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조선 선비의 대답은…

[유학자의 동물원 ①] 선비, 육식을 고민하다

조선 시대 '선비'와 '동물'은 왠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의복을 갖춰 입은 다음에 꼿꼿이 앉아서 유학 경전을 읊는 그들이 하찮은 미물인 동물에 관심을 가졌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습니다. 조선 시대 최고의 유학자 가운데 하나인 이익은 "고기가 되어야 하는 짐승들의 물음"을 들으며, 육식을 해야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그의 고민을 따라가다 보면, 20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체계가 잡힌 '동물권'을 둘러싼 서양 철학의 관심을 이미 수백 년 앞서 선취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동물행동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동물을 치밀하게 관찰하게 또 세밀하게 기록했죠. 소나 말 같은 가축은 물론이고 물고기, 날짐승 심지어 벌레도 그들의 눈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동물 세계에서 인간 세계의 모습을 보고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았죠.

조선 선비의 눈에 비친 동물의 세계. 듣기만 해도 호기심이 당기는 이 주제를 재기발랄한 젊은 학자 최지원이 파헤쳤습니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던 '동물덕후'였던 그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문화학과에서 '조선 유학자의 동물 관찰기'를 주제로 공부했고, 그 결과를 이렇게 책으로 묶었죠.

자, 이제 이 흥미로운 책을 직접 읽어볼 시간입니다. <프레시안>과 알렙 출판사는 <유학자의 동물원>을 먼저 읽은 네 명의 독후감을 매주 화요일, 목요일 두 차례씩 연재합니다. 철학자, 수의사, 사학자의 흥미로운 독후감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첫 번째 독후감의 주인공은 <동물을 위한 윤리학>(사월의책 펴냄)의 저자인 철학자 최훈 강원대학교 교수입니다.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조선 선비의 대답은…

▲ <유학자의 동물원>(최지원 지음, 알렙 펴냄). ⓒ알렙
유학이 종교인지 아닌지는 논란거리이지만 종교라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인 종교로 알려져 있다. 그런 유학자들이 동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의외이다.

그러나 <유학자의 동물원>이 보여 주는 유학자들은 동물 행동학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동물의 행동을 치밀하게 관찰한다. 그러면서도 거기서 인간의 성품을 읽어낸다. 이런 식이다.

"침을 한 번 쏘면 다시 살 수 없건마는 / 용기를 냄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도다 / 사물을 두고도 서로 다투지 아니하니 / 그 얼마나 어진가." (이익, 130쪽)

"(새끼를 잡아먹은 구렁이에게 복수를 하고 새끼를 살려낸 족제비를 보고) 아, 얼마나 지혜롭고 의롭고 자애로운가!" (이덕무, 264쪽)

역시 유학자답다. 이 책에는 유학자의 저술에서 찾은 이런 예들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짐승과 같다'나 '금수와 같다'와 같은 말에서처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동물이 들먹여진다. 그런데 왜 유학자들은 동물에서 인간의 도리를 읽어낼까? 저자도 지적하듯이 오늘날의 동물 행동학도 지나친 의인화로 비판을 받는데, 유학자들이 동물의 행동에서 도덕을 읽는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는 은유 이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럼에도 그들이 동물에게 그러한 인격적 대우를 한 것은 하찮은 것으로 생각되는 존재에 대한 따뜻한 배려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동물의 '억하심정'을 자주 강조한다. 사람은 종종 억하심정을 느끼고 이것을 작든 크든 화풀이와 앙갚음으로 되돌려주고 싶어 한다. 저자에 따르면 동물도, 특히 하찮은 동물일수록 그런 억하심정을 느낀다.

쥐나 파리는 인간에게 끔찍이도 혐오스러운 동물로 인식되지만 어디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는가? 소나 말은 평생 일을 해야 하고 코도 뚫리고 굴레도 져야 하는데 그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할 데가 있는가? 모든 생명은 그저 우연하게 태어났을 뿐인데, 누군들 쥐나 파리가 되고 싶고, 누군들 소나 말이 되고 싶지 않는데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만물의 부모 입장에 서 있는 유학자들[이] 만물의 억울함을 똑같이 들어보자고 제안"(176쪽)했다는 저자의 해석은 탁월하면서 흥미롭다. 만물의 부모된 유학자들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를 엄벌하기도 해야 하지만 그런 존재를 잘 위로하고 구슬리기도 해야 한다. "만물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억하심정을 읽어냄으로써 인간이 세계를 마주하는 태도를 새롭게 제시"(181쪽)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학자들이 호랑이의 위엄과 백로의 고고함만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찮은 '미물'에 인륜을 부여한 것이 이해가 된다.

저자가 유학자의 동물관에서 읽어낸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 세계에서 만물의 공통된 호오는 살기를 좋아하고 위험을 싫어하는 것"(31쪽)이다. 각 동물의 인지적인 수준이나 생태적인 조건에 따라 호오는 당연히 다르게 나타난다. 인간처럼 지적인 호기심을 보이며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사는 동물도 있지만, 두더지처럼 평생 흙을 파며 사는 동물도 있고 말똥구리처럼 평생 똥을 굴리며 사는 동물도 있다. 그러나 모든 동물의 공통점은 좋아하는 것은 하고 싫어하는 것은 피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방해할 때 괴로움을 겪는다는 사실이다.

