함으로써, 그리고 사업장 안팎에서 노동자를 착취하고 폭력을 가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체제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 제도나 기관은 거의 없다. 교회나 성당 그리고 사찰을 보라. 세속을 초월했다고 주장하는 종교 기관들이 자본주의에 밀착해 부와 권력을 일궈온 역사를 보라. 어떤 측면에선 노동조합도 자본주의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을 주는 조직이다.

한국노총은 '야합', 그럼 민주노총은?

이런 구조와 체제의 문제를 고려할 때, 노동조합운동이 "전부(all)아니면 전무(nothing)"라는 전술을 취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대신 그 전술은 제도권의 안과 밖에서 자본의 이익 극대화를 막아내고 노동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어야 한다.

현 시점에선 자본이 60을 얻을 판이라면 그것을 50으로 줄이고, 노동이 10을 얻을 판이라면 그것을 20으로 늘리는 전술이어야 한다. 그리고 '한판주의', 즉 이번에 한번 밀리면 모든 게 끝장난다는 패배주의를 버려야 한다. 이번에 밀리더라도 다음 기회엔 만회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는 기본이다.

이런 측면에서 민주노총은 한국노총이 노동자 계급을 배신했다고 비난하지만, 민주노총은 그 동안 무엇을 했는지 솔직한 평가가 필요하다. 민주노총이 무인도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작금에 벌어진 사태에서 한국노총이 듣는 비난의 절반은 민주노총에 돌아가야 마땅하다.

▲ 한국노총이 참여한 노사정 합의에 반발해 삭발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연합뉴스


'1987년 노동 체제'의 진짜 문제

진짜 문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이나 일터 안팎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확대하고 노동자의 이익을 개선하는데 실패해왔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가 국제 노동 기준이다. 국제노동기구(ILO)가 만든 국제 노동법, 즉 협약 190개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전투적인 노동운동을 가졌다는 대한민국이 비준한 것은 29개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부가 노동 개혁의 모범으로 치켜세운 독일은 85개, 네덜란드는 106개를 비준했다.

ILO는 대한민국 국민 반기문 씨가 사무총장으로 있는 유엔 산하 기관이다. 다시 말해, ILO 기준은 유엔 기준이다. 그 ILO가 만든 190개 협약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 8개를 따로 추려 기본 협약이라 부른다. 제87호 협약(결사의 자유), 제98호 협약(단체교섭권), 제29호 협약(강제노동), 제105호 협약(강제노동 철폐), 제100호 협약(동등 보수), 제111호 협약(고용과 직업에서 차별 금지), 제138호 협약(최저 연령), 제182호 협약(최악의 형태의 아동 노동)이 그것이다.

핵심적인 기본 협약 8개 가운데 대한민국은 결사의 자유, 단체교섭권, 강제노동 철폐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은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ILO에 제소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는데, 그 근거는 일본이 제29호 협약(강제노동)을 비준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물론 박근혜 정부가 따르려는 독일과 네덜란드는 기본 협약 8개 모두를 비준한지 오래다.

초라한 전략, 조잡한 전술

대한민국이 비준한 차별 금지 협약은 비정규직 문제와 연관되어 있고, 아동 노동 협약은 청소년 알바와 연결되어 있다. ILO는 회원국이 비준한 협약의 이행 여부를 회원국의 노사정 3자가 공동 조사하여 보고서로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데,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비준된 협약에 대해 공동 조사를 정부와 사용자에 요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다.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대한민국은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을 누리지 못하는 나라임에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공히 자신들의 공식 대의 기구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한 적 없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로드맵 하나 만든 게 없다. 말의 성찬 속에서 전략은 초라했고 전술은 조잡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국민적 지지를 얻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자기 조합원을 제대로 대표하지도 못했고, 사회경제적으로 자기 조합원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대변하지도 못했다. 1987년 이후 삼십년 가까이 이런 세월들을 보내온 노동운동의 오늘날이 이토록 초라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권리와 이익의 상관관계

결사의 자유, 단체교섭권, 강제노동 금지, 차별 금지, 아동 노동 금지 같은 노동 기본권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임금이 깎이고, 노동 시간이 악화되고, 노동 강도가 세지고, 노동조합의 조직력과 교섭력이 무너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계급 정치에서 이익은 권리에 정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진짜 귀족들로부터 귀족이라 비아냥거림을 당하는 노동조합들은 무엇을 하여야 할까. 우선 자체의 운동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는 과학적인 전략의 수립과 실천 가능한 전술의 마련을 통해 가능하다. 조직 노동을 넘어 1천800만 노동자 계급이 공감할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솔직한 자기 평가와 반성을 전제한다.

노동조합의 위상과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 기본을 바로 세우자는 얘기다. 모든 일터에서 근로기준법의 최저 기준을 실현하고, 사업장 안팎에서 단체협약 적용률을 높이고 노동자 민주주의를 확대하며, 국가의 산업 정책과 고용 정책에 개입함으로써 기업 활동은 물론 국민 경제의 주요 행위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실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폐적인 '비주류' 노선을 탈피하여 노동조합운동이 대한민국의 주류(mainstream)로 발돋움하려는 적극적이고 열린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바로 맞물려 있는데, 실패로 끝난 민주노동당 실험을 체계적으로 평가하고, 그 성과와 한계를 실천적으로 분석한 토대 위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야 한다.

10% 조직 노동이야말로 소중한 발판

우리 앞에 놓인 역사적 도전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10%의 조직 노동에서 출발해야 한다. 대기업-정규직 노조는 버려야 할 구정물이 아니라, 깨끗이 닦아 기름질 쳐야할 소중한 욕조며, 전진을 위한 디딤돌이다.

사회 체제의 측면에서 '헬조선'은 10% 노동자들이 너무 많은 것을 누려서가 아니라, 90%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것을 누리지 못해서 만들어졌다. 10% 노동자들이 귀족이 되어서가 아니라, 이 땅의 진짜 귀족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귀족정을 민주정으로 제대로 바꾸지 못해 만들어졌다.

노동자들이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고학력-저학력, 남성-여성, 내국인-외국인, 청년-기성세대, 한국노총-민주노총으로 서로를 가르지 않고 하나로 단결할 때, 그리고 단결된 노동운동이 노동자에게 폭력·착취·차별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의 현 체제를 변화시키려 함께 나설 때, ‘헬조선’의 문제는 해결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발판은 10% 조직 노동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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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택시노련 기획교선 간사,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사무국장, 민주노동당 국제담당, 천영세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근로기준법을 일터에 실현하고 노동자가 기업 경영과 정치에 공평하게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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