학교를 가고 싶은 사람을 못 가게 막는 것은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처럼, 풀을 뜯어먹으며 동료와 함께 어울리려는 사슴을 방해하는 것은 사슴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곧 각 동물의 본성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인데, 그런 점에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소의 코를 뚫는 것이 소의 본성에 부합하는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성대중이 "소의 코를 뚫고 말에 굴레를 씌워 옭아매며 새매에 줄을 매달아 사냥하는 것이 어찌 그들의 본성에 맞는 일이겠는가"(183쪽)라고 말했고, 박제가는 청나라를 다녀온 후 <북학의>에서 코가 꿰이지 않았는데도 밭을 잘 가는 소와 사람의 채찍 없이도 온순한 말의 모습을 증언하다(198쪽).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원초적인 감정을 동물에게 인정한다면 유학자들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는 않았다. 사람을 위해 일을 하는 소를 먹기까지 할 수 없다는 율곡도 있었고, 늙고 병들어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더라도 네발 달린 짐승의 고기는 먹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수광도 있었지만(63쪽),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채식주의자는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또 짐승들에게 일을 시키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가졌고 부득이한 경우에 한정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조선의 유학자가 육식에 대해 꽤 구체적인 조건을 서술하고 있다(54쪽).

첫째, 식물은 지각이 없어 먹어도 되지만 동물은 지각이 있어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므로 함부로 살생해서는 안 된다. 둘째, 사람을 해치는 동물은 사냥해야 한다. 셋째, 애초에 사람이 먹고자 하는 용도로 키운 가축은 먹을 수 있다. 넷째, 동물을 착취함에 있어 '그럴 수밖에 없다'는 부득이한 마음이 필요하다. 다섯째, 동물은 인간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인간이 동물을 먹을 정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중 첫째, 둘째, 다섯째 이유는 현대의 동물 윤리에서도 널리 논의되고 동의되는 주장이다. (다섯째 조건을 위해 "만물이 다 사람을 위해 생겨났기 때문에 사람에게 먹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주장에 "그렇다면 이(蝨)가 사람을 물어뜯는데 사람이 이를 위해 생겨났느냐?"고 대답하는 것은 재미있으면서도 핵심을 짚는 답변이다.) 나는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사월의책 펴냄)와 <동물을 위한 윤리학>을 썼음에도 서양보다 이른 시기에 이런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 부끄럽다.

셋째, 넷째 조건은 약간의 논의가 필요하다. 가축은 먹어도 되는가? 애초에 사람에게 길러지는 것이 가축의 본성이므로 사람에게 길러진다고 해서 가축의 호오를 해치지 않는다. 당시는 당연히 공장식 사육이 아니므로 그들의 본성을 존중하면서 사육할 수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도살할 때 고통을 주는 것인데 이것만 해결된다면 가축을 먹는 것은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고통 없는 도살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백정은 최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빠른 시간에 도살을 했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마음은 넷째 조건의 동물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부득이한 마음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동물 권익 운동가들에 비해 왠지 철저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59쪽)라고 말하고 있지만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우리는 머리로 이해하면서 마음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일이 흔하다. 동물 권익 운동에 깔려 있는 윤리에는 논리적으로 동의하지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먼저 이해할 때는 그런 실천의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마음이 곧 실천으로 옮겨 주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으면서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갖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먹어야겠다는 다짐을 갖는 사람은 선별적인 육식(플렉시테리언)을 할 것이고, 그 결과는 윤리적인 채식주의자가 늘어나는 경우보다 더 동물의 사육과 도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최훈 강원대학교 교수는 오랫동안 채식을 실천해온 '채식주의 철학자'입니다. 2012년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를 펴내면서 동물권에 대한 철학적 담론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최근에는 10여 년간의 동물 윤리 연구를 종합한 <동물을 위한 윤리학>도 펴냈습니다. 전공 분야인 논리학, 윤리학 등을 연구하면서, 철학이 얼마나 재미있고 유익한 것인지 사람에게 알리는 데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지원은…

▲ 최지원 <유학자의 동물원> 저자. ⓒ알렙
청소년 시절 별 뜻한 바 없이 소위 홈스쿨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다니지 않고 이것저것에 관심을 둔 적이 있었다. 고당(古堂) 선생님 문하에서 1년 동안 한학을 공부했다.

정규 과정으로는 상지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문화학과에서 조선 유학자들의 동물 관찰기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동물 다큐멘터리와 기록물을 즐겨보면서 동물에 대한 관심을 키웠는데,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고래와 대왕오징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현재 델라웨어 대학교(University of Delaware) '언어학과 인지과학' 대학원에서 공부 중인데, 이 책에서 드러났듯이 사람이 구태의 습관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생각의 알고리즘을 만들어 보려는 공부 기획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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